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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구 Sep 29. 2023

관악산 순례길

사당-연주대-과천 코스

 

 지인이 2주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간간이 소식을 전한다. 중년 남성들이 회사를 그만두면 단골코스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다. 이력서를 보내놓고 순례길을 걷다 보면 연락이 와 있다는데 나는 순례길을 안 걸어서인지 아직 연락이 없다.


 긴 추석 연휴의 첫날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 산티아고는 아니지만 내가 좋아하는 관악능선길을 걷기로 했다. 오랜만에 산행이라 준비물을 메모해서 식탁 위에 올려 두고 잤다. 스틱, 무릎보호대, 에어팟, 선글라스, 티슈, 팻다운, 막걸리. 막걸리와 팻다운을 같이 준비하는 건 밸런스인가? 모순인가.


 아침에 일어나니 아내가 ”김밥 싸줄까요? “ 묻는다. 김밥 쌀 생각으로 밥을 좀 많이 했단다. “좋죠~“라고 대답하고 보니 김밥 재료가 마땅치가 않다. 시금치와 우엉조림을 어제 다 먹어버렸다. 손이 빨라 ’후다닥 여사‘로 불리는 아내가 당근채를 썰어 볶고 계란을 두툼하게 굽는다. ”세 줄이면 되겠지?“ 나는 냉장고에서 멸치볶음과 김밥햄과 단무지를 챙기며 물었다. 금방 한 밥에 참기름, 깨, 맛소금을 넣어 비벼놓고 아내에게 어디서 김밥을 쌀 건지 물었다. ”내가? “ 라며 슬쩍 내게 김밥 싸기를 미룬다. 그러곤 가끔씩 지침만 하달할 뿐, 김밥은 내가 말고 내가 썰고 내가 담았다. 아내는 직장생활 잘할 스타일이다. 모티베이션을 주고 본인은 입으로만… 당근을 많이 넣는 게 좋겠다, 도시락은 선반 오른쪽 깊은 곳에 있다, 샤인머스켓은 농약으로 자라니 여러 번 씻어야 한다. 등등.


 오늘의 코스는 사당역에서 관악능선을 타고 연주대에 도착해, 과천향교 쪽으로 내려오는 길이다. 내 마음대로 이름 붙인 ‘나와의 대화’ 코스 되겠다.


 집을 나오니 9시, 잠시 망설인다. 사당역까지 한 정거장인데 우면산 자락을 가로질러 걸어서 갈까, 전철을 탈까. 체력을 아끼는 쪽으로 선택했다. 연휴 때문일까 언제나 북새통이던 사당역이 한산하다. 사당역을 나와 남현동 주택가를 지나 관음사 쪽으로 길을 잡는다. 관음사와 국기봉을 지나면 관악능선으로 이어진다. 오른쪽은 서울을, 왼쪽으론 과천을 내려다보여 산을 오르는 내내 확 트이는 전경을 즐기며 걸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선 아차산 능선이 훌륭하지만 내가 특히 이 관악능선길을 좋아하는 데는 몇 개의 에피소드가 있다.


 십여 년 전 회사일로 스트레스가 많았을 때 이명이 생겼다. 이명은 단순히 약물 치료가 어려워 다들 힘들어하는 증상이다. 이명이 처음 생겼을 때 네이버에 검색을 하니 여러 답변 중에 ‘자신과의 대화가 필요해서 몸에서 보내는 신호’라는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그 주말에 나와의 대화를 위해 관악산에 올랐다. 능선길을 걸으며 딱히 어떤 생각을 집중해서 하지는 않았지만 한 참을 산길을 걷다 보니 더 이상 귀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 후부터는 귀에서 소리가 날 때면 산으로 갔다.

 또 한 번은 전략기획팀장으로 발령이 난 다음 날 출근길에 땡땡이를 쳤다. 내가 원하지 않는 인사 발령이어서 전날 술을 꽤 많이 마셨던지라 아침까지 현실감이 없었다. 회사로 가는 셔틀버스가 사당역 올리브영 매장 앞에서 출발하는데 셔틀버스를 기다리다 문득 산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관악능선을 타고 연주대에 올랐다. 27년 직장생활 중 무단결근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래저래 내게 각별한 코스인 관악능선을 따라 연주대에 오른다. 능선길은 연주대에 이르기까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한다. 역사는 능선을 타는 것과 같아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 같지만 끝내는 앞으로 나아간다고 한 <클루지>의 구절이 생각나는 길이다. 단, 목표를 잃지 않았을 때 가능하다. 흐린 건지 스모그처럼 서울의 전경이 뿌옇다.


 긴 연휴가 시작하는 첫날이자, 추석 전날이어서 늘 인산인해였던 등산길이 한산하다. 평소에는 중장년층이 많았던 코스였는데 대부분 고향으로 또는 명절 음식으로 바빠서일까 등산객 중에 젊은 사람들이 많다. 늘 막걸리 향과 왁자지껄한 소리와 라디오나 유튜브를 들으며 걷는 분들 때문에 소음을 ‘견디며’ 걸었는데 오늘은 그런 소음 대신 귀뚜라미 소리와 다양한 새소리가 들린다. 비 온 뒤 산내음을 느낀 적은 있는데 관악산의 소리에 집중해 본 건 처음이다. 산 위쪽으로 오면서 까마귀 소리만 들린다.


 이 코스를 트래킹을 할 때 국기봉 앞에서 첫 갈림길을 만난다. 국기봉으로 바로 오르는 가파른 길이 있고 우회하는 노선이 있다. 이 가파른 길은 날씨가 안 좋으면 진입을 금지시킬 정도로 가파르고 조금 위험하다. 오늘은 이 길이 열려 있어 국기봉으로 바로 오르는 길을 선택했다.

 연주대로 이어지는 길은 대체로 무난하지만 중간중간 가파른 바위를 타는 구간이 있는데 예전엔 줄을 타고 바위를 올랐다면 요즘은 웬만한 곳은 계단이 다 놓여 있다. 국기봉에 이르는 언덕길에는 다행히(?) 아직 계단이 놓여있지 않아 밧줄을 잡고 올랐다. 이런 야생의 느낌이 매력이었는데 요즘은 너무 친절한 계단이 많다. 세금이 많은게지.

 국기봉에선 서울시내가 잘 조망된다. 국기봉에 올라 옆에 있던 젊은이에게 부탁해 국기봉을 잡고 사진 한 장을 찍었다.


 국기봉을 지나 암반 위 긴 계단길을 오르고 나면 - 이 암반도 십여 년 전에는 밧줄을 잡고 기어올랐다 - 전망대가 나온다. 그곳은 사람이 많아 조금 더 지나와 잠시 숨을 고르며 쉬었다.


 이제 에어팟이 역할을 할 차례다. 어떤 음악을 들을까 유튜브에서 선곡을 하는데 유튜브의 로직이 폴란드 소설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등대지기>를 추천한다. 1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를 떠난 실향민 노인이 파나마 운하 근처의 등대지기를 하며 겪는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묘사된 책이다. 자신과 바다와 모래밭이며 구분되지 않는 물아일체의 시간을 보내던 노인이 어느 날 폴란드어로 쓰인 시집 한 권을 받고 정신을 놓고 고향에 진짜로 간듯한 환상에 빠진다. 그리움이 사무쳐 기억 깊은 곳을 끄집어낸 것이리라. 우리 뇌의 작용으로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단편 소설과 음악을 들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관악문에 도착했다. 고인돌 모양의 관악문으로 멀리 연주대가 보여서, 이 문이 경계가 되어 이곳과 저곳이 나뉘는 기분이 드는 곳이다. 관악문 바로 앞은 높지는 않지만 밧줄을 잡고 계단을 오르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여기도 나무 계단이 놓여있다. 나무 계단 틈새로 아래를 보니 이제 소용이 없어진 파랗게 이끼 낀 밧줄이 쓸쓸하게 있다. 등대지기처럼.


 관악문을 지나면 뾰족한 삼각형처럼 생긴 산봉우리의 옆구리를 가로지르고 그다음 가파른 봉우리를 오르면 연주대 절벽이 눈앞을 가로막는다.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오른쪽으로는 서울시내와 왼쪽으로는 과천 대공원이 뿌옇게 내려다 보이는 바위 위에 앉아 도시락을 풀었다. 아들이 초등학교 때 가지고 다니던 도시락이라 양이 작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김밥과 과일을 먹고 나니 배는 그득하고 몸은 묵직, 쌕은 가볍다.


내가 말고, 썰고, 담은 도시락

 

 모든 산은 반드시 깔딱 고개가 있다. 아주 작은 산이라도. 우리 삶에도 깔딱 고개가 있다면 나는 깔딱 고개에 이르기 전일까, 지나온 것 같지는 않고 그 길 가운데 있는 걸까 잠시 생각했다. 삶은 정상을 향해 오르는 여정과는 좀 다르지 않을까 생각하며 이 질문은 금방 날려버렸다.


 연주대 아래 암벽도 이제는 계단이 놓여 조금 헐떡거리긴 했지만 별 어려움 없다. 예전에 느낀 긴장감이 없어 아쉽긴 하다.


 십여 년 전에 이 길을 랜튼 하나만 의지해 밤 12시에 오른 적이 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계단이 많지도 않아 가파른 바위를 밧줄을 잡고 오르는 곳이 곳곳에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했다. 렌튼에 의지해 앞만 보고 한걸음 한걸음 내딛으며 걸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환한 낮에 같은 길을 걷다 보면 연암 박지원선생이 깨우친 ‘명심(冥心)’의 도가 생각난다. 열하일기에 하룻밤에 강을 아홉 번 건넌 대목이 있는데, 우리의 두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깨닫게 해 준다.


 ”낮에는 강물을 볼 수 있으니까 위험을 직접 보며 벌벌 떠느라 그 눈이 근심을 불러온다. 그러니 어찌 귀에 들리는 게 있겠는가. 지금 나는 한밤중에 강을 건너느라 눈으로는 위험한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니 위험은 오로지 듣는 것에만 쏠리고, 그 바람에 귀는 두려워 떨며 근심을 이기지 못한다. 나는 이제야 도道를 알았다. 명심冥心이 있는 사람은 귀와 눈이 마음의 누累가 되지 않고, 귀와 눈만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더욱 섬세해져서 갈수록 병이 된다. “  < 낭송 열하일기 중>


 드디어 연주대에 올랐다. 629미터. 높이를 기억하기 쉽다. 629!  사당역에서 연주대까지 쉼 없이 부지런히 걸으면 두 시간이 채 안 걸리는데 쉬엄쉬엄 걸어온 탓에 2시간 반이 걸렸다. 연주대 위는 바람이 선선하다. 관악산 표시석 옆에서 인증사진을 찍기 위해 대기 줄이 길고 활기차다. 젊은 친구들이 많아서 더 그래 보인다.


 하산길은 과천향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서울대 방향의 계곡이나 서울공대 쪽 능선길이 빠르고 전망이 좋지만 산을 내려오면 바로 캠퍼스와 연결돼 막걸리 한 잔 할 수 있는 주막집이 없어 심심하다. 빨리 산행을 마쳐야 될 때는 서울대 방향으로 내려오지만 대개는 과천향교 쪽으로 내려온다.


 계단길을 조금 내려오면 연주암이 있다. 엄마를 생각하며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아프지 않고 편하게 모셔가 달라고 기도했다. 군입대 후 첫 휴가를 나온 첫째와 수능 49일을 남겨둔 둘째의 얼굴도 떠올리며 잠시 묵상했다. 나 크리스찬 맞아?


 과천으로 내려오는 길은 계곡옆으로 돌계단으로 계속 이어져 있다. 과천에서 연주대로 오르는 길은 다소 지루하고 힘들 수 있다. 대신 내려가는 길은 돌계단을 계속 딛고 내려가야 하니 무릎에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예전에 살짝 뛰듯이 내려가던 코스였지만 지금은 스틱 두 개를 가지고 조심조심 내려왔다. 찬찬히 내려오니 계곡물소리가 더 잘 들린다.


 요 며칠 비로 불어난 계곡의 물소리가 경쾌하다. 계곡은 맑아 푸른빛이 나거나 바위에 부딪쳐 하얀 거품으로 부서진다. 계곡 옆에 걸터앉기 적당한 바위를 발견하고 양말을 벗고 두 발을 담갔다. 9월의 계곡물은 차다. 채 얼마가 지나지 않아 발이 시리고 곧이어 온몸이 서늘해진다.


 과천향교 쪽으로 내려오면 계곡 쪽으로 식당 하나, 왼쪽 산비탈 쪽에 세 개의 식당이 있다. 이 네 곳의 식당에서 잠깐씩 갈등했지만 집 냉장고에 몇 일째 있는 도토리묵과 혹시 추석이라고 했을지 모를 대구전과 동그랑땡에 막걸리 한 잔 할 생각을 하며 그냥 지나쳤다.


 과천역에 도착하니 무릎도 조금 시큰거리고 배도 고프다. 사당역에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방배역에서 내렸다. 1번 출구 옆 마트에서 장수막걸리 2병과 미나리와 오이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막 낮잠을 자려던 아내에게 도토리묵무침을 부탁하고 샤워를 했다.


 아내와 막걸리를 나눠마시며 오늘의 관악산 기행을 마무리한다. 산티아고 길을 걷고 있을 선배는 무엇을 느꼈을까? 관악산 순례길을 마친 나는 막걸리 한 잔 후의 달콤한 노곤함만이 나를 감쌀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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