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다 큰 그리움, 위로받지 못한 풍경"
나는 한강 작가를 좋아한다.
그녀의 문장을 읽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고요해진다.
가끔은 다 읽지 못해도 좋다.
그저 가방 안에 작고 앏은 시집 한 권을 넣고 다니면
마치 하루를 채운 듯한, 나만의 은밀하고 기분 좋은 충만함이 있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라는 문장.
그 속에서 나는 어떤 저녁을, 어떤 마음을 꺼내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편의 시가 마음을 뒤흔든 적이 있다.
조용한 날들 – 그 시는 말했다.
“어둑어둑 피 흘리는 해가
네 환한 언저리를 애워싸고
나는 손을 뻗지 않았다. 무엇에게도.”
나는 그 문장을 반복해 읽었다.
그날따라 해가 유난히 붉게 떨어졌고,
어딘가 피 흘리는 것 같은 마음이 일었다.
우리 집은 7층.
작은 부엌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45도 정도만 돌리면
세탁실 위의 자그만 창이 눈에 들어온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나는 그 창을 자주 바라본다.
그 창은 나만의 작은 조망대다.
맑고 뜨거운 날이면,
붉은 노을이 창가를 가득 채운다.
어느 날은 맑고 발갛고,
어느 날은 음울하게 검붉고,
그 붉음 속에서 나는 조용히 나를 채운다.
매일 아침 눈 뜨면, 그 창 너머의 하늘을 본다. 잠깐 멍하니.
어둑한 저녁이면 언제나 습관처럼 그 자리에 선다.
앞건물 옥탑이 거의 7층 높이지만,
눈동자만 살짝 들어 올리면
멀리 관악산의 능선이, 그 위로 야트막한 하늘이 보였다.
나는 그 산을 좋아했다.
그 하늘을 좋아했다.
그 아주 멀고도 가까운 자연을 사랑했다.
거실에 있다가도
해가 지겠다 싶은 시간이면
슬그머니 일어나서 그 창앞으로 향한다.
조용히, 아주 오래 그 붉음 곁에 머문다.
내가 이 도심 속에 터를 잡고 살 수 있었던 건, 어쩌면
그 작고 소중한 시선 한 조각 덕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던 어느 날,
이대 정문 옆의 빈 터에 철근이 서기 시작했다.
조금씩 조금씩 자라던 건물은
어느 순간, 내 시선 속의 산을 지워버렸다.
관악산의 능선이 끊겨지고,
그 위 하늘도 사라졌다.
멀리 붉음을 전하던 전송탑도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턱’ 하고 막혔다.
나만의 마음 산책이 멈춰버린 셈이었다.
설마설마 했다.
그러나 건물은 멈추지 않았고,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건축물 표지판을 째려보곤 했다.
화가 났다.
눈물 나진 않았지만,
어딘가 계속 아렸다.
결국 구청에 전화를 걸었다.
돌아온 말은 짧고 단단했다.
“허가받고 공식적으로 올리는 건물입니다.
법적 문제가 없다면, 민사소송으로 진행하세요.”
이게 다인가?
그게 전부인가?
내 마음과 풍경은 법 위에서 증명되지 않는 건가?
건축주 측에도 연락해 보았다.
“전달하겠습니다” 하는 말만 몇 번.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로,
법에 어긋나지 않으면 뭐든 가능한 세상일까.
나는 오랫동안 그 창가에서 위로받고 살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는데.
내 초상은 하늘을 향했고,
내 마음은 산을 향했는데,
그걸 가리는 건 누구의 권리로 정당화되는 걸까.
**
보상을 받고 싶다.
정말은 아니라도,
무엇보다 위안을 받고 싶다.
사무적인 목소리도, 매뉴얼 같은 말도,
지금의 내 마음에는 들어오지 않는다.
다만 누군가 조용히 이렇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당신 마음, 참 아프겠다.”
“그 하늘이 그리워지는 날들이겠어요.”
그 말이면,
그 한마디면
눈물 흘릴 수 있을 것 같다.
지금껏 그래왔다.
산처럼, 강처럼, 바람처럼
그저 그렇게 흘러가도록 두며 살아왔다.
그런데도 정말로,
이번에도 이렇게 지나가야만 하는 걸까.
나는 지금도
또다시 45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본다.
붉은 빛은 보이지 않고,
건물의 벽만
해를 가린다.
그저,
그 하늘을 다시 한 번만이라도
별 구름 없이 바라볼 수 있기를.
언젠가 그리움도 창문 너머 반짝일 수 있기를.
그러면 또
나는 조용히, 아무 일 없던 사람처럼
살아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