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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뚜기 Oct 29. 2023

2개의 kidney

2개니까 하나는 나눠줄 수 있어!

중학교 1학년때였을 것이다.

자고 일어난 어느 날 아침,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꼈다. 뭔가 이상했다.

엄마는 부엌에서 열심히 자식들의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엄마, 나 자고 일어났는데 기분이 이상해"

"어 그래? 왜 그렇지? 기분이 이상하구나. 얼른 준비해서 학교 가야지"

"네~"

화장실에서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게 그 이상한 기분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상한 기분의 하루들이 계속되었고, 학교에서 성적이 나왔는데 좋지 못했다.

그래서, 선생님께 종아리를 맞았다.

종아리를 맞아서인지 며칠이 지나도 다리가 너무 무거웠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면서 친구들에게 맞아서 그런지 다리가 너무 무거운데 오래간다고 했었다.


점점 몸이 안 좋아졌다. 힘이 빠지고 먹은 음식을 토하기까지 했다.

엄마는 걱정이 되어 병원에 데리고 갔었다.

의사 선생님께서 콩팥이 좀 안 좋은 거 같으니 소변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나는 소변을 어떻게 받는지 몰랐다.

엄마도 몰랐었나 보다. 혼자서 화장실에 소변을 받아보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소변도 별로 나오지 않았었다. 소변을 못 받았다고 하니 의사 선생님께서 괜찮을 거다, 별로 심각하지 않다고 하면서 우리를 보냈었다.


점점 많이 아프기 시작했다. 학교도 못 갔다.

 

그렇게 겨우 1학년을 마쳤다.

2학년 진급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못되어서 1 년 휴학을 했다. 그리고 교회 목사님의 도움으로 부산에 있는 대학병원을 갔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지만 나는 병원에서 실수를 해 퇴원하지 못하고 있는 환자들이 모여 있는 병실에 입원했다.


한 남자아이는 나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10대였는데, 머리가 아파서 병원에 왔는데 무언가가 잘못되었는지 한쪽다리를 잃어버렸다.

다른 침대에는 간에 복수가 가득 찬 건장한 할머니가 입원했었다. 그 할머니도 무슨 사연이 있어 보였다.

여하튼 종합하자면 병원에서 검사하다가 뭔가 잘못되어 퇴원도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병실이었다.


병실 옆 통로를 조금만 걸어가면 신생아실이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가끔씩 아기들을 구경하러 가기도 했었다. 나에게도 조직검사를 해야 하니 소변도 받고 관장도 하고 여러 가지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난 부산 병원에 입원하러 갈 때 처음으로 엔젤호(부산과 통영을 오가는 쾌속선)를 타 보았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배의 창밖을 내다보니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에 돌고래인지 다랑어인지 모를 물고기들이 포물선을 그리며 배 옆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병원에 입원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봐줄 만하던 소변이 병원에 입원하여 받아보니 콜라색이었다.

나도 깜짝 놀랐다.

드디어 조직검사에 대해 의사 선생님이 설명을 했고 나는 그 병실에서 잘못되어 퇴원 못하는 사람들을 보며 겁에 질려 울부짖기 시작했다. 절대로 검사 안 하겠다. 집에 가고 싶다 라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엄마와 아빠는 내 말을 들어주셨고 나는 집에 왔다. 그래서 무슨 이유 때문에 콩팥이 아픈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집으로 왔다.


그때부터 나는 투병생활, 백수생활을 시작했다.

엄마는 화장품 방문판매로 매일 일하러 갔고 언니랑 동생도 학교 가고 아버지도 나가고 나면 집에 혼자 있었다.

어린 10대의 1년 휴학은 마치 영원 같은 느낌이었다. 어린 마음에 나는 영원히 중2, 중3은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신장이 좋지 않으면 짠 음식을 먹으면 붓게 된다. 몸에서 정수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 콩팥은 혈액에서 나쁜 것을 걸러주어 깨끗한 피를 온몸에 돌게하고 몸의 전해질 균형을 잡아준다. 그래서 이곳이 고장 나면 몸에 노폐물이 쌓이게 되기에 붓는 것이다.


그렇게 휴학하게 되고 우리 집은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사를 하면 으레 중국집에서 짜장면이나 짬뽕을 시켜 먹는 것이 가난한 우리 집애서 큰 행사였다. 설레기까지 했다. 아버지는 내가 콩팥이 안 좋으니 짜고 맵지 않은 국물로 된 짬뽕이냐 가락국수가 있냐고 중국집에 물었고 당연히 없었다.


중국집에서 배달해 온 음식을 가족들이 먹는데 나는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이걸 먹으면 몸이 더 아프니 못 먹는 것이라 설명해 주었지만 나는 신문지를 깔고 옹기종기 먹는 그 앞에서 뚝뚝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엄마는 이사하느라 살림정리도 안된 부엌에서 허연 콩나물국을 나를 위해 끓여 주셨다. 맛은 정말 맹물 같았다. 그걸 먹으면서 또 울었다.


아버지는 내가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되어서 한 번씩 시골집에 가면 짬뽕시켜 줄까 하고 자주 물으셨다. 눈물 흘리던 그때가 눈에 선하다고 하시면서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그렇게 콩팥병을 가지고 살게 되었다. 다행히 청소년시기라 그런지 아픈데도 공부도 하고 체력장도 하고 학교도 다니고 대학도 가고 직장도 얻게 되었다.


늘 소변검사를 하면 단백뇨가 나온다고 했었다.

10여 년이 지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릴 때 하지 못했던 조직검사를 해 보기로 결심했다. 27살 때 나는 내가 번 돈으로 내 질병의 원인을 알아보겠다고 결심하고 혼자 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조직검사를 하면 24시간 꼼짝 않고 누워있어야 된다고 했다.

장기의 조직을 긴 주삿바늘로 떼 내고 나면 거기서 발생하는 출혈과 발열증상으로 인해 얼음주머니를 데고 누워있어야 하는 것이다.


보통사람들은 콩팥이 배에 붙어 있는 줄 안다. 아마도 대부분의 장기가 배에 있는 줄 알 것이다.

안타깝게도 추측과 다르게 콩팥은 등 쪽에 있고, 그곳을 바늘로 찔러야 조직검사가 가능하다.

혼자 용감하게 입원했지만, 결국은 보호자가 필요했고, 나는 시집가서 돌이 막 지난 조카와 배 속에 아기가 있는 언니에게 SOS를 보냈다. 언니가 이제 2살 된 조카를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왔다. 언니도 임산부라 혼자 감당이 안되었던지 부모님께 연락을 했고, 엄마와 아빠가 부산으로 오셨다.

병원에 누워있는 나에게 아버지는 이런 말을 하셨다.

'네가 고아도 아닌데 왜 연락을 안 했느냐?' 그때는 아버지의 말씀이 옳았다고 느꼈고 긴장된 내가 좀 편안해졌다. 가족이 주는 편안함이었던 같다. 조직검사를 끝내고 나오니 이제는 배고플 테니 뭘 좀 먹어도 된다고 했다. 꼼짝없이 반듯하게 누워서 이것저것 넣어주는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가 조금 지나서 다 토했다. 누워서 먹으니 소화가 안되었던 것이다.

누워서 토하는 기분은 별로 좋지 않다. 나에게 모든 토가 중력의 영향으로 그대로 쏟아졌기 때문이다.


질병의 원인을 알게 되었다. 면역단백질이 무슨 이유에서인지 잘못 작동하여 사구체를 망가뜨렸고 그로 인해 제대로 거름망이 되어야 하는 역할을 못하게 된 것이다. 큰 입자들이 소변으로 빠져나오는 원인이었다.

이렇게 나는 만성 신장염을 안고 살아갔다.


몸은 피곤해도 심각하지 않았다. 의사들은 이렇게 살다가 나중에 투석을 하게 된다고 했다. 아니면, 이식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소망 없는 미래에 대해 나는 부인하면서 기적을 바라며 살아가고 있었다.


자원봉사 생활을 시작하고, 해외에도 나가고 나름 열심히 살고 있었다.

영국에서 많이 피곤해지기 시작했고, 뒷목도 가끔씩 아팠다. 몸이 좋지 않아 영국에 있는 클리닉에 갔다.

내 콩팥의 문제 원인을 안 지 10여 년이 훨씬 지난 때였다. 물론 자원봉사를 신청할 때도 건강검진은 하게 되어있다. 거기서도 단백뇨의 문제는 언제나 있었지만, 신장기능이 정상이었기에 딱히 어려움은 없었다.


영국의사는 신장기능이 나빠지기 시작했다고 말하고는 큰 병원으로 의뢰를 했다. 영국에서 다시 조직검사를 했다. 영국에서는 보호자가 없어도 가능했다. 간호사들이 엄청 친절하게 모든 것을 다 도와주었다. 그리고 돈도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나 같은 가난한 해외노동자도 이런 친절을 베풀다니 감사하였다.

조직검사 결과는 딱히 클리어하게 나오지 않았던 것 같다. 의사가 아주 애매하게 실패는 아니지만, 잘 된 것은 아니라는 식의 멘트를 했었다. 이게 무슨 말이지??


모든 결과지를 다 받아서 다시 한국으로 들어왔다. 영국에 있은지 5년 만이었다.

영국 의사와 한국 의사의 다른 점은, 영국 의사는 그나마 낙천적이다. 소금을 안 먹으면 조금의 도움은 되겠지만, 사람이 소금을 안 먹고 어떻게 살겠느냐는 말을 했었고, 한국의사들은 소금도 먹으면 안 되고, 고기도 먹으면 안 되고 , 이것도 안되고 , 저것도 안되고, 결국에는 이식수술이다. 투석이다. 이런 말들만 늘어놓았다.


이 소망 없는 메시지들을 수년간 검사하러 갈 때마다 줄기차게 들었었다. 몸의 면역력도 떨어져서 자주 감기에 걸리고, 신장기능은 한번 나빠지기 시작하면 회복이 안된다고 하더니, 그 말을 너무 잘 듣고 있었다.

몇 가지 합병증들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고, 투병하는 시간 동안 착한 우리 언니는 '다른 사람은 몸이 안 좋고 약도 먹고 있으니 나뿐이라고 내가 신장을 떼어줄 테니 걱정하지 마'라고 종종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떻게 언니의 장기를 내가 받겠냐고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한다고 말하곤 했었다.


드디어 그날은 오고 말았다. 어느 날 검사하러 병원에 갔는데 나의 신장기능 수치가 엄청 나빠진 것이었다. 나는 힘이 아주 없었다. 그렇지만, 그날 의사가 했던 말들이 나에게는 너무 긴장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연말쯤에는 이식수술을 해야겠습니다. 투석하면서 고생하지 말고 수술해 주겠다는 사람이 있으니 언니와 함께 이식수술을 준비해라는 말이었다. 진료실에서 나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손바닥을 자꾸 허벅지에 문대면서 손에 있는 땀들을 부지런히 닦고 있었다.

병원 진료 후에 친구를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친구에게 나의 상황을 알리고 약속을 취소하고 그냥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전화를 했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울컥하는 것이 솟아 나왔다. 대충 얼버무리고 버스를 타고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 당시도 나는 혼자 살고 있었다. 침실에 들어가서 나는 평생 처음으로 엄청나게 크게 대성통곡을 하였다. 나의 소망과 기도와 기대가 의사의 그 말로 인해 다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도 더 힘든 것은 이 사실을 언니에게 알려야 하는 것이었다. 정말 언니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는 않은데 하지만, 그것보다 더 강렬한 열망이 내 안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미치도록 살고 싶었다.

이제 44살인데 너무너무 살고 싶었다. 펑펑 울면서 전화대신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의사가 올해 말에 수술해야 된데"

"그래~ 걱정하지 말고 몸 잘 돌보고 있어라. 언니가 해줄 거니 걱정 마라. 형부도 자기가 해 주고 싶다고 하고 조카들도 서로 해주려고 하니 너는 걱정 말고 있어라."

그때는 이 말도 너무 고마웠고 그냥 펑펑 울었었다.

글을 쓰다 보니 착한 우리 언니가 내가 이 사람 저 사람 걱정 안 하게 그렇게 말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은 마음이 든다.



그로부터 1년 후에 나는 언니의 신장을 기증받았다.

수술한 첫날부터 몸이 좋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정상적인 사람들은 이런 컨디션으로 살아가는 거구나. 신장의 수치가 바닥으로 내리 꽂히듯이 정상보다 더 정상이 되는 기분은 수년간 고통가운데 있었던 모든 시간을 보상받는 것 같은 큰 환희의 시간이었다.


사실, 언니는 빈혈이 아주 심한 상태였고, 몸도 엄청 힘든 상태였다. 이식수술을 위해 내시경 검사를 받고 3시간이 넘도록 일어나지 않고 계속 잠만 자고 있었었다. 빈혈 수치가 너무 낮아서 이 상태로는 수술을 못한다고 했었다. 두 달 후에 언니는 엄청나게 빈혈 수치를 올려서 왔었고, 알고 보니 빈혈 호르몬 주사를 맞고 억지로 끌어올려서 나에게 수술을 해 주었던 것이다. 수술 이후에 언니는 이렇게 아픈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언니 교회의 교인들은 언니의 희생에 감동했다. 내가 다니던 교회 분들도 너무 감사하다고 이야기하며, 형제들이 해 주겠다고 말했다가 수술 당일에 도망을 가서 그 후 5년간 투석하다가 뇌사자 신장을 기증받은 분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는 몸이 아파서 힘들었지만, 가족 덕분에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이다.

내가 언니였다면, 나는 언니처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언니는 이렇게 말했다. '뭐가 무섭고, 겁이 나느냐? 어차피 두 개이니 , 하나는 나눠주라고 있는 것이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살고, 나는 하나도 겁이 안 났다고 말했다.


천사 같은 언니 덕분에 나는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는 당신의 고통을 나누는데 한 파트가 되고 싶습니다.' 하형록저자의 페이버랄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사람은 심장이식수술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데 6개월간 기다렸던 그 심장을 다른 20대 여인에게 양보한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그 이후 그가 심장이식수술을 받고 살아가면서 받아온 특별한 선물들에 대해 나누고 있다.

어떤 가난한 부부가 이 가정의 재정난으로 약을 빌려서 먹고 있을 때 돈 2만 불을 주었고, 나중에 형편이 나아져서 그 돈을 갚으려 했을 때 그 돈을 거절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We want to be a part of your suffering” (from Favor by Tim haahs)


고통은 나누면 절반이 되고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했다.

이기적인 세상에서 나만 생각하고 나라도 잘 살아야 된다고 말하는 요즘시대에 자신을 희생하고 다른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장기기증이야 말로 고통이 절반이 되게 하고 기쁨이 배가 되게 하는 놀라운 법칙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장기기증 #신장 #신우신염 #이식수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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