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나를 고치고 있다 9화

무너지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들

by 공인멘토

1절. 모든 것이 멈춘 날

그날 아침, 알람이 일곱 번쯤 울리고서야

나는 손만 뻗어 소리를 껐다. 일어나지 않았다.

커튼 틈으로 들어온 빛이 바닥에 길게 누웠고,

나는 그 옆에서 아무 생각도, 아무 의지도 꺼진 채 누워 있었다.


몸을 세우려 했지만, 근육이 모래처럼 흩어졌다.

핸드폰 화면에 새 메시지 알림이 떠올랐다 사라졌지만

누구에게도 답하고 싶지 않았다.

통화목록의 이름들을 천천히 훑다가,

다시 전원을 내려놓았다.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입을 열면 울 것 같아서가 아니라,

울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서 조용했다.

차가워진 물컵, 식탁 위에 남은 어제의 빵,

켜져 있던 노트북의 검은 화면—

모든 것이 중간에 멈춘 동작처럼 굳어 있었다.


시간은 흘렀다. 시계 초침은 제 몫을 다했지만

나의 하루는 시작되지 않았다.

문밖의 소음은 멀고, 방 안의 공기는 얕았다.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심장이 뛰긴 하는데, 살고 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연락해야 할 사람들, 처리해야 할 일들,

오늘의 계획표가 머릿속에서 희미하게 떠올랐다가

물에 번진 잉크처럼 스며들어 사라졌다.

나는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욕구가 완전히 꺼져 있었다.


그날은 내가 진짜 멈췄던 날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꺼진 날이었다.

버틴다는 말이 무력하게 느껴졌고,

일어나야 한다는 의무도,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도

아무 데에도 닿지 않았다.

나는 그날, 바닥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처음으로 알았다.

움직이지 않는 것, 아니라 움직일 수 없는 것—

그게 나의 하루였고, 나의 몸이었고, 나였다.


2절. 나의 감정은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그날의 나는, 어떤 말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곁에 와서 “힘내”라고 해도,

그 말은 공기 중에서 증발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위로든, 충고든, 심지어 따뜻한 격려마저도

내 귀에는 닿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인 자기 계발서 몇 권,

책 표지에는 온갖 긍정의 문장이 적혀 있었지만

그 문장들은 내 안에서 하나도 살아 움직이지 않았다.

문장을 읽는 눈은 있었지만,

그 뜻을 받아들일 마음은 닫혀 있었다.


나는 “살기 싫다”는 말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그저 살고 싶다는 마음조차 사라진 상태에 있었다.

죽음을 생각한다기보다,

삶 자체가 내게 의미 없는 배경처럼 멀어져 있었다.


감정은 바닥에 깔린 먼지 같았다.

만져지지도 않고, 쓸어내지도 못하는 채로

그저 쌓여만 갔다.

분노도, 슬픔도, 기쁨도 없었다.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음’**뿐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무너진 상태를

‘눈물과 절망 속에 허우적대는 모습’으로 떠올린다.

하지만 내게 무너짐은 달랐다.

그저 비어 있는 것이었다.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고,

마음을 기울여도 울림이 없는,

텅 빈 방에 홀로 놓인 듯한 느낌.


그날의 나는 아무것도 쥐고 싶지 않았다.

쥔다 한들 흘러내릴 게 뻔했으니까.

그래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세상이 나를 잊어도 괜찮을 것 같은,

그런 무감정의 어둠 속에.


3절. 그전에 나는 얼마나 애써 버티고 있었는가

돌이켜보면, 무너짐은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 직전까지 나는 너무나 열심히,

아니, 너무나 집요하게 괜찮은 척하고 있었다.


출근길에 몸이 무거워도,

“다들 피곤한데 뭐”라며 스스로를 다독였고,

업무에서 실수를 반복해도,

“이번만 잘 넘기면 된다”라며 마음을 억눌렀다.

내 안의 경고음을 들을 수 있었는데도

나는 애써 고개를 돌렸다.


누군가 “괜찮아?”라고 물으면

나는 망설임 없이 “응, 괜찮아”라고 답했다.

그 대답은 진심이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묻지 않게 만드는

방패막이 같은 말이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웃고,

혼자서는 울고 싶지도 않은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는 오래 버티는 걸 잘하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넌 참 강하다”라는 말을 듣는 게

이상하게 자랑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그건 강함이 아니라,

무너질 타이밍을 계속 미룬 결과였음을.


무너질 자리를 허락하지 못했기에

나는 끝내 더 큰 무너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는 버틴 게 아니었다.

이미 무너져 있었는데,

그걸 인정하지 않고 덮어둔 것뿐이었다.


내가 붙잡고 있던 건 삶이 아니라,

“괜찮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강박이었다.

그 강박이 나를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깊은 바닥으로 끌고 내려갔다.


그리고 그 끝에서야 알게 되었다.

나는 강한 게 아니라,

무너질 타이밍을 놓친 사람이었다는 것을.


4절. 무너짐을 허용하지 못한 사회적 강박

내가 무너짐을 두려워한 건, 단지 내 성격 때문이 아니었다.

그건 우리 사회가 오래도록 주입해 온 강박의 결과였다.


“무너지면 실패다.”

“마음은 스스로 다스려야 한다.”

“약해지면 뒤처진다.”


이 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규칙처럼

나와 같은 사람들을 옭아맸다.

누군가 힘들다고 털어놓으면

“그래도 버텨야지”라는 말이 따라왔다.

쓰러졌다고 하면

“다들 힘든데 너만 힘드냐”라는 눈빛이 돌아왔다.


나는 그 시선이 두려웠다.

그래서 무너지는 순간조차 숨겼다.

눈물 대신 무표정을 택했고,

멈춤 대신 더 바쁜 일정을 쑤셔 넣었다.

버티는 게 미덕인 사회에서

나는 무너지지 않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그 버팀의 대가는 너무 컸다.

내 마음은 조금씩 갈라졌고,

몸은 이미 오래전부터 경고음을 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정신력”이라는 허울 좋은 단어 뒤에 숨어 있었다.


정신력이란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스스로를 학대해 왔는가.

고통을 인정하지 못하고,

쉬어야 한다는 신호를 외면하고,

결국 쓰러져야만 비로소 알아차리는 사람들.


나 역시 그들 중 하나였다.

나는 무너짐조차 계획할 수 없었다.

무너짐을 허용하는 순간

모든 걸 잃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였다.

무너지지 못했기에 나는 더 깊이 망가졌다.


이제는 묻고 싶다.

정말 무너지는 게 실패일까?

아니면 무너지지 못하게 만드는 이 사회적 강박이

우리를 더 큰 실패로 몰아넣는 건 아닐까?


5절. 무너지고 나서야, 보인 것들

무너지고 난 뒤,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은 흐렸고, 마음은 비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나는 아주 미세한 것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낯선 손님처럼 하나씩 고개를 내밀었다.

억울함, 외로움, 두려움…

나는 그 감정들을 만나기 싫어 늘 덮어두었지만,

무너져서야 비로소 그들이 내 곁에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무너지지 않았다면, 나는 끝내

내 감정을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을.


멈추었기에 들렸다.

내 안에서 속삭이던 작은 목소리,

“나는 괜찮지 않아”라는 오래된 고백.

그건 실패의 소리가 아니라,

내가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부르는 신호였다.


무너졌다는 건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나를 고칠 수 있는

첫 번째 조건이었다.

나는 바닥에서야 비로소 나를 정직하게 보았다.


그때 알았다.

“무너지고 나서야, 보이는 게 있다.”

그리고 그 보임은

내가 다시 살아가야 할 이유였다.


무너짐은 실패가 아니었다.

그건 내가 억눌러온 감정과 진짜 나를 마주하게 하는

하나의 과정이었다.


오늘의 점검 질문

– 나는 지금, 버티고 있는가? 아니면 이미 무너져 있는가?

– 무너졌던 경험이 있다면, 그 안에서 무엇이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가?

– 무너짐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의 통과의례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바닥은 끝이 아니다.

그곳에서 비로소, 다시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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