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나에게
은행에서 대출 신청 서류를 쓴다.
"명의가 누구고 계약서가 어쩌고 잔금일이 저쩌고... "
독립 이후 다섯 번째 이사를 준비하고 있다. 결혼하고는 세 번째 신혼집이다. 집을 사고파는 것은 정말 어른의 세계구나. 이렇게나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들을 부모님은 우리가 학교 가고 학원 간 사이에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하셨었나 보다. 영혼까지 끌어 모아도 될까 말까인데, 걱정이 산더미 같은데, 그런 걱정 자식들은 모르게 하시려고 많이도 애쓰셨겠다 싶다.
24살. 눈 내리던 3월에 서울의 한 구석 지하철 종점 근처에 자취방을 얻었다. 에어컨 실외기실이 방 안에 있던 그 집은 겨울이면 바깥보다 더 추워서 전기장판 안에 움츠리고 있던 나는 화장실을 갈 때마다 그 작은 집에서 뒤꿈치를 들고 전력 질주하곤 했다. 얼음장 같은 방바닥을 디디면 그대로 얼어붙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가족의 둥지에서 배부르고 등 따시게 23년을 살던 아이는 그렇게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나왔다. 어설픈 솜씨로 문어 같은 쪽머리를 하고, 안 어울리는 줄도 모르고 분홍 립스틱을 바른 채. 깨워주는 사람도 없이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교육원으로 향했다. 4개월의 교육이 끝나자 하루아침에 진짜 어른의 세계에 던져졌다. 교육원이 사회인 줄 알았지만 그곳은 학교고 울타리였다. 진짜 사회는 따로 있었으니. 바퀴가 덜덜거리는 캐리어 하나에 내 삶을 유지해주는 최소한의 것들을 욱여넣고 매번 다른 시간에 다른 곳으로 출근했다. 만약 집이 없어져도 이 캐리어 하나만 있다면 전 세계 어디에서든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가방을 끌고 퇴근했다. 며칠 씩 비어 있어 사람의 온기라곤 없는 작은 방으로.
그렇게 가방을 끌고 다니는 사이 연애도 하고 결혼도 했다. 남편은 다정한 사람이다. 남편은 가끔 우리가 만나기 전 혼자 작은 방에서 삶을 꾸려 나가던 사회초년생인 나와 딸을 품에서 떠나보낸 우리 엄마를 상상하곤 안쓰러워했다.
어느 날 남편이 보여줄 게 있다며 어떤 영상의 링크를 보내왔다.
'사라진 소녀'
뮤직비디오였다. 영상 속에는 (나보다 훨씬 더 예쁜) 나의 그 시절이 있었다. 그늘 진 낯선 골목도 외로운 밤도 혼자 걸어온, 무서울 땐 숨기도 하고 달리기도 했던 내가 있었다. 처음엔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울었다. 힘들거나 외로운 감정은 외면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해 왔기에 이제야 퇴근길에 사 온 조각 케이크에 혼자 생일 초를 꽂던 아이가 보인다. 조금 미안하다. 외로웠겠다.
익숙한 새장을 떠나 세상으로 떠난 소녀는 이제 새로운 새장을 꾸렸다. 첫 출근길에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속 소녀는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다. 아직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지만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니 괜찮다. 생일이 아니라도 케이크를 사다 주는 남편이 있고, 흩어져 있던 친구들은 가정을 꾸리고 모여 살게 되었다.
그때의 나를 만나면 그냥 말없이 꼭 안아주고 싶다. 괜찮아질 거란, 좋아질 거란 말은 해 줄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어차피 그때로 돌아가도 힘든 게 힘든 줄 모르고 외로운 게 외로운 줄 모른 채 같은 길을 걸어올 것이기 때문에.
이제는 날아갈 때가 된 것 같아요
내 날개 그대보다 커졌죠
그대의 내가 되기엔
나의 길 멀고 많아
사랑하지만 난 날아갈래요
그대 품이 얼마나 편한지 잘 알죠
익숙해진 나의 새장은
이제는 버려도 돼요 안 돌아와요
이제 어떻게든 내가 해나갈게요
그대 알던 소녀는 사라져
저 먼 숲으로 가요
그늘진 낯선 골목도
외로운 밤도 혼자 걸어볼게
사진 속 소녀 추억이 되어
꿈이 내게 오는 날
멋지게 놓아준 그댈 찾아올게요
여인의 모습으로 안녕
사랑도 나의 선택을 믿어보아요
몇 번 아플지도 몰라요
모른 척 기다려주면 어느 날 문득
두 손 마주 잡은 누굴 데려갈지도
그대 알던 소녀는 사라져
세상 숲으로 가요
그늘진 낯선 골목도
외로운 밤도 혼자 걸어볼게
사진 속 소녀 추억이 되어
꿈이 내게 오는 날
멋지게 보내준 그댈 찾아올게요
여인의 모습으로 사랑해요
내가 엄마가 되면 깨닫게 되면
꼭 말할 수 있도록 건강해요
<사라진 소녀> 윤종신, 루싸이트 토끼
2015 월간 윤종신 8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