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넌 어떤 글자냐
아들이 머리를 한다고 하여 미용실에 데려다주었다.
미용실은 한 시간쯤 걸리는 곳으로 대중교통으로는 2시간 가까이 걸리기에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다.
마지못해 나서는 듯했지만 속으로 기뻤다.
아들이 다운펌을 다 할 때까지 나만의 독서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어폰만 꽂으면 귀 익은 팝송 위로 백색소음이 적당한 볼륨으로 흐른다. 서비스로 주시는 아이스아메리카노와 몇 가지 달달이까지 아무런 방해 없이 최소 한 시간이니 더할 나위가 없다.
들고 간 책은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다. 유홍준 작가님이 최근에 쓰신 잡문집이다.
책 이야기만으로 한참 쓸 거리가 있어 연재를 하고 싶을 정도다.
<책을 펴내며>부터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고작 네 번째 줄에 눈이 멈췄다.
궁벽진 시골 마을이었다.
처음 본 낱말이다. 봤을 수도 있지만 눈에 박힌 건 처음이다.
문맥상으로 충분히 짐작가지만 가끔 내게 찾아오는 낱말에 꽂힘 현상이 온 것이다. 사전을 켰다.
궁벽지다: 매우 후미지고 으슥하다.
한자를 들여다보았다.
내가 굳이 한자사전까지 찾게 된 이유를 알았다.
궁할 궁이라고 알고 있는 이 한자가 다할 궁이었다.
매우 씁쓸했다.
왜 할 만큼 다 했는데 궁한가?
궁하다는 게 뭔가? 몹시 가난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연으로 두 개의 전혀 다른 뜻을 지니게 된 것일까.
전혀 다른 뜻이긴 할까.
화면 아래까지 내려 보니 뜻이 무려 열여덟 개다.
눈이 더 커졌다. 분류를 하고 싶을 양이다.
메모수첩을 열어 굳이 다 베껴 썼다.
대강 두 갈래로 나눠지나 했더니 상충되는 듯해 보이는 뜻까지 있다.
다하고, 달하고, 마치는데
중단하고, 닿지 않는다고?
외진데 드러나고
작고, 좁고, 얕은데
크게, 매우라니..
혼란스럽다.
상극은 통한다는데 그런 걸까?
원래는 갑골문자로부터 온 한자인데 몸 궁자가 아니라 등뼈 려 자가 두 개 있었다고 한다.
등뼈가 드러날 만큼 야윈 사람이 집에 있다는 의미로 형성문자로 바뀌어 몸 궁자를 쓰게 되었다는 글도 읽었다.
여하튼 궁자는 가난으로 시작하였으나 끝까지 간다는 뜻을 지닌다.
궁극에 이르러 가난하고 싶지는 않지만 때로 궁리하고 궁구 하며 살고 싶다.
오늘 이후로 만나는 窮은 어떤 뜻을 지닌 것인지 한 번 더 살펴보게 될 것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유홍준 작가의 《나의 문화답사기 1》을 통해 알려진 이 문구가 다시금 내 앞을 잠시 막아섰다.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보이자 이제야 가던 길 마저 가라고 풀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