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 겨울방학부터 초등 문법책을 들이밀었다. 분명 잘할 거라 생각했고 처음에는 잘 따라왔다. 그런데 점점 아이는 어려워했고 급기야 다 틀렸다. 풀고 틀리고, 다시 풀고 또 틀리고를 반복했다. 5학년이 돼서 다시 문법책에 도전했다. 인터넷강의를 듣고 문제를 풀게 했다. 앞부분은 쉬워서 잘하다가 뒷부분이 되니 많이 틀렸다. 점점 어려워지는데 아이는 감으로 풀고 있었다. 강의를 들으며 개념정리를 하게 했다. 개념 정리 후 문제를 풀었더니 맞는 개수가 늘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안일하게 아이에게만 맡기고 있었구나. 후회스러웠다.
아이는 처음엔 잘하다가 또 엄마 말을 듣지 않았다. 귀찮고, 다 안다는 이유로 정리를 하지 않는다. 결국 다 틀린다. 본인이 개념정리를 하지 않으면 다 틀리고, 틀리면 또다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하기 싫다고 안 한다. 너무 답답했다. 틀릴 때마다 개념정리를 하도록 억지로 시켰다.
“틀리는 건 모르는 거니까 공부를 해야 해. 널 벌주려고, 쓰라고 하는 게 아니야. 쓰면서 공부를 해야 잘 기억할 수 있어. 또 쓰기 싫으면 처음부터 개념을 확실히 익히고 문제를 풀어서 안 틀리면 되잖아. 집중해서 틀리지 않게 노력해 봐.”
실랑이는 계속되었다. 이러다 사이만 나빠질 것 같았다. 결국 6학년 개학을 앞두고, 영어학원을 다니기로 했다.
동네에 있는 영어학원을 검색한다. 중고등내신전문학원이 눈에 띄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전화를 해보니 이번 겨울방학 때 6학년반이 개설되었다고 한다. 약속을 잡고 아이와 함께 상담을 갔다. 문을 열자마자 생각보다 널찍하고 쾌적한 공간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학원 한편에는 자습실도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원장선생님은 키가 크신 분이셨고, 목소리는 호탕했으며 교육에 대한 열정과 자신감이 넘쳐났다. 간단하게 본 테스트 성적이 예상외로 나쁘지 않았는지 원장선생님은 처음 본 아이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문법, 리딩, 단어, 리스닝까지 골고루 내신준비해 주는 학원이라 그런지 곧 중학생이 되는 아이에게 딱 맞는 학원 같았다. 처음부터 꼼꼼하게 구멍 메우는 식으로 진도 나가는 게 나의 생각과 맞아떨어지기도 했다. 집에서 하던 것을 복습하며 재확인할 수 있을 것 같아 그 학원을 선택했다.
첫날 아이는 영어학원에 가서 잘한다고 계속 칭찬을 받았다며 좋아했다. 아무래도 첫날이다 보니 제일 쉬운 be동사를 배워서 그런 거 같다고 한다. 수업이 끝나면 자습실에 가서 그날 숙제를 다 하고 오도록 했다. 아이는 학원에서 1시간 30분 수업을 받고 1시간 정도 숙제를 하고 온다. 학원 안 가는 날은 단어를 외운다.
지금까지 학원 다닌 지 일주일이 됐고 상담전화는 두 번했다. 원장선생님은 아이가 너무 잘한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덧붙여 나에게까지 칭찬을 해주셨다. 너무 잘 가르치셨다며 말이다. 꾸준히 해 오긴 했지만 칭찬받을 정도로 잘 한건 아니라 민망함이 몰려왔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더니 무뚝뚝한 나의 어깨도 들썩이게 했다.
학원간지 3회 차에 이미 조금은 들통난 것 같다. 단어시험 30개를 봤는데 14개 틀렸다고 한다. 너무 부끄러웠다. 칭찬을 조금 덜 받았더라면 이 정도까지 부끄럽지는 않을 텐데.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결국 아이를 다그쳤다. 칭찬을 받았는데 이렇게 노력을 하지 않아서 다 틀리면 어쩌냐고. 아이는 그날따라 숙제가 너무 많아서 다하지 못하고 집에 왔고, 숙제도 밀리고 공부도 밀리는 바람에 단어를 제대로 외울 수가 없다고 했다.
다행히 그다음 날은 숙제를 줄여줬다며 다시 원래대로 숙제를 다 하고 집에 왔다. 스케줄대로 단어를 외우고, 단어시험을 봤다. 결과는 30문제 중에 6개를 틀렸다. 왜 틀렸냐고 물으니 공부할 때마다 헷갈리던 것이 결국 틀린 거라고 한다. 결국 이 또한 공부시간이 부족해서 생긴 것이라며 아이를 나무랐다.
아쉬움이 남는다. 좀 만 더 집중해서 노력했더라면 다 맞을 수도 있을 텐데, 왜 아이는 그 조금을 더 하지 못해 계속 틀리는 걸까. 나와 아이의 관계가 나빠지지 않기 위해 학원을 보냈는데, 단어 외우라고 다그치는 나를 보니 기막히다. 이럴 거면 굳이 학원에 다닐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와 아이의 이미지를 실추시키지 않기 위해 결국 또 아이를 다그치고 있다.
"너와 관계 나빠질까 봐 학원에 보냈는데, 단어 때문에 엄마가 화를 내고 있으니 이게 말이 되니? 이럴 거면 학원에 안 가는 게 낫겠다."
과연 아이는 무슨 생각인 걸까. 고민도 잠시, 불현듯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왜 화를 내고 있는 걸까. 내 이미지 때문에 아이가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닐까. 아이가 노력을 덜 한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했지만 그 정도밖에 할 수 없는 건 아니었을까. 나는 왜 아이의 노력에 대해 칭찬해주지 못한 걸까.
학원선생님은 아이에게 칭찬을 해준다. 잘하면 잘했다고 더욱 칭찬을 많이 해주고, 잘 못했더라도 다그치지 않고 잘할 수 있도록 격려해 준다. 선생님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엄마는 엄마의 욕심 때문에 아이에게 칭찬을 해주는 것도 노력이 필요하다. 아이의 단점보다 장점을 먼저 볼 줄 알아야 한다. 아이를 다그치지만 않아도 반은 성공인 셈이다. 하지만 어렵다. 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건지, 엄마라면 누구나 그런 건지 알 순 없지만 아이의 행동에 대해 칭찬을 먼저 해 주기가 쉽지 않다.
아이가 어릴 땐 '엄마'라고 말만 해도 칭찬해 주고, 걸음마를 하면 세상 뛸 뜻이 기뻐 칭찬을 듬뿍 해줬는데 학부모가 되고 나니 쉽지가 않다. 모든 것이 공부와 연관되고 아이의 모습이 내 모습과 투영된다. 아이가 잘하면 내가 잘하는 것 같고, 아이가 못하면 내가 못 하는 것 같다. 이미 학원선생님이 해 준 아이의 칭찬에 내 어깨는 들썩거리고 입꼬리는 올라갔다. 학부모라 어쩔 수 없나 보다. 아무리 내려놓기를 한다고 하지만 아이가 칭찬을 받으니 내가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엄마가 듬뿍 줄 수 없었던 칭찬을 학원선생님이 대신 주었다. 아이는 수학학원과 영어학원을 동시에 다니는 게 힘이 들 법도 한데 아직까지 열심히 다니고 있다. 집에 오면 선생님이 칭찬해 주셨다는 이야기부터 한다. 엄마가 해 줄 수 없는 칭찬을 선생님이 충족하게 해 주시나 보다. 아이는 조금씩 자존감과 자신감이 칭찬으로 채워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