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마지막 날
한 달여간의 여행이 끝나는 날이다. 새벽부터 잠이 깼다.
자정이 넘도록 골목 안쪽 술집에서 들려오는 시끌시끌한 소리를 듣다 잠이 들었는데 어젯밤의 소음은 사라지고 조용한 아침에 작게 새소리가 들린다. 양쪽에 창문을 여니 새벽 공기가 상쾌하다. 노트북과 아이패드만 두고 나머지 짐을 모두 쌌다. 체크아웃 시간과 체크아웃 후에 짐을 맡길 수 있는지 확인하고, 공항에 갈 택시 예약 확인과 픽업장소를 다시 알려주고 나니 떠날 준비를 다 한 것 같다. 호텔 안 골목길이 좁아 넓은 길 쪽을 알려줬는데 호텔 앞으로 오겠단다.
이탈리아에서의 7박 8일은 길게 느껴진다. 피렌체와 베니스를 다녀오는 일정도 빡빡했지만 5곳의 숙소를 옮겨 다녀서 더 그렇게 느껴진 것 같다. 숙소를 옮겨 다닌 덕분에 트레비 분수의 야경과 컴컴한 골목길의 외진 와인바에서 하몽과 와인을 마셨고, 피렌체의 한인 민박집에서 작가를 꿈꾸는 주인님과 대화도 좋았고, 베니스에서의 독특한 게스트하우스도 경험했다. 다시 로마로 와서는 호텔 바로 옆에 있는 한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었고, 마지막 이틀은 나보나 광장의 카페테라스에서 여유로운 밤을 보냈다.
고향의 형에게서 문자가 왔다. 혈당 올라가니 와인은 적당이 마시라고 한다. 와인을 많이 마시긴 한 것 같다. 밥 먹을 땐 국이 없으니 목이 메어 마시고, 저녁엔 숙소에서 홀짝거리고.
11시에 체크아웃을 하고 스페인 광장 근처의 쇼핑 거리로 갔다. 2년 동안 하프밀리언 마일러가 될 정도로 잦은 출장을 다녔지만 집에 선물을 사다 준 적이 거의 없었다. 이번엔 고3인 둘째에게 선물하고 싶어 아내와 상의 끝에 시험 볼 때 필요한 아날로그시계를 사기로 했다. swatch 매장에서 클래식한 걸 좋아하는 녀석의 취향을 고려해 단조로운 디자인에 시계 내부가 살짝 보이는 걸로 샀다. 둘째에게 줄 선물을 사고 나니 드디어 로마를 떠날 준비를 다 한 것 같아 홀가분하다.
점심은 해산물파스타를 먹었다. 파스타는 한동안 안 먹게 될 것이므로 천천히 오래오래 그리고 깨끗하게 먹었다. 파스타를 먹고 커피를 주문하니 아메리카노로 할 건지 묻는다. 아마 대부분의 한국 관광객이 그랬나 보다. 에스프레소라고 하니 엄지 척을 한다. 커피가 제일 먼저 시작된 나라, 물보다 커피가 싼 도시, 알았다는 뜻인지, 그래 커피는 에스프레소라는 건지 모르겠지만.
늦은 점심을 먹고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탔다. 얼굴이 하얗고 후덕하게 생긴 아주머니가 벤츠 밴을 몰고 나타났다. 미리 예약한 덕에 택시보다 10유로 싼 40유로로 갔다. 우버 밴을 부르면 100유로인데, 로마의 작별선물로 괜찮다.
로마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도시 같다.
도시는 고풍스럽기보다는 좀 낡아 보였고 G7국가의 수도라고 하기엔 어수선하고, 도시의 골목길은 천천히 걷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울퉁불퉁한 추레한 골목길에 있는 에르메스나 루이뷔통 매장이 그 낡은 도시와 별로 이질적이지 않게 느껴진다. 고대와 중세와 근현대가 뒤죽박죽이다. 벤츠가 지난 길에 관광객을 태운 마차가 지나간다.
노동절연휴에다 코로나로 미뤄뒀던 수학여행 온 학생들까지 겹쳐 어디고 사람이 많았다. 전 세계에서 물려 든 관광객들의 도시 같다. 누가 관광객이고 누가 로마인인지 구분이 안된다.
지난 한 달 동안 지나온 파리, 리스본, 포르투, 니스, 피렌체, 베니스 등도 많은 관광객이 있었고, 특히 베네치아는 여의도 면적의 두 배 밖에 안 되는 곳에 일 년에 3천만 명의 관광객이 온다고 하니 밀도로 따지면 로마의 관광객은 비할 바가 못된다. 그런데도 그 도시들에서는 혼잡하고 어수선함은 별로 느끼지 않았다. 관광객과 도시가 분리된 것처럼 느꼈던 건 과거 어느 시점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중세품의 도시와 아름다운 풍경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차가 적어서 그렇게 느낀 것 같기도 하다.
다른 도시에서 시민들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사는 게 아닐까 생각했었는데, 좁은 길에 인파를 헤치며 차가 다니는 걸 보며 로마는 그냥 하고 싶은 데로 하고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행의 출발을 로마에서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누군가는 로마를 보고 나면 다른 유럽도시는 시시해 보일 수도 있다고 하던데, ‘Top-down’, ‘Divide & Conquer’ 사고에 익숙한 나는 유럽의 역사와 문화에 큰 영향을 준 이탈리아부터 보고 유럽의 다른 도시들을 여행하는 게 더 나았겠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