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오늘은 너무 물이 찹다.
수많은 사람들이 망설였을 다리 난간에서 주저하는 내 몸뚱아리를 다시금 안쪽으로 집어넣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여의도에서 마포로 걸어가는 수천 명의 사람 중 하나인 척 행동을 했지만, 콘크리트 바닥이 아닌 다른 곳에 착지할거라 생각한 가슴은 그러지 않았나보다. 한껏 올라간 심박수에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몸을 움직여야 했다. 보폭이 점점 넓어진다. 걷는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걷기는 이내 달리기가 된다.
콘크리트가 아닌 흙바닥이 보일 때에야 심장을 재촉했던 것은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오랜 시간 달리기를 하지 않은 몸은 숨을 들이시고 내쉴 때마다 기도에 온갖 장애물이 껴있는 양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며 증명한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숨이 아직 붙어있다. 허리를 굽힌 채 눈 앞의 신호가 몇 번이나 바뀌었을까, 겨우 몸은 제 호흡을 되찾는다. 뜨겁게 등허리를 적신 땀이 옷을 흠뻑 적시고는 마르면서, 몸이 점점 서늘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한바탕 의도치 않은 운동을 마치고 나니, 정신이 조금 개운해지는 기분이 든다. 방금 전까지 난간에서 망설이던 것 외에는 선택할 수 없던 몸은, 스스로를 뜨겁게 데워내 저 멀리에서부터 나를 이렇게 데려왔다. 이것 이상의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죽지 못해 사는 날들은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언젠가는 죽겠지만, 살지 못해 죽을 것이다. 다시금 가자, 해야 할 일을 하러-
그래, 오늘은 너무 물이 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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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유튜브의 망령이 되어 알고리즘을 떠돌다, 흥미로운 영상을 봤는데, 카뮈의 부조리 철학과 존 윅을 연관지은 내용이었다. 존 윅을 보면서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가 그저 말이 안 되는 설정 하나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의 철학적 이유를 탐구하던 영상이었는데, 공감가는 부분이 많아서 오늘도 yes24 장바구니에 책 한 권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조만간 ‘이걸 내가 왜 장바구니에 담았지’를 시전할 예정이다.
삶을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은 지난 시간동안 꾸준히, 쉴 새 없이 던져온 것이지만, 그것에 대한 대답은 매번 달랐다. 어느 때의 나는 죽지 못해 살고 있었고, 어느 때의 나는 살고 싶은 이유가 있기에 살고 있었고, 또 어느 때의 나는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기에 살고 있었다. 어째 가운데 것 말고는 죄다 불행한 기분이 들지만 기분 탓이다. 하지만 사유가 어찌 되었건, 결론은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이없는 이유로 말미암아 생을 마감하더라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나는 그 때까지는 최선을 다해 살아남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