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철구 May 31. 2023

여행을 마치며

한 달의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유럽에 가면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만 드라마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처음 혼자 떠난 장기 여행이었지만 두렵거나 막막함은 없었다. 숙소를 미리 예약해 둔 데다 한때는 글로벌사업담당으로 100번도 넘는 해외 출장을 다닌 터라 사람 사는 곳이 다 비슷하겠지라는 막연함도 한몫했다.


여행기간 내내 6 GB의 데이터와 애플 디바이스, 구글의 소프트웨어와 함께 했다.

한 달 동안 6 GB의 데이터를 사용하기에 길 찾는 용도의 구글맵, 번역기 파파고, 위급상황의 연락수단인 카카오톡, 일정표와 티켓 등을 담아 둔 원드라이브, 이렇게 4개의 앱을 제외한 모든 앱은 차단했다. 덕분에 휴대폰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졌다. 베니스의 작은 골목길까지 안내하는 구글맵에 감탄했고, 포르투의 한 식당에서 올린 사진이 보름 만에 5,000회가 조회되었다는 피드백을 받고 구글의 영향력과 촘촘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원드라이브가 스스로 사진을 백업하면서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데이터가 유실되고 있었는데 며칠이나 지나서 발견했다.


휴식을 생각한 여행이었지만, 휴양지에서 완전히 퍼질 게 아니라면 여행은 에너지가 많이 드는 일이다. 레이더를 세워 눈과 귀뿐 아니라 오감을 다 쓰고, 단순한 이동에도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고, 작은 선택들도 그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전전두엽 피질을 피곤하게 했지만 덕분에 길게 한 달을 살았다.


전화 한 통으로 일정을 바꾸고 식사나 이동 방법 등은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출장과 비교하면 혼자 하는 여행은 분주하고, 또 불편함과 결핍이 많았다.

소통이 충분하지 못함으로 오는 불편함은 두고라도 뜻대로 되지 않는 상황이 많았다. 파리에서 헤어드라이어가 없는 숙소, 주차장소를 못 찾아 차를 버리고 싶었던 니스, 신호가 약한 와이파이 때문에 호텔 로비에서 검색을 했던 일, 해양버스 노선이 헷갈려 어둑한 골목길을 30분을 걸어서 숙소로 갔던 베니스, 비 속에서 바람에 뒤집어지는 우산을 들고 트렁크를 끌고 걸은 경험까지 더해지니 고생 좀 한 것 같다. 이런 불편함이 싫지 않았다. 이질적인 시간과 경험으로 그동안 편안함에 익숙해진 과거의 나와 단절하고 싶었다.


여러 도시를 다녔기에 그들을 한 가지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빠르고 쉬운 삶에 익숙한 나의 시선으로 본 그들은 조금 느리고 불편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감수하며 산다고 느꼈다.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매 순간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그리고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나 조금 더 자유로워져야지 하는 ‘의지’가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다.


무슨 큰일 한 것도 아니고 혼자 놀고 온 남편인데, 집에 오니 좋아하는 김치찌개와 수육에 빨간 뚜껑 소주까지 준비해 준 아내에게 감사하다.


이제 여행의 청구서가 날아오겠지. 이미 니스에서의 주차 위반 과태료 청구서가 왔다. 카드 결제일이 빠르게 다가온다.



이전 29화 DAY29. 로마단상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