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모든 걸 구부려 놓았지만....,,
세월은 모든 걸 구부려 놓는다.
벌써 50여 년 전이다. 1970년에서 80년대까지 섬유산업으로 호황을 누리던 공주 유구. 인구도 그땐 제법 많았고, 돈으로 유세 좀 떠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우스갯소리로 길에 돌아다니는 개들도 입에 만원 짜리 몇 장은 물고 돌아다니던 때라고 한다. 그러나 어디 세월에 변치 않는 것이 있겠는가. 세상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것은 점점 구부려지기 마련이고, 그렇게 수구려지는 것이, 변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다. 한국의 섬유산업은 경제발전과 함께 원재료비와 인건비가 크게 상승했고, 생산단가 싸움에 밀려 중국이나 동남아사아 국가들에게 내어주거나, 그곳으로 이전해서 겨우겨우 명을 해나가는 처지가 되었다.
직기 돌아가는 소리는 이제 몇 곳에서만 간헐적으로 들려올 뿐이다. 직제공장의 벽은 그 화양연화의 시절을 잊지 못하는 듯 벽화로 자릴 잡았고, 화가는 그림 속 노인들의 이마에 잔뜩 세월을 새겨 놓았다. 그림 속 미소를 지은 채 실을 꿰는 할머니의 모습이 아름답기도 하고 맘 한쪽 구석이 허한 서운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사진을 담으러 갈 땐 너무 많은 발품을 팔지 않을 수 있는 이 정도 크기의 마을이 딱 좋다. 아기자기한 마을에서 사람내음을 찾을 수 있고, 너무 외지지 않고, 시장을 끼고 있어 적당한 끼니를 때울 수 있고, 발이 이끄는 대로 서성이다 말솜씨 좋은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을 만나 짧은 대화를 하는 것이 즐겁다. 그들의 일상 대화 속 삶의 지혜와 지난날의 회한을 사랑한다. 난 그런 것에 이끌린다. 사람내음 앞에 사진은 그런 마음을 연결해 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그날도 유구시장에서 김가루 고명이 가볍게 올라앉은 잔치국수 한 그릇을 말아먹고 낯선 사람내음을 찾아 카메라를 둘러메고 이 골목 저 골목을 서성였다. 잘 정비된 큰길보다는 나무 가지 뻗듯 좁았다 넓어졌다 하는 골목길에서 만나는 풍경이 훨씬 정겹게 느껴진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이 자리한 마을 어귀를 돌아설 무렵 마음이 이끌리는 작은 풍경을 만났다. 파란 하늘을 향해 커다랗게 팔을 뻗은 감나무 한 구루가 마당을 내려다보고 있고 아담한 크기의 마당엔 빛바랜 은행잎이 넓게 자릴잡고 있었다. 마당에선 작은 인기척이 들렸고, 적당히 녹이 슨 양철지붕아래 굼뜸 동작으로 조심스레 곶감을 걸고 계신 할머니가 계셨다. 그 풍경에 나도 모르게 발이 먼저 집안으로 들어섰다. 똑똑똑, 조심스레 노크를 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실례합니다. 할머니, 감 농사가 제법 잘 되었네요”
“에구, 작년엔 더 많았어, 올해는 가물어서 그런지 쬐께만 달렸네.. 허허,, 사진 찍는 양반인가? 쭈글 할망탱이 워따 쓰려고 찍는댜”
“아…네, 그냥 이런 자연스런 시골 모습이 너무 좋아해요. 요즘은 보기 힘든 풍경이죠. 할머닌 혼자 사세요?’
“… 쩝… 영감은 몇 해전 뜨고, 이젠 혼자지.” 할머닌 혀끝을 차며 아쉬운 한숨반 섞인 말씀을 하셨다.
“혼자신데, 귀찮게 뭐 그리 곶감을 많이 말리세요?”
“놀면 뭐혀,,,자꾸 움직여야혀,,,여기 두줄은 서울 큰 아이네 것, 한 줄은 대전 둘째 딸네 것이야. 나머진 안양 막내네 것이여. 막내네 손주가 많아 더 줘야지.. 그런데 다들 바빠서 추석에 올랑가 몰건네. 귀여운 강아지 새끼들 보고싶구만”
올지 안 올지도 모를 자식들을 위해 간당간당한 발판에 올라 곶감을 걸고 계신 할머니, 그 뒷모습을 보자니 싱싱한 주황색 감외엔 모든 게 낡고 굽고 휘어 있었다. 굽은 등과 접힌 무릎, 검게 그을린 채 굽어버린 손가락까지 세월은 야속하게도 모든 걸 그렇게 구부려 놓았다. 하지만, 몇 번의 낮과 밤을 보내며 하얗게 분이 오를 곶감과 그 곶감들이 탐스럽게 대나무 바구니에 담길 모습을 생각하니 세월도 구부리지 못한 할머니의 자식을 향한 사랑이 그대로 파인더를 통해 나에게 온전히 전해졌다.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것.. 구부러지지 않는 것은 사랑이구나 싶었다.
국어교과서 속 ‘방망이 깎던 노인’으로 잘 알려진 수필가 윤오영 선생님은 ‘곶감과 수필’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은 표현을 했다.
감이 곧 곶감은 아니다. 그 고운 껍질을 벗겨야 한다….. 그 껍질을 벗겨서 시득시득하게 말려야 한다. 여러 번 손질을 해야 한다. 그러면 속에 있던 당분이 겉으로 나타나 하얀 시설(柹雪*)이 앉는다. 만일 덜 익었거나 상했으면 시설은 앉지 않는다. 시설이 잘 앉은 다음에 혹은 납작하게 혹은 네모지게 혹은 타원형으로 매만져 놓는다. 이것을 곶감을 접는다고 한다. 감은 오래가지 못한다. 곶감이라야 오래간다.
<*시설: 감 시, 눈 설. 감에 하얗게 생겨나는 분가루.>
물론, 수필을 곶감에 비유해 쓴 글이지만, 감은 오래가지 못하고 곶감이 오래가는 이유도 정성과 사랑이 그대로 들어 있기 때문이리라. 곱게 껍질을 벗겨내고 볕 잘 드는 곳에 자식을 생각하며 곶감을 걸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나도 같은 바람을 걸었다. 부디 할머니의 사랑이 그대로 녹아 하얀 시설이 달콤하게 잘 앉기를, 이번 추석엔 할머니의 작은 집에 곶감을 먹는 자식과 손주들의 웃음이 가득하기를 바라보았다.
그 옛날 동화 ‘곶감과 호랑이’에서 곶감을 준다고 하자 아기의 울음이 멈췄던 이유는 무서움이나 달콤한 맛보다 곶감에 녹아있을 할머니의 따스함과 사랑이 전해져서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오늘따라 어린시절 외할머니께서 손가락으로 떼어주시던 햐얀 분이 앉은 까만 곶감이 그리워 진다. 대량생산을 위해 가공된 곶감말고 외할머니의 쭈글한 손끝에 들려 있던 새까만 곶감조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