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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스란 Nov 08. 2023

눅눅해진 콘 컵

내 월드콘은 어디 있어?

드디어 중3 아들 마지막 시험 첫날이다.

정말 고민을 많이 했지만 집에는 따로 가기로 했다.

시험일엔 보통 오후 2시 전에 끝난다. 5시 이후에나 퇴근하는 나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시험기간이면 다를 줄 알았지만 축구든 게임이든 두 시간은 해야 하나 보다. 나를 만나기 1시간 전에 스카를 간다는 걸 어제 방과 후 일과를 물어보고 알았다. 날 속이는 것은 아니다.  왜 시험 끝나자마자 또 공부해야 하는지, 시험 기간에는 방과 후에 친구와 축구나 게임을 하는 게 왜 이상한 건지 모를 뿐이다.




우리에겐 시험 기간 금기어가 있다.

서로의 행복을 위해 언의 약속같이 정해졌다.

'시험 잘 봐.'

시험은 열심히 보는 거지 잘 봐야 하는 건 아니다.

힘든 시험 시간을 견디고 자신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인 것이다.

어쩌다 이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해를 넘어 아량을 베풀기 시작한 지 오래다.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헤어질 때 같은 인사를 했다.

"하루 잘 보내. 사랑해~ 쪽♡"

덕분에 시험이라고 투덜거리거나 찡그리지 않고 '나도 사랑해요.'라는 말을 하고 차에서 내린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전 회의 중인 나에게 여유 있게 카톡을 보내왔다. 회의가 끝날 무렵엔 전화가 왔다. 잘 도착했다는 전화일 거라 생각했다. 버스에서 잠이 들었다가 깨 보니 너무 낯선 곳이라 내릴 곳을 지나친 줄 알고 내렸다고 한다. 어쩌나 싶어 위치를 물으니 지나친 게 아니라 못 가서 내린 것이었다.  

시험을 보느라 피곤하긴 했나 보다.

다음 버스는 40분 후에나 있다. 아들이 집까지 30분 거리라며 걸어가겠다고 한다.

한적하고 낯선 곳일 텐데 중간중간 지나가는 곳을 사진 찍어 보낸다. 무인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월드콘 하나를 사 먹으며 간다. 추운 날인데 콘을 먹으며 터벅터벅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니 많이 컸다 싶었다.

'월드콘 컵이 눅눅해져서 별로예요.' 카톡이 왔다.

작년 반대방향 버스를 타고 낯선 곳에 내려서는 울면서 전화하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2주 전까지만 해도 시험기간엔 같이 있어줘야 할 거 같아서 외출까지 미뤘다. 정작 시험 기간에는 더 미룰 수가 없어 뿌리염을 하러 갔다. 평일 퇴근 후라 노곤했는지 염색하는 중에 고개를 몇 번이나 떨구었다. 샴푸 하며 두피 마시지를 받으니 잠도 깨고 두통이 사라지는 듯했다. 7시가 넘어 끝났다. 내일 시험 보는 역를 같이 공부하기로 한 터라 8시에 보자고 전화해 두었다.

집에 다 와가는데 카톡이 온다.


'그래, 이래야 내 아들이지. 시험 멀쩡히 잘 보고 왔네.'

카톡은 잘 읽었으나 려오라고 아들을 불렀다.

자기 말이 씨알도 안 먹힌 걸 알았는지

'잠깐만요.'만 몇 번 외친다.

결국 8시 30분에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공부할 준비를 하고 내려왔다.

카톡에 반응하지 않길 정말 잘했다.




열흘 전 역사공부하 곳에서 진도가 멈춰있었다.

모르는 말만 머리 아프게 외우고 있을 바에 엄마한테 이해되게 설명 듣고 하는 게 나아서 안 하고 있었단다. 기분 나쁠 수 없는 말에 그냥 넘어갔다.

앗, 훈구파와 사림파가 나온다. 나도 그다지 재미있어하지 않았던 부분이다. 기억을 더듬어 비유를 하며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젠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가 나온다.

아이에게 전혀 와닿지 않을 이 단어들을 연상하게 하느라 순간적으로 말을 만들어 내며 이야기해 주었다.

김종직은 잘못이 없었는데 오해받았어.

연산군이 갑자기 급발진 한 거지.

조광조 뽑은 중종에겐 기묘한 일이었어.

그게 뭐라고 아들이 재미있어한다.

덕분에 화기애애하게 공부가 끝났다.

시험 범위인데도 문제집은 휑하게 비어있었다. 들은 것만으로공부가 안 되니 문제를 풀어보라고 했다. 역시 대답은 "내일 볼게요."다.

비록 내일 시험인 교과지만 내일이라도 본다고 했으니 다행이 생각하기로 했다.




11시가 다 되어가는 아들방에선 게임하는 소리가 난다.

남편은 쓰레기통에 있던 월드콘 껍질을 보더니 묻는다.

"내 월드콘은 어디 있어?"

"없어, 오다가 하나 사서 먹었대."

"내 거도 하나 사 오지. 근데 쟤는 왜 게임을 지금까지 해? 내일 시험 아니야?"

"자기 할 만큼 했나 보지."


시험이 사흘이기에 망정이지.

내일 시험 끝나 놀 계획으로 가득한 아들

너만 좋은 게 아니라 실은 나도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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