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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Aug 27. 2024

시어머니는 자식이 일곱이지만 미혼이다

들어가며

결혼과 동시에 30여 년 넘게 한 집에서 복닥이며 살았다. 하지만 치매가 오고 거동이 어려워지면서 요양원에 다. 그 시어머니와의  번째 동행에 대하여 글을 써오고 있다. 요양원에 가신지 7년이 되어가는 지금, 이 글을 쓰기 시작한 지도 벌써 해가 바뀌었다. 이 글이 언제 끝이 날지도 언제 발행이 될지는 아직은 모르겠다. 언젠가는 발행될지도 모를 글들, "호적에 없는 시어머니와의 동행" 제목 그대로 등본을 발급받아보면 동거인으로 되어 있다, 호적 어디에서도 어머니 존함 석자를 찾아볼 수 없다. 분명 7남매를 모두 당신 배 아파 낳으셨다. 물론 오래전에 먼저 가신 시아버를 가시는 날까지 지극정성으로 보살피신 분도 어머니시다.


그럼에도 시아버님 옆자리에 단 한 줄도 못 올리신 채 미혼으로 평생을 살다 가셔야 한다.  한 줄이 뭐 대수냐 할 수도 있겠지만 법이 존재하는 이 나라에서는 그 어느 것 보다도 중요하다. , 그러셨을까. 한집의 가장으로 군림하시며 본처에 대한 지조였을지, 호적에 손대는 것이 용서가 되지 않아서, 아님 무지해서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런 뵌 적도 없는 시아버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미워했다. 그럼에도 나만 며느리에 손자, 손녀에 호사를 누린다며 그리워하시던 시어머니를 뵐 때면 부아가 치밀곤 했었다. 마지막까지 당신의 긴 병시중을 마다하지 않은 아내를 부정한 것 같이서. 그런 아내의 자리를 찾아주지 않은 시아버지가 원망스러워서.




세상에 태어났지만 7남매라는 자식을 낳았건만 어디에도 없는 당신의 존재. 누구나 있어야 할 주민등록증이 없었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이 꽤 있었는지 신고기간을 이용하여 만들어 드리기로 했다. 40여 년 전 구청 근처에 가면 대서소가 있었다. 그곳에 가서 서류를 부탁하고 절차 중에 경찰서에 호출을 받았다. 확인과정이 필요하다며 넌지시 압박이 들어왔다. 몇 번을 들락이며 같은 말을 반복하다 결국 봉투를 주고서야 주민등록증을 받아냈다. 그 시절엔 그런 일들이 일부 있었다.


주민등록증을 만들었다 해서 호적에 마음대로 올릴 수는 없다. 그때까지도 본처와 딸이 생존해 있었으니 불가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자식들의 어머니 자리라도 찾아드리고 싶었지만 법이라는 벽은 높기만 했다. 자식들이 모두 시아버지의 성씨를 포기해야만 가능했다. 별수 없이 미혼인 채 동거인으로 가시는 날까지 사실수밖에 없다. 그 시절 노래마다 여자의 일생을 왜 그리 애달프게 표현했었는지 이해가 갔다. 당신 인생을 위해 어린 자식을 남겨두고 부유했던 집의 두 번째로 들어오신 시어머니. 달가워하시지 않았던 시어머니의 온갖 시집살이를 견디면서도 배곯지 않는 길을 선택하셨던 시어머니.


그 누가 비난할 수 있으랴. 본처는 딸 하나를 낳고 시어머니의 박에 걸핏하면 정으로 내빼서 오지 않았고, 몇이 거쳐갔을지도 모를 그 자리에 어머니께서 들어와 내리 딸 둘을 낳았다. 아들을 낳지 못한 대가는 혹독했다. 산모의 방에 쌀뜨물 한대야를 쏟아부었다. 별수 없이 일어나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아들 딸 모두 일곱을 낳으신 것이다. 그리 맵디 매운 시집살이를 하셨지만 그분들이 가시는 날까지 극진히 모시고 살펴드린 분은 시어머니셨다.




결혼을 하고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 호적등본을 발급받았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시어머니 존함이 아니었다. 그때의 충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이미 결혼식을 했으니 그 집 귀신이 되어야 했다. 그것이 오직 친정부모님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는 길이었다. 이미 하늘나라에 가셨지만 아직도 이 딸의 그 아픔은 모른 채 가셨다. 지금에 와 왜 눈물이 나는 걸까. 시집가는 딸 앞에서 그러셨다. 복잡한 집안만 아니면 괜찮을 거라고. 그런 분들께 차마 이 집안내력을 아니 이제 우리 집안이 되어버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나 하나만의 아픔으로 가슴에 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 시절엔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다 해도 왜 하필이면 내게 그런 일이, 그 원망의 마음을 지우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런 행정적인 법적인 문제에 대해 전혀 아시지 못하는 우리 어머니는 어쩌면 몰라서 행복하신 분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이 집 안 식구 누구 하나 그것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단지 유별스럽고 예민한 맏며느리인 나만의 고충일 뿐이다. 당신 가시는 날까지 돌봐드리고 비용을 처리하고 행정적인 절차를 마무리해야 하는 주보호자, 이 맏며느리의 소임이다.


그 길이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그 환한 미소가 당신의 길을 밝히는 한 따스한 손길로 잡아주고 가련했던 당신의 인생마저 고이 보듬어 드리고 싶다. 함께 하는 그 여정에서 시시때때로 널을 뛰는 이 못난 며느리의 하소연이 될지, 서로의 연민으로 가득한 글이 될지 긴 마라톤 같은 동행길을 아주 길게 천천히 가보려 한다.


2023년 4월에 쓰기 시작하여 24년 1월에 이 글을 다시 써 놓고도 망설이며 미루다 이제야 하나씩 그 봉인을 해제하려 합니다. 간간이 시어머니에 대한 글을 올렸기에 겹쳐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또 밝은 글이 될 수만은 없기에 많이 망설였습니다. 매주 화, 목 연재로 발행됩니다. 매주 이 글과는 별개로 밝고 맛있는 글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울더라도 무겁지 않게 바라봐 주세요. 그래야 제가 견딜 수 있는지도 모르니까요. 감사합니다.


24년 8월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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