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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lly Jan 29. 2023

발견과 치유의 시간

내 인생에서 5-6학년은 참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수도권에서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곳에서 다녔던 한인학교에서의 추억이 참 좋았다.

특히 담임선생님을 잘 만나서 어느 정도 자신감도 찾고 자존감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6학년을 마치고 영어가 잘 안 되어있는 상태에서 국제학교를 다녀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그곳에는 한국인 중고등학교가 없어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외국인 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한인학교를 졸업 후 수줍음도 많고 말수도 적었던 내가 다시 국제학교 6학년으로 입학하면서 나는 엄청난 눈치를 보며 지내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또다시 학습적인 부분에서 겪은 좌절과 혼자서 ESL반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졸업한 걸 생각하면 정말.. 돌이켜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아버지한테는 공부가 힘들다고 죽어도 얘기하고 싶지 않았고, 엄마는 영어를 잘 못하시니 아예 말을 안 했다.

그러다 학교에서 하도 말을 안 하고 혼자 지내다 보니 상담선생님께서 상황을 심각하게 봤고 부모님 면담요청을 했다. 불려 간 부모님은 그 면담 내용을 나에게 전달했다.


"친구들이 너 벙어리인 줄 알았덴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를 이끌어 줄 수 있을까 고민도 하셨겠지만 그 당시 나는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어린 나이에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그 말을 듣게 해서 너무 죄송했고, 나 자신도 정말 부끄러웠다. 잘하고 싶은데 방법은 모르겠고 정말 혼란스러웠다.


삼 남매 중 유난히 언어에 소질이 없었고, 학교에 적응을 잘 못했다.

그 당시 한국인 친구들도 많았는데 그 친구들은 2-3년 지내다 귀국했기 때문에 중학교 마지막 무렵에는 다 떠나고 없었다.

같이 점심 먹을 친구가 없어서 화장실 변기에 앉아 점심을 먹었고, 여동생한테 친구 없는 모습 보여주기 싫어서 되도록 학교에서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내가 언니여서 창피해할까 봐 학교에서 아는 척도 안 했다.

그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나는 이미 나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당시 국제 고등학교가 없어서 유학이 필수 코스였다.

다들 미국, 영국, 스위스, 인도 등에 있는 명문 국제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코스였는데 미국은 불안하다고 하시며 유럽 시골 마을에 있는 선교사 자녀 학교에 입학시켰다. 마침 내가 좋아하고 잘 따랐던 학교 선배 언니가 다니고 있어서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그곳에는 한국인 친구들이 거의 없었다.

10학년에 나를 포함하여 3명의 한국인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그곳 토박이여서 본토 언어를 모국어처럼 잘했고, 또 다른 한 명은 남학생이었기에 함께 어울려 다니지는 못했다.

대부분 선교사 자녀들이어서 그랬던가 아이들이 정말 착했고 잘 다가와 주었다.

그런데 나는 말을 걸어와도 긴장부터 했고, 부자연스럽게 말하다 보니 그룹을 형성하는데 역부족이었다.


이듬해 여동생이 입학했고, 나는 또 그렇게 여동생을 벗 삼아 의지하며 유학생활을 잘 버텨낼 수 있었다.


졸업 후 한국으로 귀국했다.

엄마가 대학 준비부터 입학 때까지 함께해 주셨고 대학 합격 후 다시 아빠 곁으로 가셨다.

나는 갑작스럽게 할머니와 단둘이 살게 됐고, 할머니는 당뇨가 있으셔서 나를 케어해 주시는 입장이 아니라 보호받으셔야 하는 입장이셨다. 게다가 작은아버지댁에서 지내시다 작은엄마와 갈등이 있어서 나와 함께 살게 된 것이다.


할머니는 늘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엄마 험담을 그렇게 하시곤 했다. 왜 그랬는지 정말 모르겠다.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었다. 나는 엄마가 나의 발작 버튼이었다. 할머니와도 갈등이 생기고야 말았다.

할머니가 짐을 싸서 나가셨다. 아버지는 나를 원망했고 한국에 들어오셔서 할머니 얘기하다가 죽일 듯이 나를 쳐다보셨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다 할머니께서 자발적으로 다시 나와 같이 살면 안 되겠냐고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또다시 할머니랑 살다가 할머니께서 당뇨가 심해지셔서 요양원에 들어가셨는데 요양원에도 오래 계시지 못하고 무려 10번 정도 옮겨 다니시곤 했던 유별나신 분이셨다.

겉모습은 굉장히 온화하시고 인자하셨는데 며느리들한테는 지독했던 분이셨고, 같이 살아보니 내가 알던 분이 맞나 싶을 정도로 겉과 속이 다른 분이셨다. 친정엄마에게 인신공격도 많이 하셨고, 집에 놀러 온 내 친구에게도 갑자기 훈계를 하는 둥 정상적이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아버지도 어린 시절 참 힘들게 사셨겠구나 싶은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고 아버지의 아픈 사연을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던 같다.


할머니는 내가 36세 되던 해 결혼식 일주일을 앞두고 요양원에서 돌아가셨다.


나의 남편 되시는 분은 결혼식 앞두고 장례식장 가는 건 아니라는 미신을 믿는 집안의 장남이라 할머니 장례식장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나는 남편이 와줬으면 했다. 들어오진 않더라도 근처만이라도 와줬으면 했는데 진짜 속 마음을 말하지 못했고 그 집 문화를 존중하라는 부모님 말씀에 남편에게 안 와도 된다고 말했다.

내 진짜 마음은 꽁꽁 숨겨두고 두고두고 이를 갈고 원망했다.

아버지는 당신 자식의 감정과 생각은 존중해주지 않으셨고, 다른 사람의 입장 먼저 생각하고 나보고 무조건 이해하라고 하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슬프지가 않았다.

그저 외롭고 쓸쓸하게 돌아가신 것 같아서 한 사람으로서의 인생이 안타까워 눈물이 났던 거지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슬펐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쉬운 일을 찾아다녔고, 자신 없는 일이 맡겨지면 일을 그만 두곤 했다.

강사를 하면서도 앞에 서는게 두려워 새 학기 지나고 빈자리가 나는 곳을 찾아다니기 일쑤였다.

아이들 앞에서는 괜찮은데 부모님들에게 평가의 시선으로 주목받는 새 학기 오픈클래스가 공포 그 자체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서있지 못할 만큼 긴장하고, 손이 떨려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경직 상태가 된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말하는 것을 극도로 힘들어하면서 하필 선택한 직종이 강사라니..

정말 아이러니했다.


그렇게 늘 도망 다니는 삶, 그 삶이 정말 고단했다.

아무에게도 그 어떤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평가받고 싶지 않았다.)

일을 그만두고 당장 생계가 위협받을지언정 그것 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도망 다니는 인생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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