자존심의 반대말은 ‘나를 버리지 마세요’
이번에는 거의 한 달 만에 아버지를 뵈러 갔다.
머리를 박박 깎은 모습으로 깔끔하게 새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에 의지해서 면회장소로 오셨다.
눈빛은 여전히 살아있다.
아버지의 눈빛을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
로 시작되는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의 가사로 표현이 될까?
아버지는 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셨다.
마누라가 혼자 통영에 있는데 몸이 아프다.
내가 내려가야 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내려갈 수 있는 돈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돈이 나올 곳이 없다.
내가 생각하는 이성적인 대화는 이렇게 진행되어야 한다.
‘내가 내 몸 하나 간수를 못하니
내려가고 싶어도 못 내려가는구나 ‘
그런데 아버지는 기승전 돈이다.
지독한 가난은 우리 가정을 몸서리치게 한다.
양식장 사업을 하려고 바다의 한 구역을 배정받았다.
그런데 바로 옆 양식장은 너무 잘 되는데
아버지의 양식장은 아무런 열매가 없다.
조립식 주택 사업에 손을 대고 싶어 하셨다.
엄마의 간절함으로 큰아버지에게 손을 빌려 장만한 시골 아파트를 담보로 잡히려고 하셨다.
엄마의 처절한 반대로 그것을 하지 못하셨다.
아버지는 폐렴으로 섬망이 왔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앙고라토끼를 맡기고 도망간 놈을 잡아야 한단다.
밀양에 그 아들이 살고 있다.
내가 가서 돈을 받아야 한다.
나중에 삼촌과 통화할 일이 있어 이야기를 하니
결혼 전의 이야기였다고 그걸 기억하고 있더나 하신다.
실제로 앙고라토끼를 받아 키우면 털과 토끼까지 다 돈을 쳐 주겠다는 사업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그것을 하려고 하자 형님들이 욕을 하며 반대를 했다고 했다.
돼도 안 한 소리를 한다고 버럭버럭 했다고 하셨다.
그 반대를 무릅쓰고 시도하다가 사기를 당하신 것이다.
병원에 면회를 가면 가족들의 안부를 하나씩 물어보신다.
특히 엄마를 가장 많이 물어보신다.
나는 엄마와 아버지를 영상통화하게 한다.
아버지는 똑같은 말씀을 반복하신다.
내려가려고 해도 돈이 없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려오기만 하면 돈은 내가 줄게
참 놀라운 부부의 세계다.
면회를 마치고 주섬주섬 겉옷을 입는 중에 지퍼가 잘 잠기지 않아서 잠시 애를 먹고 있으니, 아버지는 반신마비된 몸으로 멀쩡한 오른손으로 내 지퍼를 채워주려 하신다.
순간 울컥하고 뭔가가 가슴속에서 솟구친다.
불편한 몸으로 나를 도우시려는 그 손짓하나에서 나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아채버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가슴이 먹먹한 채로 운전하였다.
아버지는 1년 8개월째 반신마비로 요양병원에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