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 속에서도 환하게 피어난 미소
송도에서 인테리어 상담 가던 중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머니 돌아가셨습니다'는 단 10글자. 그 순간 시간은 멈추고 세상은 멀어졌다. 동생의 전화를 받자마자 남편은 한마다도 하지 않고 바로 차를 돌렸다. 나를 내려주고 '준비되는 대로 오라'고 하며 출발했다. 가슴 떨리는 마음과 눈물을 억누르며 상담을 끝냈지만, 어떻게 마쳤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황급히 서울로 와서 아들, 딸, 며느리와 함께 온양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내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어머님의 영정사진을 보자 그 순간 소리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꽃을 좋아하셨던 어머님을 감싼 꽃들이 어머니의 환한 미소와 함께 꽃물이 흐르는 듯했다.
33년간 늘 아프다고 하시던 어머님이 이렇게 홀연히 가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작은 몸으로 아픔을 참아내시며 방을 닦고, 혼자 병원을 다니셨다. 입원하기 전까지 청소와 속옷빨래까지 손수 하셨던 깔끔한 분이셨다. 입원한 다음날, 홀로 눈을 감으셨다. 7남매 중 누구도 어머니의 마지막을 보지 못하게 하셨다. 평생을 자식만 생각하신 어머님은 자신의 죽음을 자식들에게 보여주기 싫으셨을 것이다. 자식들의 마음이 아프지 않게 하시려고 홀로 떠나신 것이다. 어머니는 늘 그러신 분이셨다.
33년 전, 처음 인사 드렸던 날, 나는 마당에서 손을 씻고 현관 옆에 걸린 새하얀 수건으로 닦으려 하자 어머님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얘 그건 걸레야' 하셨다. 그렇게 깨끗하시고 깔끔하셨던 어머님이셨다.
장지에 다녀온 손자손녀들은 어머님 방에서 장롱을 열고 할머니 냄새를 맡으며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서로 위로했다. 서울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딸은 안방으로 달려가 할머니 사진을 찾아 톡 프로필 사진으로 올렸다. 어머니의 잠바에 코를 대고 '할머니 보고 싶어'하며 또 한 번 눈물을 쏟아냈다. 어머님은 손자손녀들에게 골고루 사랑을 주셨던 분이다.
33년간 함께 한 어머님을 이렇게 보내는 것이 가슴에 사무친다. 내 마음이 이런데 22년을 함께 산 동서의 마음은 얼마나 아플지 헤아리기 힘들다.
90년을 사신 어머님이나 9년을 사는 아이나, 죽음 앞에서 가슴 시린 것은 매한가지다. 살고 죽는 것은 백지장 한 장 차이다. 우리는 슬픔, 기쁨, 화, 행복에 얽매여 산다. 시간이 되면 사라지는 것도 자연의 이치이니, 너무 슬퍼하지 말자.
젊어서 아버지를 잃었을 때는 아이들 키우느라, 하루하루를 사느라 슬퍼할 겨를도 없이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어머님은 오래 봐왔고, 나이도 쉰이 되니 가슴이 이리 시리고 허전하다. 삼우제와 49제에 정성을 다해 기도 한다. 어머님의 극락왕생을 빈다.
어제도 49제 2제를 스님께서 기도해 주셨다. 어머님의 영정사진이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추스른다.
어머님, 극락왕생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