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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YO Sep 03. 2023

일본 남자와 연애하기 6

거짓말

 ”나 너한테 털어놓을 말이 있어. “


 한 달 만에 가진 만남, 저녁식사 후 꽤 괜찮았던 분위기. 갑작스럽게 무게를 잡은 말이었다.

 무슨 일이지? 혹시 애가 있다는 말인가? 원래 가족이 있다던가? 혹은 그 외에 아주 복잡한 가정사가 있어서 내게 털어놔야 한다던가? 온갖 극단적인 생각이 죽죽 뻗어 머리를 꽉 채웠다.


 "나 거짓말했어."


 뭐지? 진짜 뭐가 있나? 애가 없다는 거짓말은 아니겠네 있다는 얘기는 안 했으니까. 그럼 무슨 거짓말이지? 우리 사이에 거짓말을 할 정도로 깊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나?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 지 세 달째, 나눴던 모든 대화를 매일 밤 자기 전 되새기며 잠에 들었다. 설레고 풋풋한, 가슴께가 간지러운 별 것 아닌 매일의 대화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났다.


 "무슨 거짓말?"


 꿀꺽.


 "우리 집 근처 공사해서 시끄럽다는 거. 그래서 널 못 부른다는 게 거짓말이었어."

 "뭐야! 왜 이렇게 무게를 잡아 놀라게."


 사실 정말 별 일이 아니어서 김이 팍 샜다. 순간 웃음이 파하학 터졌고, 마르고 단단한 팔을 휙휙 휘둘렀다. 

다만 그 애는 입술을 꾹 물고 흔들던 팔을 잡았다. 조금 슬픈 표정으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진지하게 하나둘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숨기는 게 있었어. 얘기하면 껄끄러워질까 봐, 네가 날 싫어할까 봐 일부러 감췄어. 다 듣고, 내 싫어진다면 싫다고 솔직하게 얘기해 줘. 나도 너 욕심부리지 않을게. 날 싫어해도 돼. 내가 생각해도 진짜 싫을 거 알아. 하지만 내가 양심에 찔려서 못 했던 말이니까, 그래서 다 털어놓고 싶었어."


 그러니까 그 애는 사실 나를 만나기 전,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정확히는 '동거'를 했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헤어진 건 나를 만나기 1년 정도 전.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집에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아이의 짐이 남아있기 때문에 나를 부를 수 없었다고 했다. 그를 숨기기 위해 공사 중이어서 못 부른다는 거짓말을 덮어낸 거고.


 "잠깐만 잠깐만. 애가 있다고?"

 "내 애는 아니야! 못 믿겠으면 서류고 뭐고 다 뗄 수 있어. 그건 확실하게 선 그어서 말할게. 내 애 아니야."

 "그래 니 애 아니면 뭐. 사실 다른 건... 거짓말할 것까지 있나? 싶었지만 정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화 안 나? 나 안 미워?"

 "네가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화가 나고 미울 이유가 없지."


  사실 일본에선 한국에 비해 커플의 동거와 헤어짐은 흔히 있는 일이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함께 살았는데도 작은 이유 탓에 헤어지면서 크게 이사를 하는 이벤트가 영화의 클리셰로 있을 만큼 아주 흔하다. 당시에 다니던 회사에서도 혼전 동거 중인 동기들이 꽤나 많았다. 개인에 따르겠으나, 사실 동거 했다는 사실이 죄가 되진 않는다. 짐을 남기고 간 것도 남기고 간 사람의 잘못이었고, 얘는 그냥 집에 전애인 물건을 치우지도 뭣도 못하는(가지러 오겠다 하고 반년 이상을 방치했다고 했다) 애매한 상태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거로 네가 싫어질 거였으면 첫날 집에 들이지도 않았어."


 사실 질투심이나 불안함이 아주 없었다고 하느냐면 그건 아니었다. 나 말고 다른 여자랑 살아 본 적이 있구나. 그 여자는 뭘 어떻게 했길래 이 애랑 같이 살았을까. 재밌었을까? 즐거웠을까? 부럽다. 질투 난다. 아주아주, 질투가 났다. 불타올랐다.

 하지만 이 질투의 방향은 그 여자지, 그 애가 아니었으니까. 굳이 그 애를 향해 부정적 감정을 배출할 필요가 없었다. 사실은 어쩌면, 아주 콩깍지가 씌어서 괜찮았던 걸 지도 모른다. 얘는 나랑 분명히 뭐가 있을 애니까 내가 다 이겨먹을 수 있다고, 어디서 왔는지 모를 자신감으로 가득했었다. 그래서 부럽지만, 크게 부럽진 않았다. 앞으로 내 추억으로 당신의 기억을 다 덮어버리고 다 털어버릴 거니까.


 "남아있다고 해도 그래도 너희 집에 가고 싶어. 집에 혼자 있을 때마다 힘들었겠다."

 "응."

 "다음엔 내가 너희 집에 갈게. 그 사람 짐이 있건 말건 싫지 않아. 나는 네가 그 공간에서 혼자 견디고 혼자 자꾸 안 좋은 마음을 마주하는 게 싫어. 그러니까 내가 갈게. 응? 가도 될까?"

 "응, 응. 꼭 놀러 와. 집 깨끗하게 치워둘게. 네가 싫지 않게 할게."

 "아니 나 말고. 너 싫지 않게 해야 해. 알겠지?"

 "응."


 그날 그 애는 내 두 손을 꼭 마주 잡고 눈물을 흘렸다. 끅끅 참으며 울다가 어느샌가 눈물을 꾹꾹 눌러 닦으며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울음이 그치고 꼭 안아줬다. 무슨 일이 있었던가에 대해선 그날 밤새도록 하나하나 짚으며 들었다.

 전형적인 가스라이팅 환경에서 살아왔다. 폭력적인 성격의 동거인과의 생활, 어떻게 헤어지게 됐는지, 헤어진 후엔 어떻게 지냈는지 등등. 동거에 대한 질투심보단 이렇게 다정하고 상냥한 애를 그렇게 대했다는 사실이 더 화가 났다. 나는 그래서 그 집을 꼭, 꼭 내 물건으로 가득 채우리라. 집 모든 곳에서, 집구석구석에서 나를 느낄 수 있도록 하리라. 네가 나랑 살고 싶어서 안달 나게 만들어주마.


 연애에 있어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네 집을 온통 나로 채워 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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