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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물없는 건물주 Nov 28. 2022

퇴근할 때 일을 주는 심리

#탈출 일지 2화

6시 10분 전, 당신은 슬슬 이곳을 탈출하려는 시도를 한다. 정시퇴근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인 줄 알지만, 나는 입사한 지 고작 한 달 여 밖에 안 된 신입이라는 위안을 스스로 되뇐다. 5분 전, 주변 정리를 시작해 보자. 문득 하루 종일 발견 못 한 미세먼지가 책상을 더럽히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열심히 그러나 조용히 닦는 것이다. 그리고 3분 전, 시계와 컴퓨터를 바삐 번갈아 보기를 반복한다. 1분이 마치 480초는 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시간은 흐른다. 이때가 가장 초조하다. 드디어 정각! 어디선가 종소리가 울리며 하루를 끝마치는 알림을 보내는 것 같다.

그리고 바로 그때 당신의 상사가 당신을 부른다.


‘이거 오늘 하고 퇴근하세요.’ 당신의 상사가 명령어를 입력한다.

우선 상사의 정수리를 마치 한 마리의 사냥감을 노리는 매 마냥 노려본다. 도대체 회사 홈페이지만 뚫어져라 바라봤던 그 숱한 시간 동안에는 뭘 하다가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자신을 부르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분명 자신에 대한 음모가 있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짧은 시간 충분히 상사의 뒤통수를 노려 보았으니, 이제 답변을 줄 차례이다. 당신은 그동안 모아 온 데이터로 최선을 다 해 내일 하겠다는 말을 직장인 번역기로 돌려본다. 온 우주의 기운을 끌어 모아 예의와 확신에 찬 거절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막 출시된 그 번역기는 단 몇 초간의 생각 끝에 단호하게 대답한다.

 ‘엡! 알겠습니다!’

안타깝지만 오래 생각을 해 봤자 답이 없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당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자리로 돌아온 당신은 지체되는 시간을 보며 지금까지 발휘하지 않았던 초인적인 힘으로 열심히 머리를 굴려본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온 사무실에 들리는 것 같다. 정작 실제로 들려오는 건 옆 부서 사람들이 퇴근하는 소리이다.


있는 힘 껏 마스크 밑으로 음소거 욕설을 날리고 한껏 텅 빈 눈알로 모니터를 이리저리 훑는다. 코로나 시대의 최대 장점은 묵음으로 빠큐를 날릴 수 있다는 점이다. 어느덧 1시간이 넘어가고 당신은 짜증 낼 힘조차 잃는다. 1시간이면 양호하다는 생각까지 들기 시작한다.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명령어를 입력시킨 상사는 아직도 퇴근을 하지 않고 있다. 결괏값을 기다리는 것인가? 바득바득 이를 갈며 완성한 무언가를 보여주면 그저 그런 표정을 짓다 내일 마무리하자는 답변을 내놓는다. 집에 가도 좋다는 허락이 드디어 떨어진 것이다.


신입은 이제 막 출시 준비가 된 AI와 같다. 어느 질문이 어느 곳에서부터 들어올지 모르지만 항상 대답할 준비는 되어 있다. 물론 그 대답이 완벽한 답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잘 못 들었어요.” “그런 말은 나빠요!”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따위의 대답을 1순위로 준비하고 있을뿐이다. 하지만 그 마저도 대답할 미세 먼지 같은 용기도 없는 당신은, 마침내 에? 모르겠는데요? 하고 마는 것이다.



(사진은 제 프로필이기도 한 고사리 파스타입니다. 야근 후 먹었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물론, 제 사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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