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추석, 구조 후 임보했던 강아지와 다시 만났다. 이름은 츄이. 우리와 살았을 때는 건수라고 불렀던 강아지다. 나는 고양이만 키워봤지 강아지는 처음이었는데, 어쩌다 갓 태어난 새끼 강아지 여덟 마리를 구조하는 바람에 우리 가족은 우유 먹이고 닦아주면 또 우유 먹이고 닦아줘야 하는 무한루프에 갇혀버렸다. 그 결과 나는 피로 누적으로 고열에 시달리며 병원 신세를 지고 말았다.
다 살았으면 좋았을 테지만 그중 네 마리는 세상을 떠났다. 기생충 감염이 있기도 했고, 워낙 새끼였기 때문이기도 한데, 켄넬에 넣을 수도 없이 작은 새끼 강아지를 안고 동물 병원을 들락거렸다. 수액도 놓을 수 없는 작은 강아지라 병원에서도 해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어서, 돌아오는 택시에서 떠나버린 새끼 강아지를 무릎 위에 올려둔 채 아파트 단지 안에서 엉엉 울어버린 날도 있었다.
정이 들어서만은 아니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살아있음’. 그 자체가 주는 놀라움을, 강아지들을 보며 느꼈던 것 같다. 삶도 죽음도 당연하지만은 않다는 것, 살아있다는 현상은 내 생각보다 훨씬 귀하다는 것. 차례로 떠나는 새끼 강아지들을 보면서 낙태 비범죄화에 대해 생각했다. 생명이 이렇게 귀한데 당연히 낳아야지 같은 생각은 아니었다. 그것과는 좀 다른, 생경하고 신비로운,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다행히 다른 임보자가 구해져서 우리 집에는 건수 한 마리만 남게 되었다. 강아지들은 다행히 좋은 가정에 입양 가게 되었고, 건수는 입양 전까지 우리 집에서 지냈다. 제법 개처럼 걷고, 접혔던 귀가 서고, 털 색깔이 변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건수가 입양 가기 전날, 방에서 같이 자면서 건수의 앞발을 잡고 말했다.
“건수야, 사랑해. 우리는 언젠가 다시 만날 거야.”
이건 꼭 살아있는 동안을 말한 건 아니었다. 물론 살아있는 동안에도 만나겠지만, 이건 영원에 대한 약속이었다. 너와 내가 언젠가 죽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지만, 나는 영혼이라는 게 있고 사후세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니까.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우리는 어떤 형태로는 계속 함께 있고, 언젠가는 다시 만날 테니까. 나에게는 그 믿음이 있다.
추석 밤에 건수와 자려고 누워있는데 그 순간이 생각났다. 맞아, 그때 그렇게 약속했는데. 정말 우리가 또 만났네? 그치? 건수 앞발에 입술을 대고 말했다. 건수야, 사랑해. 우리 또 언젠가 다시 만날 거야.
물리학자 김상욱은 물리적으로는 죽음이 훨씬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말했다. 배우 조현철은 죽음은 또 다른 존재 양식이라고 했다.
한국에 갈 때마다 나의 늙은 고양이들의 얼굴을 잡고 말한다.
사랑해. 너는 관심 없겠지만. 언니가 많이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