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세상은 3차원이 맞나요?
우리는 컵을 보고 생각합니다. 아, 저 안에 물이 담길 공간이 있겠구나. 아, 저 부분이 손잡이겠구나. 하지만 단지 ‘보는 것’만으로 그걸 판단할 수 있는 걸까요? 물론 그림자나 빛의 반사 따위로 우리가 나름의 입체를 판단할 수는 있을 겁니다. 하지만 컵을 온전히 활용한다는 것은 과연 시각이라는 감각만으로 얻어진 걸까요?
여러분은 기억도 안 나는 어린 때에 수도 없이 컵을 만지고 깨물었을 겁니다. 시각이라는 2차원에 갖가지 감각적 경험을 덕지덕지 붙여가면서요. 그리고 깨닫게 되는 겁니다. 저것은 손잡이라고. 저것은 잡기 위한 용도라고. 이 안에는 액체를 담아 마실 수 있다고. 그렇게 시각의 2차원은 비로소 3차원으로 완성되는 거지요.
하지만 가끔 보면, 아무 경험 없는 2차원의 피사체에도 우리는 똑같은 짓을 하고는 합니다. 잘 읽지도 않은 책을 대충 보고 읽어본 척.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대충 보고 아는 척. 자기가 흘깃 본 평면이 입체인 것처럼, 그것이 옳은 것처럼. 시간과 노력으로 쌓아진 감각적 경험이 아닌, 고정관념과 편견으로 우리는 2차원의 피사체를 3차원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물론, 고정관념과 편견이 나쁘다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독버섯을 먹고 나서야 위험함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독버섯을 먹지 않고서도 살아남게끔 만드는 것이 바로 고정관념과 편견입니다. 생존에 있어서는 필수적인 본능이란 말이죠.
그래도 오늘날의 인간관계는 생존만을 목표로 하는 것만은 아니잖아요? 그럼에도 우리는 사람의 단면을 너무나도 쉽게 입체로 만든다는 생각이, 가끔은 드는 것 같습니다. 조금은 입체를 파악하기 위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주고 나서, 3차원의 상대방을 마주하는 것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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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그래, 김 조교. 뭐? 석사 논문 주제가 너무 어려워서 바꾸고 싶다고? 거 봐라. 너 내가 그럴 줄 알았다. 내가 너 그거 못 할거라고 했냐, 안 했냐? 꼭 불에 데여봐야 뜨거운지 알지?
비교적 최근에 썼던 글. 예전에 위의 글과 같은 제목, 같은 주제로 글을 썼던 적이 있었다. 그 때에는 친구에게 말하는 상황을 가정한 문체로 글을 썼는데, 내가 생각한 바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약간 아쉬웠다. 1, 2, 3, 4, 5 순서대로 내용을 풀어가야 읽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글이 되는데, 그 글은 중간의 2, 3, 4를 내 머릿속에 담아둔 채 1, 5만 독자에게 냅다 던져준 글이었다.
마침 요새 생각나는 글감이 예전에 내가 썼던 그 글과 거의 유사한 주제였기에, 그 때 그 글의 상황을 약간 다듬었다. 이전에 썼던 <유사심리학개론>에서 교수자가 학생에게 말하는 상황으로. 꼰대스러움에서 탈피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 스스로 꼰대임을 증명하고 마는 그 상황으로. 요새 점점 꼰대스러운 말들에 고개를 나도 모르게 끄덕이게 되는 일들이 많아져서 흠칫하는 중이다. 아니, 이미 임계치를 넘었을지도 모르겠다. 만약 위 글의 마지막 문단을 보고 꼰대 말투가 자동 재생 된다면, 당신도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