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법이 아니라, 보는 법

여행의 기술_알랭 드 보통

by 서수정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며 문득 멈칫했다.
내가 정말 좋아했던 것은 장소였을까, 아니면 그곳에 있을 나의 모습이었을까.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은 여행을 권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여행을 해체하는 책에 가깝다. 그는 묻는다. 왜 우리는 떠나고 싶어 지는가. 그리고 왜 떠났음에도 만족하지 못하는가.

그는 말한다. 여행은 출발하는 순간이 아니라, 기대가 시작되는 순간 이미 시작된다고.
이 문장을 읽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비행기 표를 끊기 전부터 우리는 이미 여행 중이다. 지도 위를 손가락으로 더듬고, 블로그의 사진을 넘기며, 그 풍경 속에 서 있을 나를 상상한다. 사실 우리는 장소보다 ‘그곳에 있을 나’를 먼저 꿈꾼다.
그래서 여행은 종종 실망을 동반한다.
현실은 상상만큼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날씨는 흐리고, 길은 복잡하며, 사람은 많다. 그러나 이 책은 실망을 비판하지 않는다. 대신 시선을 돌린다.
문제는 장소가 아니라, 보는 방식에 있다고.

특히 마음에 남은 대목은 러스킨에 관한 부분이었다.
그는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가 감성의 결핍이 아니라, 관찰의 결핍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데생을 하라고 권한다.

스케치를 하려면 오래 바라보아야 한다.
빛이 어디에서 들어오는지, 그림자가 어떻게 눕는지, 돌의 표면에 어떤 결이 있는지 세밀하게 따라가야 한다.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풍경을 소비하지 않는다. 그 안에 머문다.
나는 여행지에서 풍경을 스케치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연필을 들고 한 줄 한 줄 선을 긋는 시간.
그건 낭만이라기보다 집중의 시간일 것이다.
사진은 순간을 포획하지만, 스케치는 시간을 통과한다. 아마 여행의 기술은 더 멀리 가는 법이 아니라, 더 오래 머무는 법일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장은 ‘자신의 방을 여행하라’는 제안이었다.
처음에는 약간의 아이러니처럼 들렸다. 그러나 곧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낯선 장소에서는 세심해지지만, 익숙한 공간에서는 무심해진다. 매일 보는 창가의 빛, 벽의 미묘한 균열, 책장 위 먼지의 결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바라보았는가.
공간은 변하지 않았는데, 우리의 시선이 변해버린 것은 아닐까.

나는 공간을 다루는 사람이다.
공간이 인간의 감정과 생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해 왔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다. 공간은 단순히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기대와 상상이 덧씌워진 심리적 장면이라는 것을.
우리는 장소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않는다.
그곳에 도달하기 전 이미 만들어놓은 이미지와 함께 도착한다.
그래서 여행은 도피가 되지 못한다.
어디로 가든 우리는 결국 자신을 데리고 가기 때문이다.

이 책은 화려하지 않다.
오히려 조용하다. 그러나 그 조용함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나는 정말 풍경을 본 적이 있었는가. 아니면 늘 스쳐 지나가기만 했는가.
여행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라는 말이 점점 선명해진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보는 방식이 달라지면 그곳은 낯선 공간이 된다.
반대로 아무리 먼 나라로 가도 시선이 바뀌지 않으면 그곳은 또 하나의 일상일 뿐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우리가 바꾸고 싶었던 것은 풍경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여행의 기술』은 여행지를 안내하는 책이 아니다.
그것은 보는 법을 다시 배우게 하는 책이다. 그리고 보는 법을 바꾸는 순간, 우리가 사는 세계 역시 달라진다.
오늘 나는 창가에 서서 오후의 빛을 잠시 바라본다.
어쩌면 여행은 이미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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