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 이야기
필자가 늦깎이로 미국에 이민을 와서 지금껏 하고 있는 일은 보험 영업 매니지먼트다.
그리고 업무의 주요 내용은 2가지다.
팀의 실적이 잘 유지되도록 모니터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고 그다음으로 새로운 인원을 뽑아 훈련해 업무에 투입하는 일이다.
당연히 그동안 이런 업무 과정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을 만났다. 일단 누군가와 약속이 잡혀 정해진 때에 마주 앉게 되면 사람들의 지난 이야기를 듣는 게 순서다. 한참 지나고 나서야 이렇게 사람을 만나 이야기 듣는 일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는 일인 줄 겨우 알게 되었다. 당시는 일에 대한 의욕이 앞서, 가리지 않고 사람을 만났었다.
미국에 이민 와 살면서 자리잡기 전까지는 나는 내가 가장 힘들게 산 줄로만 알았다. 다른 사람들은 나름대로 쉽진 않았겠지만 그럭저럭 꾸려나가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막상 사람들과 대면하여 이야기를 나누면서 꽤 다양한 어려움들을 겪고 있음을 보고 종종 놀라곤 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주로 처지를 한탄하는 내용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지배적인 정서는 억울함이었다. 자신들이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억울하다는 것이다. 하긴 나도 한동안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으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런 사람들 이야기의 끝에는 꼭 무언가 걸려 있었다. 바로 어떤 사람이나 상황 때문에 지금의 처지가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어떤 사람이나 또는 그 일만 아니었으면 자기는 지금 아무런 문제 없이 살고 있을 거라는 이야기였다. 미국 이민 초기, 이민사회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던 나는 이런 말들을 액면 그대로 다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딱한 사람들에게 뭔가 해주고 싶은 마음이 참 많았다.
이즈음의 나는 내가 하던 일을 통해 형편이 어려운 이민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그런 뿌듯함이 있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먼저 챙기려 했다. 어떻게 해서든 나와 형편이 비슷한 이들에게 괜찮은 경력을 쌓게 해 자리를 잡는 모습이 보고도 싶었다. 다행히 우리가 하는 일은 그에 대한 보상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이어서 조금만 열심히 한다면 자립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 일에 들어선 지 20년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지난 과정을 돌아보니 참으로 많은 느낌이 교차한다. 보상이 나쁘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나중에 제대로 자리를 잡은 사람은 아주 드물었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우선하여 일자리를 제공했지만, 실패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에게는 제대로 성공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주어진 어려움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난 후의 희열에 대해 일체 모르고 있었다. 그들이 익숙한 건 오로지 ‘안 되는 이유’를 찾는 일이었다. 주위 환경이 제대로 돌아가 주지 않아 자신들은 성공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가면서 항상 억울해했다. 주위에는 분명히 멘토로 삼아 따라 배울 만한 훌륭한 도움들이 있었음에도 그들은 피해 다녔다. 정말 10가지의 여건이 좋아도 한 가지가 마음에 안 들면 그게 끝이었다.
어떻게든 일할 수 없는 이유를 찾아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려 했고 그로써 포기해버리곤 했다. 그렇게 떠난 이들은 여전히 억울해했다. 정신력의 문제였다. 지금까지도 이때 떠난 몇몇 사람의 이야기가 가끔 들린다. 그렇게 포기한 이들은 십 수년이 지났건만 지금껏 사는 형편은 별로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아마도 여전히 자신은 억울하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잡초를 뽑고 뒤돌아서면 금방 다른 풀이 올라온다.
며칠만 지나도 쑥쑥 밀 고 올라오는 그들을 지켜보면 그들의 생명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 잡초들도 한 번에 모두 싹을 틔우지 않고 순서대로 나오는, 그들 나름의 규칙이 있다고 한다.
일본의 식물학자 이나가키 히데히로는 일반 화초가 아닌, 잡초를 농업시험장에서 연구하면서 그들의 생태에 관해 『풀들의 전략』이란 책을 썼다. 그는 아무리 발아하기가 좋아도 잡초들은 한꺼번에 모두 싹을 틔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만약 그렇게 했다가 재해라도 나면 그 잡초 집단이 몽땅 다 죽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사태로부터 잡초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발아 시기를 늘려가면서까지 위험 분산을 도모한다고 한다. 세상에 마치 아무것도 아닌 듯한 존재처럼 여겨지는 잡초들에도 이렇게 ‘치밀하게 계산된 생존전략’이 있다는 말이다.
이로써 그들에게 아무리 강한 약을 뿌리거나 불로 태워도, 아니면 뿌리째 뽑아내더라도 절대로 잡초를 없애지 못하는 이유가 설명되는 것만 같다. 그뿐 아니라 이나가키에 의하면 키가 작은 풀들은 큰 풀들과 같이 있으면 광합성에 불리하므로 차라리 사람이 많이 걸어 다니는 길에 집단으로 뭉쳐있는 게 더 나은 생존전략이라고 한다.
그들은 다른 멋진 화초들처럼 고고하게 잎을 세우지도 않고 길옆에 아무렇게나 바닥에 누워 밟혀도 죽지 않도록 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한다고 했다. 특히 우리가 어릴 때부터 많이 봐왔던 잡초인 질경이는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풀로 종종 비유된다. 사람들은 들길이나 들판을 거닐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질경이를 밟고 다니곤 한다.
만약 질경이가 그런 데서 밟혀가면서까지 살지 않았다면 이미 다른 식물들이 질경이들의 자리를 차지했을 거라는 말이다.
질경이는 밟히는 데는 강하지만, 다른 식물과 싸워야 하는 생존 경쟁에는 약하다. 그러므로 질경이가 (밟혀가며 살지 않는다면) 도리어 다른 식물들에 (자리를 뺏기고) 쫓겨나야 하는 아이러니한 결과가 빚어지게 된다.
(이나가키 히데히로)
잡초 이야기를 읽으면 바쿠후 시대에 살던 일본의 평민과 천민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들은 사무라이 계급이 다스리던 시대에 그야말로 잡초처럼 살아갔던 사람들이다. '대망'과 같은 역사물에 묘사된, 무사 계급이 아닌 일반 천인들의 삶은 정확하게 잡초와 같았다.
어떤 경우에도 그들은 말대꾸조차 할 수 없으면서도 자기들의 상전을 끝까지 받들며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해갔다. 이들처럼 정말 어렵고 억울한 사람들이 없겠다는 생각을 참 많이 하면서 책을 읽던 기억이 떠오른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 그런 삶은 없다. 가끔 누가 나를 힘들게 할지는 몰라도 우리 스스로 얼마든지 자신만을 위해 살 수가 있는 때다.
우리가 지금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들은 모두 스스로 인식하여 받아들였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누가 우리에게 억지로 강요한 것은 없다. 그렇지만 어떻게 보면 우리는 잡초들만큼의 생존 전략도 갖고 있지 못한 것 같다. 결국 살아내야 할 주체는 우리 스스로인데도 남한테 핑계를 미룬다. 그리고는 결국 잡초보다도 못한 삶을 산다.
생존은 가장 숭고한 주제다. 특히 우리처럼 빈손으로 남의 땅에 살려온 모든 이민자는 반드시 마스터해야 할 주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