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위한 싸움
2022년의 끝자락에 이 글을 다시 읽으니,
여성의 삶에 있어 개선된 점은 없어 보인다. 시회가 더 안전해졌다든가, 그런 거.
그런데 여성들은 달라진 것 같다.
-
2017년을 시작하면서 동료에게 다이어리를 선물 받았다. ‘한국 여성의 전화’라는 시민단체에서 나온 다이어리인데, 기존에 쓰던 것과는 다른 점이 많다. 일단 월경 주기표가 들어 있고, 폭력을 겪었을 때 신고할 수 있는 많은 번호와 방법이 나와 있다. 또 달력에 적힌 기념일들이 다양한데 누가 알려 주지 않는다면 절대 모를 것들이다.
넘기면서 보니 1월 12일은 제주해녀 항일운동 기념일, 2월 8일은 남녀차별금지법 제정일, 3월 19일은 문학가 허난설헌의 사망일이다. 6월 19일은 성폭력 친고죄 폐지 시행일이고, 8월 14일은 고 김학순 씨 일본군 위안부 피해 첫 증언의 날이다. 11월 20일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이고, 돌아오는 25일은 세계 여성폭력 추방의 날이다.
다이어리 맨 앞을 보니 국가와 남성 위인 중심의 기념일로 채워져 있는 기존의 달력과 달리, 여성운동 및 인권운동사와 관련해 중요한 날들을 기입했다고 한다. 무엇을 기준으로 여기는가에 따라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생각했다. ‘지방 자치의 날’, ‘저축의 날’이 달력에 적힌 것은 익숙한데 ‘싱글맘의 날(5월 11일)’은 이토록 낯설으니 말이다.
도처에 있어도 관심을 갖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기 어렵다. 달력에 적혀 있어도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무심코 지나쳤을 것이다. 다이어리 마지막 장을 보니 ‘먼지 차별’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다. 도처에 있고, 유해하며, 늘 치우지 않으면 쌓이는 ‘먼지’와도 같은 차별을 ‘먼지 차별’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너무 작아서 차별인지 확신하기도, 바로 대처하기 어렵고, 무심코 그것에 동참하게 만드는 차별이기도 하다. 여성을 비롯한 약자들이 겪는 차별은 보통 이런 것이다. 그러다가 누군가 용기를 내서 커튼을 활짝 걷으면 그제야 눈부심과 함께 보이지 않던 먼지들이 보이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아주 많이.
요즘 인터넷에서 진행되는 'Me too' 캠페인을 보니 더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 할리우드의 유명한 영화 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가해 사실이 알려진 후, 배우 알리사 밀라노는 성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이 “나도(me too)"라고 적는다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사람들이 알게 될 것이라며 이 캠페인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유명한 배우들도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히기 시작했고, 어떤 배우들은 알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혹은 적극 행동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들이 경험한 것들이 결코 먼지보다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먼지보다 큰 일들도 손쉽게 그늘에 감춰진다.
어떤 글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다.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 시작하면 세상이 폭발할 것이다.” 사실 먼 나라까지 갈 것도 없다. 가까운 여자 친구들 셋만 불러 놓고 살면서 겪었던 성추행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2박 3일은 쉴 새 없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바바리 맨’이라는 귀여운 낱말로 포장되는 가해자들과의 만남부터 시작해서, 초면에 음담패설을 늘어놓던 사람들도 있었고, 어떤 이는 버스 옆자리에서 내 다리를 만져서 주의를 주자 황급하게 내리지를 않나, 차창을 열고 길을 알려 달라고 하더니 자기 옆자리에 타라고 하지를 않나, 모르는 아저씨들이 길거리에서 내 몸매를 품평했던 일도 있었다. 셀 수 없이 황당하고 불쾌한 일들을 많이 겪었는데 어떤 일들은 먼지 같았고 어떤 일들은 먼지보다 훨씬 컸다. 물론 개인차는 있겠지만 한국에서 이런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여성은 드물 것이다. 우리가 모두 말하기 시작한다면 세상이 폭발하는 걸로는 모자라지 않을까.
얼마 전에는 우연히 페이스북을 보다가 정말로 화가 나는 일이 있었다. 모 가구회사에서 있었던 성폭행 사건과 관련해 어떤 ‘유머’ 페이지에서 피해자를 ‘꽃뱀’으로 모는 포스팅이 있었는데, 고교 동창이 거기에 동조하는 댓글을 달아 둔 것이다. 누군가의 고통이 ‘유머’ 페이지에 올라온 것도 화가 나는데, 아는 사람이 그에 가담하고 있으니 더 화가 났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그토록 화가 났을까, 물론 내가 여성이고 피해자에게 공감했기 때문에, 그리고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너무 만연하고 심각함에도 그걸 유머로 여기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인터넷에 올라오는 피해자들의 글을 보면서 내가 나를 지키지 못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리고 내 친구를 지키지 못했던 순간을, 그때 그 여성을 지키지 못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먼지처럼 작고 가벼웠음에도 쉽게 떨쳐 낼 수 없었던 수많은 순간들을 말이다.
인터넷에서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피해 경험을 말하기 시작하자, 그에 놀란 어떤 남성들은 ‘지켜 주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예컨대 아내에게 ‘우리 딸은 내가 지키겠다’고 말하는 식이다. 만약 우리 아빠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면 마음은 정말 고맙지만 그건 아빠 혼자 할 수 없다고 답했을 것이다. 딸을 지키고 싶다면 듬직한 아버지가 되는 걸로는 부족하다. 지키고 싶다면, 여성이 처한 현실을 바꾸고 싶다면, 사회에서 ‘이상한 남자’가 될 각오쯤은 해야 한다. 술자리에서 음담패설하는 동료를 지적하고, 몰카 포르노를 보는 친구와 싸워야 하며, 남자라서 지나칠 수 있었던 먼지 같은 차별들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어떻게 지킬 수 있단 말인가?
얼마 전에 전철 승강장에서 여성 셋이 모여 있었는데, 누군가 그중에 한 명의 엉덩이를 만지고 지나갔나 보다.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동행인 다른 여성이 승강장에서 어떤 놈이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알았다. 날 위해 그런 것도 아니었는데 왜인지 날 위해 그렇게 해 준 것 같은 마음이 들어 고마웠다. 그리고 집에 가는 동안 내가 나를 지키지 못했던 순간들이 떠올랐고, 아까 들었던 큰 목소리를 다시 떠올려 보며 다짐했다. 다음번에는 나를, 친구를, 그 사람을 지키려고 노력해야지. 그러도록 연습하고, 먼저 내 안에 있는 작고 어두운 마음들과 싸워야지. 나와 또 우리를 위해서.
*본 원고는 2017년 11월 23일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