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을 보다
23년 11월 23일, 목요일
4시 30분, 잠이 깼다.
알람은 6시에 맞춰져 있지만 그 보다 일찍 일어나는 날이 많다. 습관처럼 몇몇 주식시황을 검색하고 TV를 켰다. TV채널을 여기저기 돌려보며 이 많은 PP(Program Provider, 채널)들이 산업의 절벽에서 나 같은 사람 덕에 먹고사나 보다 생각했다.
아침 식사를 했다. 아내는 떡과 두유, 나는 국과 밥. 누나가 보내준 김장 3종세트 - 배추김치, 파김치, 총각김치- 가 아침 입맛을 깨운다.
출근하는 아내와 등교하는 둘째를 배웅한다. 둘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돌아서는 순간에 드는 생각은 “멋쩍음”이다. 어색하고 쑥스럽다. 말 그대로 멋이 적다.
여기저기서 보내주는 뉴스스크랩과 TV뉴스를 본터라 신문은 식탁 앞에 서서 건성건성 헤드라인만 보며 머릿속은 오늘 하루의 일상을 생각한다.
머릿속으로 가늠해 본 시간표를 메모지에 기록한다.
8:00 - 9:30 운동, 골프연습
9:30 - 10:30 기타 연습
10:30 자동차 서비스센터 예약, 송년회 장소 안내
10:30 - 11:00 외출준비
12:00 - 13:00 압구정로데오역, 바버샵
점심 후 강남역 이동 / 이동 후 점심식사?
2:40 - 5:10 강남 CGV, 영화(서울의 봄)
공백시간: 서점? 친구네 병원 방문?
6:30 교대역, 저녁 식사 모임
오늘은 들러야 할 곳이 많아 차를 두고 백수의 기본에 충실하게 BMW(Bus, Metro, Work)를 이용한다.
내일부터 추워진다고 했는데 벌써부터 바람이 차다. 옷을 조금 얇게 입은 걸 후회했지만 다시 들어가기가 귀찮아 그냥 전철역으로 걸었다.
회사 다닐 때는 3주에 한 번씩 머리를 손질했지만 요즘은 6주에 한 번씩 머리를 자른다. 2년 전부터 다니는 바버샵에 갔다. 이발사는 말수가 적다. 나도 그렇지만 2년을 다니면서 별로 대화를 한 적이 없다. 늘 하던 대로 할까를 묻고 나는 그러자고 했다. 아내는 이 헤어스타일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짧은 머리가 인상을 너무 강하게 하는 것 같다고 하는데, 나는 단정함이 좋은 것도 있지만 머리숱이 적어지고 나서부터는 긴 머리가 적은 숱을 더 초라하게 하는 것 같아 짧은 머리를 고수한다. 평소처럼 짧게 머리를 자르고 나오니 겨울바람이 더 춥게 느껴진다.
바버샵 바로 옆에 있는 일본 라멘으로 점심을 먹었다. 라멘과 생맥주의 조합이 좋은데, 병맥주만 있어 잠시 갈등했다. 영화 보다가 졸면 안 되니까 맥주는 생략하고 돈코츠 라멘에 공깃밥을 추가해서 주문했다. 매운맛이 기도로 훅 들어보며 몇 번 사래가 들려 기침을 했다. 나이 먹은 티를 이렇게 낸다.
압구정로데오역에서 분당선을 타고 선릉역에서 2호선을 갈아타고 강남역에 도착했다. 강남역의 개찰구를 통과하면 지하상가가 너무 넓고 번잡해서 마치 낯선 곳에 놓인 아이처럼 한동안 어리둥절하며 어느 쪽 출구인지 찾는데 두리번거리게 된다. 강남 CGV에 도착하니 아직 영화시간까지 한 시간이 남는다. 극장 건물의 지하 1층에 있는 알라딘 중고책방에 들렀다. 제목들을 쭉 훑어보며 책장을 지나는데 항상 화재의 중심에 있는 한 정치인의 반대자가 쓴 비판서적이 눈에 띄어 책장에 기대어 서서 후루룩 읽었다. 우리는 사람을 쉽게 규정하지만 한 인간이 이룬 세계는 얼마나 복잡하고 입체적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방에서 극장과 바로 연결된 엘레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갔다. 뜨거운 아메리카노와 달콤 팝콘을 사서 상영관에 들어가니 아직 광고도 시작하지 않았다.
1212 사태에 대해서는 하도 많이 들어서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는 게 별로 없는 그날의 이야기, 영화를 즐겨보는 편은 아니지만 꼭 봐야겠다 싶었다.
긴 광고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됐다. 도입 부분의 거친 영상이 나를 80년대의 그 시간으로 끌어들이는 듯하다.
1212 사태는 치밀하고 전략적으로 만들어진 쿠데타로 알려져 있지만, 영화로 들여다본 9시간은 긴장감이 넘치는 엎치락뒤치락하던 상황들이 이어져 영화적 상상력과 극적 연출 덕분에 결말을 알고 있음에도 보는 내내 첩보영화를 보는 것처럼 몰입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인간이 가진 탐욕과 욕망, 나약함, 계산과 수용이 고스란히 보인다. 물론 항상 있는 작용에 따른 반작용이 어찌 없을까. 또 다른 한 편의 소명의식, 당위, 경계, 의리 등도 감동적으로 묘사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대부분 그러하듯 감독이 전하고 싶었다는 ‘역사는 중요한 순간 하찮은 사람들의 잘못된 판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안타깝게 목격하게 된다. 몇 번의 ‘반전의 기회‘가 잘못된 판단으로 번번이 무산된다. 잘못된 판단일까? 내가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북한의 침략이라는 더 큰 위험을 피하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하지만, 리스크 회피성향은 조직을 위한 선택이었을까, 개인의 안위를 위한 선택이었을까.
수방사령관 이태신(정우성)이 보여준 “진실과 뚝심“은 가슴 뭉클하게 한다. 장태완수방사령관이 모델로 한 정우성이라는 ‘미남’ 배우를 이 역에 캐스팅 한 건 아주 훌륭한 결정으로 보인다. 안 그랬다면 전두광이 자칫 매력적인 사람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국가가 찬탈되는 순간에 한 명의 군인이라도 끝까지 서울을 지키는 군인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며 군인의 본분에 대해 얘기할 때 눈물이 났고, 반란군에게 제압당한 국방장관에 의해 저항이 무력화되던 이태신의 절망이 안타까워 눈물이 흘렀다.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자리에 남아 있었다. 배경으로 흐르는 군가가 비장하다.
요즘 초한지를 유튜브로 듣고 있는데, 기원전 2,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힘의 논리가 세상을 지배한다. 역사는 오래된 미래라더니.
1212 사태로 권력이 찬탈된 후, 80년 서울의 봄은 끝내 오지 않았다.
그래도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다. 95년 대학졸업을 앞두고 취업준비를 하던 초겨울의 어느 날 전두환이 그의 연희동 집 앞에서 소위 골목성명을 하며 마지막 저항을 했던 게 기억난다.
영화를 보고 화장실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젊은 친구들의 대화가 아찔하다.
“전두광의 매력에 빠졌다. 리더십이 훌륭하다.”
영화로 들여다본 그 9시간 안에 전두광의 행운이 있었다. 그 행운의 이면에는 그의 리더십이 작용했을 것이다. 근데, 얘들아 조폭 두목도 리더십이 있어야 하는 거란다.
영화를 보고 거리로 나오니 이미 해는 뉘엿뉘엿하고 바람이 더 차졌다. 옷깃을 여미고 담배 한 대를 깊이 마셨다.
저녁 모임이 있는데 가기가 싫어졌다. 잠깐의 망설임은 있었지만 약속은 소중한 거니까라며 강남역으로 향했다. 바람은 점점 더 차가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