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리즘으로 부터 벗어나기
북극 지방의 툰드라 지역에 사는 에스키모들이 모피를 얻기 위해 하는 늑대 사냥법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먹이가 부족한 계절인 겨울에 동물의 피를 묻힌 칼을 얼려 얼음이나 눈에 거꾸로 꽂아 숨겨놓으면 한참 배고픈 늑대는 그 냄새를 맡고 달려와 칼을 핥는다.
처음에는 칼날에 묻은 피만 핥지만 추운 날씨로 인해 칼날의 금속에 닿은 혀는 마비되어 칼날을 핥게 되고 결국은 늑대의 자신의 혀가 베이면서 피를 흘리게 된다. 그러나 늑대는 미처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처음 핥았던 동물의 피라고 착각해 계속 핥다가 마지막에는 과다 출혈로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사냥법이다.
매너리즘은 사람이 별다른 생각 없이 살도록 만든다. 그로 인해 어떤 독 창성이나 창의력을 기대할 수가 없다. 처음에 진취적이었던 행보는 어느새 안이한 환경에 익숙해지면서 그냥 안주해버리는 것이다. 문제는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이 스스로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다는 데에 함정이 있다.
만약 어떤 문제에 빠진 사람 자신이 어려움에 빠진 것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벗어나고자 노력을 하겠지만,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어떤 길을 가는지에 대한 인식이 어려우므로 더 심각하다. 마치 위에서 이야기한, 죽을 지도 모르고 자신의 피를 핥는 늑대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필자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입사했던 회사는 신규 공장을 세우고 그와 함께 새로운 제품 브랜드를 생산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프로젝트를 위한 엔지니어로 입사한 나는 처음부터 많은 준비와 시험 운전, 공정 안정화에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즈음은 막 결혼한 나는 신혼이었지만 제대로 퇴근 시간을 지켜 집에 들어간 적이 없을 정도로 일이 많았다. 심지어 12시간씩 맞교대로 하는 작업에도 투입되어 한동안 공정을 지켜봐야 했었다.
그러나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그렇게 바빴던 공정도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특히 전 공정의 작업표준이 완성되고 안정적인 규격을 가진 제품이 생산되면서부터 눈에 띄게 업무가 한산해졌다. 아침에 출근해서 지난밤 공정 이상 유무를 체크하고, 낮 동안 몇 번 생산 현장을 둘러보는 것 외에는 크게 일이 없었다. 더욱이 현장에는 이미 오랜 경력이 있는 사원들이 투입되어 있어 그야말로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원래도 그런 무료함을 잘 견디는 타입이 아니다. 물론 처음에는 관계 문헌이나 특허도 뒤지면서 공부도 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비로소 생산 현장의 관리체계에 대해 눈을 뜨게 된 셈이다. 공정만 안정되면 간부들은 할 일이 크게 없었다. 잡담이나 하면서 소일하는 시간이 많았다. 그야말로 매너리즘의 극치였다.
물론 간혹 터지는 비상사태에는 전력을 다해 대처했지만, 자동화된 공정은 그런 일도 잦은 편이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처음 몇 년을 현장부서에서 근무하면서 나는 승진까지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쯤의 나는 정말 심각하게 뭔가 나를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걸 느끼게 되었다.
현장 업무에는 손이 많이 갈 것이 없었기 때문에 여가 시간의 나를 위한 특별한 프로젝트가 필요했다. 단순 업무만 계속하다 보니까 머리도 마찬가지로 단순해져 어쩌다 책을 한 권 읽어도 이해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내 스스로에게 어떤 변화 라도 주지 않는다면 그냥 머리가 석화될 것 같다는 두려움마저 일었다.
마침 그 무렵, 정부에서 부동산 시장의 안정화를 위한 공인중개사 시험의 도입을 발표하고 있었다. 학교 재학 시절, 변리사 시험을 준비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공인중개사와 같은 자격증에 대한 미련도 남아 있어 도 전을 한번 해보기로 생각했다.
이공계 출신으로 독학으로 많은 법을 새로이 공부해야 하는 어려움이 없지는 않았지만 결국 작정하고 오랜만에 면학 분위기로 돌아가 무난히 공인 중개사 제1회 시험을 통과할 수가 있었다. 사실상 막상 합격은 했어도 이미 일하고 있는 직장이 있는 관계로 그 자격증을 따로 쓸 일은 없었다. 그렇지만 두뇌를 온전히 순환시킨 듯한 효과는 충분히 있었다.
그렇게 공인중개사 자격증의 취득을 따고 나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지극히 평범한 나날이 또 다시 반복되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다른 점이 큰게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어떤 하나의 도전을 이미 해내었다는 성취감이었다. 그리고 다시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기 위한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그 생각은 나를 대학원으로 진학하도록 하는 길로 안내했다. 설사 대학원 입학시험에 합격한다 해도 일하면서 학업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아직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그러나 일단 일을 저질러 보기로 했다. 우선 할 수 있는 것 부터 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 지역에 자리잡은 충남대학교 화공과 대학원 과정을 마음에 두고 학교를 방문해 시험 자료를 수집했다. 학교로부터도 시험에 필요한 도움도 받을 수 있어 필요한 시험 공부에 들어갔다. 약 5년 만에 다시 학교 시험을 준비하는 것 이어서 공부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 달간의 공부를 하며 준비해 이번에도 무사히 대학원 입시에 무난하게 통과하게 되었다.
이제 대학원 시험을 패스하고 나서의 진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막상 시험에 합격은 했지만 과연 어떻게 학교에 다닐 수 있을 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직장인으로서 매일 출근해야 하는 관계로 학교에 다닐 시간을 빼낼 수가 없었다. 단지 회사의 처분을 바랄 수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장장님의 배려로 주중에 하루 학교에 나가 수업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을 특별히 허락받게 되었다. 사실상 이런 일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직장에서 다른 직원들과의 형평성도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 또 한편 생각해 보면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후에 같은 직원들로 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은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변화에 대한 도전이었다. 나라도 만약 나의 부하 직원이 그런 도전을 하려 한다면 기꺼이 도와주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나의 도전은 나중에 나비효과처럼 일이 계속 이어지게 된다. 3년 만에 마친 대학원의 학위로 인해 미국의 세계적인 회사의 오퍼를 받아 매니저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또 그 일은 우리 가족으로 하려금 해외로 이주까지 하게 하었다.
그때로 부터 25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넘어, 지금 가진 나의 경력은 모두 이런 도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냥 안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지금의 내 자리로 데려다 놓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정체시키고 있는 습관을 기꺼이 벗어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 그냥 편안함을 택했더라면 아마 지금쯤 첫 회사에서 정년퇴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운이 좋았다면...
불어로 ‘joie de vivre’라는 표현은 ‘삶의 기쁨’이란 뜻이다. 살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놀라운 일이라는 의미다. 생명은 존재만으로도 그 가치와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일상에서 느끼고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지 모른다.
매너리즘때문에 이런 즐거움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억지로라도 익숙한 것을 내려 놓아야 할 것이다. 새로운 방식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안락한 것에만 머문다면 과연 진정한 즐거움이 있을까.
작은 변화를 시도할 때 나타나는 나비효과는 분명히 크나큰 삶의 기쁨으로 돌아올 것이다.
사진 출처: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