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어른을 추억하며
선릉 근처 <우가네>에서 콩나물국밥을 먹었다.
원래 이 집은 우면산 아래 남부터미널 근처의 후미진 골목에 있던 동네 맛집이었다. 그 콩나물국밥집이 있던 낡은 건물이 새 빌딩으로 바뀌며 그 집도 같이 없어져 내내 아쉬워하다 장모님께 선릉 어딘가로 옮겨 갔다는 얘길 들었다. 장인어른이 살아계실 때 장인 장모님과 아이들과 함께 자주 가곤 했던지라 어머님도 그 집의 부재를 아쉬워하고 계셨다.
작년 말에 회사를 퇴임하고 그 콩나물국밥집이 생각나 찾기 시작했다.
네이버와 구글을 검색하며 익숙한 비주얼의 콩나물 국밥집을 찾았지만 상호가 달라 긴가민가 하다가 마늘장아찌와 김 통을 보며 이 집을 확신했다. 안내에 있는 전화번호로 몇 번 전화를 했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직 네이버에 정보가 있으니 혹시나 하는 생각에 지도를 보고 그 집을 찾아갔다.
노부부와 아들이 그대로 있었다. 반가움에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우면산 자락에 계실 때 자주 갔습니다." 라고 인사를 건넸다. 물어물어 찾아온 옛 단골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가, "오세문 씨 사위입니다. 장인어른과 자주 갔었습니다." 라고 하자 그제야 나를 알아본 듯 반갑게 맞아주셨다. 장인어른의 안부를 물으시길래 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했더니 노인의 얼굴에 주름이 더 깊어지며 짧지만 슬픈 탄식을 하셨다.
콩나물국밥은 밑반찬이며 맛이 그때 그대로였다. 주말 아침에 가족들과 콩나물국밥에 막걸리 한 잔 나눠마시던 그 시절이 생각나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러다 혹시 장인어르신이 살아계셨다면 늘 자랑스러워하셨던 사위의 갑작스러운 퇴임소식에 뭐라고 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울컥해졌다. 지난 이십여 년의 시간이 아우성치며 달려드는 듯했다. 그 마음이 주체가 되지 않아 주위 사람들 눈치채지 않게 눈물과 콧물을 연신 닦으며 콩나물 국밥을 먹었다.
지금의 나에게 뭐라고 하셨을까? 걱정, 위안, 격려… 아마도 또 별말씀이 없으셨을 것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원에 가겠다고 했을 때, 그것도 2년 동안 기숙사에서 생활하겠다고 했을 때 딸의 고생이 뻔히 예상되지만 그저 묵묵히 지켜봐 주셨던 그 마음처럼 걱정과 응원의 마음으로 보시지 않았을까.
토요일 오후에 처갓집에 가면 아버님은 신문을 보고 계시거나 오래된 작은 철제 책상에 앉아 영어나 일본어 공부를 하고 계셨다. 팔순이 넘은 연세에도 언제나 단정하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셨다. 산을 좋아하셔서 같이 우면산을 자주 다녔다. 또래의 손위처남이 가까이 살았지만 나와 같이 우면산 오솔길을 많이 걸었다. 산길을 걸을 때면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지만 늘 따듯한 마음이 느껴져 그 동행길이 좋았다.
장인 장모님께서 우리 아들 둘을 다 길러주셨다.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TV를 보다가 벌어진 에피소드가 내내 나의 기억 속에 인상 깊게 자리하고 있다. 에너지와 호기심이 넘치는 돌이 갓 지난 아기 원준이가 여기저기 기어 다닐 때였다. 거실에 놓아둔 아기 책상에 의자를 딛고 책상 위에 기어오려려는 원준이를 여러 번 안아서 바닥에 내려놓으며 위험해서 안된다고 알려줬다. 그러기를 몇 번 하던 걸 유심히 보시던 장인어른이 내게 한마디 하셨다. ”하고 싶은데로 내버려 두게. 옆에서 떨어지는 지만 봐주게. “ 그때의 그 말씀이 내게 오랫동안 울림으로 남아 있다. 아마 그 마음으로 우리 두 아들을 돌봐주셨을 것이다.
다행히 아이들도 그런 아버님의 따스함을 느껴며 자라서인지 아버님을 위하는 마음이 각별했다.
둘째는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 나름 예민하고 퉁퉁거렸지만 주말 오전이면 할아버지를 모시고 동네 목욕탕을 빠지지 않고 다녔다. 실상은 아버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목욕을 다니신 거였지만. 언제부턴가 첫째가 목욕탕에 안 가겠다고 했을 때도 둘째는 주말마다 목욕탕을 갔다. 괜찮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때 아이의 답이 자기가 안 가면 할아버지 등에 로션은 누가 발라드리냐고 한 답변이 기특함으로 기억에 남는다.
평생을 선하고 성실하게 살아보신 분, 이 년 전 오월의 어느 날 하늘나라로 가셨다.
꾸준히 자기 관리를 하셨기에 또래 연배분들에 비해 건강하셨는데 몸에 이상을 감지하고 검사를 받았을 때 이미 암의 기운이 너무 많이 퍼져 있었다. 조직검사를 하고 암 판정을 받으시고 한 달여 기간을 투병하시다 돌아가셨다. 육체의 고통과 혼미함 속에 생의 마지막 한 달을 보내시는 걸 안타깝게 지켜보며 과연 신은 있는지 의심했다.
삶이 얼마나 가혹한가. 따스한 마음과 맑은 정신을 가진 분이셨는데 가족들에게 따듯한 말씀 한마디 제대로 못하시고 고통스러워만 하시다가 가셨다. 잠시의 편안함도 허락지 않고 목숨을 거두어 가는 운명의 냉정함을 지켜봤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또 누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묻지 않고 제 갈 길로만 가는 시간, 그 시각에 대한 박경리 씨의 글처럼 그저 의미를 담지 않고 그렇게 가 버리셨다.
“시각은 각일각 태어나고 죽어간다. 그러나 시간은 우리 삶에서의 광활한 느낌이며 한편 편의를 위한 구분인데 그것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진다는 것은 끝없는 문답이 될 것이다. 다만 모든 생명의 삶 자체가 끝없이 오는 것이며 가는 것이라는 사실, 한없이 나타났다가는 사라지는 느낌” - 박경리 님의 토지 서문에서
아버님을 천안의 공원묘지에 봉안하고 돌아오는 길에 푸르른 오월의 붉은 장미처럼 지금 더 사랑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