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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스란 Nov 07. 2023

펜이 없어서 못 쓰겠네

Z-1 RT 0.7mm

글 쓰는 테이블 뒤 소파에 누워 폰을 만지작 거리는 아들이 보기 싫어 일부러 쳐다보지 않았다.




시험 첫날 얼마나 수고했는지 알기에 가을비 내린 후 뚝 떨어진 날씨 얘기를 하며 늘 가던 국밥집에 갔다.

"순댓국 특 하나, 일반 하나, 양념은 따로 주세요."

국밥이 나오기 전, 아들은 자연스럽게 수저를 놓아주고  물도 따라 준다.

몇 가지 되지 않지만 추가로 시켜 먹을 만큼 맛있는 반찬을 앞에 두고 이야기한다. 온통 내 얘기다.

배드민턴 친 얘기, 직장에서 들었던 다소 충격적인 소식까지. 혹시나 다른 테이블에 들릴까 손까지 입에 대고 말한다. 아들은 말하는 사람 기분 좋을 만큼의 맞장구와 정해진 답을 해준다.


뜨끈한 국밥으로 채워진 배, 차 안에 두었던 향긋하고 상큼한 귤 두 개까지 먹고 아들이 즐게 부르는 노래를 들으며 집으로 향하니 더 이상 필요한 게 없었다.

집에 도착하니 7시도 되지 않은 시간인데 캄캄하니 하루가 다 간 듯한 어둠이 깔려있다.

대로 씻고 침대에 몸을 뉘울 수만 있다면 행복이 따로 없을 순간이었다.


그러나 내일도 시험이다.

각자 씻고 나와 한 공간에서 만났다. 다이어리, 읽던 책, 노트까지 챙겼다. 조용히 각자 할 것을 하며 같이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웬일인지 오늘 푼 시험지를 꺼내 놓는다.

아까 오는 길에 말해줘서 결과는 알고 있었지만 자기가 얼마나 애써 풀었는지 보여주고 고생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잘했네, 이런 어려운 것도 맞았네, 대단하네, 아깝게 틀렸네, 정말 고생했네."

내 마음에 있는 말은 저 쪽으로 밀어놓고 정신을 차린 후 맘 상하지 않을 듣기 좋은 말만 골라해 주었다.

다행히 맘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주섬주섬 시험지를 다시 챙겨 넣는다.


내일 시험 볼 교과 자료를 꺼내며 한 마디 한다.

"아, 사회 교과서를 안 가져왔네."

찌릿, 목소리가 커질 뻔하는 걸 간신히 참은 후 물었다.

"다른 거 볼 거 없어?"

"교과서로 계속 봤는데... 내일 학교 가서 보면 되지, 뭐."

순간 속이 뜨거워졌다가 가라앉았다.

들고 온 몇 장의 자료로 내게 퀴즈를 낸다. 다행히 다 맞췄다 싶었더니 기대 밖의 나의 선전으로 재미없었는지 교과를 바꿨다.


드디어 나올 게 나왔다, 수학.

이과 출신의 부모에게 태어난 수포 하고픈 아들.

학원이라고는 초등 5학년 때 달랑 두 달 다닌 게 전부다.

나름 정성을 쏟아 방학마다 직접 보충지도를

 했으나 흥미는 없고 결과까지 나쁜 이 교과를 열심히 하고 싶을 리가 없다.

그래도 도형은 괜찮다며 몇 문제를 풀더니 간식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하필 오늘 고른 간식은 껍질째 있는 캐슈넛.

부스럭부스럭 두 손을 써야만 먹을 수 있는 간식에 눈과 귀와 손이 다 갔다. 덩그러니 놓인 문제지는 캐슈넛 껍질 받침이 되었다. 한 번 시작하면 바로 멈출 수 없는 견과류, 열세 개를 까먹고 끝냈다. 그만하기 다행이다.

다시 몇 문제를 푸나 싶더니 나를 쳐다보며 종이를 내민다.

차근히 설명을 해주고 있는데 아들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뭐 하는 건가 싶어 웃음기 없이 쳐다보니 아차 싶었는지 멈춘다.

그렇게 설명이 오고 가는 중에 내 모습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분명 문제지는 아들 앞에 있었는데 내 노트 한 바닥만 시커멓게 도형과 계산이 가득하다. 도대체 이 공부는 누가 하는 중인지.

그렇게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화장실을 다녀오더니 테이블이 아닌 소파로 향한다.

슬쩍 쳐다보니 자연스럽게 누워 폰을 만진다.

'그래, 쉴 수 있지.'

문제를 푼 쪽을 넘겨 노트 새 쪽을 편 후 내가 쓰려던 것들을 쓰기 시작했다.

10줄 이상 글을 썼는데 아들은 여전히 소파에서 요지부동이다.

"쉬려면 들어가서 제대로 쉬어.(쉴 만큼 쉬었으면 그만 쉬어)"

"그럴까?"

기지개를 켜더니 일어나 내 옆에 앉아 갖고 나왔던 문제지와 자료를 앞뒤로 뒤집으며 뒤적거린다.


그 모습을 보면서 글을 쓰는데 잉크가 다 되었는지 점점 흐려진다. 그럴수록 더 꾹꾹 눌러썼다.

내 모습을 보며 아들이 한 마디 한다.

"펜도 안 나오는데 엄마도 그만 쉬세요."

"아니, 엄마는 좀 더 쓸 거야."

자연스럽게 쓰고 싶었는데 점점 흐려지는 펜, 몇 자 더 쓰니 노트엔 잉크가 아니라 눌려 자국난 글자가 박혔다.


"우리 그만 들어가요."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지만 펜이 없었다.


쓸 펜이 있었다면 우린 더 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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