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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Aug 29. 2024

호적에 없는 시어머니와의 두 번째 동행

 벚꽃비가 내리던 날에(23.4.1)

벚꽃비가 내리는 2023년 4월의 첫날, 벚꽃 잎 사이로 쏟아지는 파란 하늘빛이 봄날의 꽃잔치를 한층 더 빛나게 다. 오늘은 4형제 부부가 어머니 면회를 한 에 점심을 먹기로 했다. 25분 정도면 가는 어머니께서 계신 요양원은 한 달에 한번, 평일에 4인만 면회가 가능한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진단키트 검사 결과 음성임을 확인한 4형제가 면회를 들어가고, 동서들과 나는 영상통화로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잘 알아보지 못하셔서  걱정했지만, 차츰 대화를 하면서 그래도 며느리들을 모두 기억해 주심에 얄팍한 안도로 마음을 달래었다.


6년 전 여기저기 요양원 답사를 다녔다. 번화가 쪽에 있는 요양원들은 대부분 건물 일부요양원으로 협소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또 너무 낡았거나, 청결하지 못해 숨쉬기가 곤란한 곳들도 있었다. 그렇게 알아보던 중에 다행히 지인이 직접 근무했던 곳으로, 어렵게 대기까지 하고서야 이곳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원장님이 땅을 사서 직접 건물을 짓고 운영하는 곳으로, 입구에 작은 정원도 있고 내부도 잘 정돈되어 있어 깨끗한 인상을 받았다.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나 식사와 간식제공등도 체계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다 하여 믿고 선택한 곳이다.




어머니의 치매는 하루아침에 찾아온 것이 아니다. 85세를 넘기시면서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바지런하고 단정하시던 분이 씻지도 않으시고, 늘 쓸고 닦던 당신 방청소도 잊으신 채 인지능력이 저하되며 하루하루 어머니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결국 어머니의 모든 케어는 내 몫이 되어갔다. 어쩌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수시로 목욕을 시켜드리고, 의복을 챙겨드리고, 아주 작은 일들까지도 내손이 가야만 하는 일들이 늘어만 갔다. 그것이 5~6년으로 이어졌지만 그것은 오직 내가 감당해야만 하는 당연한 일이라 여기며 살았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어머니의 일상은 그렇게 온전히  보살핌 속에서 세월이 흘렀다. 그런 와중에 내 몸이 나도 모르게 견뎌내지를 못하고 병원을 찾는 날들이 늘어만 갔다. 어느 겨울날 시어머니의 감기로 자주 다니던 내과를 찾았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어머니의 상태확인하시며 어머니보다 모시고 온 나를 더 측은하게 여기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며칠 후 소화장애로 다시 방문했을 때 나이 지긋하신 그 의사 선생님의 질책과도 같은 말씀을 한참이나 들어야 했다. 그렇게 본인 덩치보다 크신 불편한 어르신을 그 약한 몸으로 언제까지 감당할 것이며, 본인이 살고 봐야지 요즘 좋은 시설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그런 고생을 하느냐, 그럼 형제들이 수고비라도 주더냐 등등 이보다 더한 말씀들을 많이 셨지만 차마 글로 다 옮길 수가 없다.


어느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그 말씀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듯이 눈물만 그렁그렁한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진료실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탔지만 갑작스레 봇물처럼 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 시동을  수가 없었다. 그간의 설음들이 녹아내리고 온갖 응어리들이 작은 모래알처럼 부서져 내리 눈물파도에 휩쓸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그날 이후 차근차근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보건소에서 치매검사를 받고 등급신청을 하고 여러 가지 과정을 거치면서 치매판정 4등급을  주간보호센터를 다니시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가시는 날까지 내손으로 다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은 너무 쉽게 무너져 버렸다. 이미 시작되어 버린 어머니의 흐릿한 날들은 점점 더 뒤엉키며 멈출 줄을 몰랐다. 급기야는 생리현상인 대소변처리가 문제가 되고 말았다. 다른 일들은 어떻게든 해결해 보겠지만 그것만은 불가항력이었다. 아무리 신신당부하며 기저귀를 채워드려도 어느 틈엔가 빼서 감추어 버리는 통에 그 오물덩어리들을 찾기 위해 온 방안을 뒤져야 했다. 그렇게 몸도 마음도 지쳐갈 즈음 동서들을 불러 식사를 하면서 어렵부탁을 했다. 결국에는 내손을 떠날 수도 있으 그 부분에 대해서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하루아침에 낯선 곳으로 모시게 되면 당황하시거나 적응이 어려우실까 염려되어 마침 주간보호센터에서 운영하고 있는 단기 요양원에 며칠씩 머무시도록 하기도 했다. 그렇게 나 홀로 하나씩 어머니와의 이별을 준비했다.


그러나 그렇게 시간을 두고 부탁했음에도 막상 그 상황이 되자 형제들은 서운해했고, 나의 그런 준비들은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그때 마음에 난 커다란 상처는 지금도 시시때때로 내 가슴을 시리게 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내손으로 발품을 팔아 치매등급 3등급이 되신 어머니를 요양원으로 모시게 된 것이다. 다행히 어머니께서는 잘 적응해 주셨고,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때문에 요양원 문제로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 이러한 결정을 하는 과정이 얼마나 지난하가슴이 미어지는 일인 알기에 공감이 가고 안타깝기만 하다.




그렇게 준비를 해서 모셨다 해도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치매라는 푯말을 달아 낯선 곳으로 보내고 형제들의 곱지 않은 시선들까지 견뎌야 했던 그날들은 오래도록 나를 병들게 했다. 어느 날 친한 선배를 만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마음 독하게 먹고 모셨지만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죄책감으로 기어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선배는 거기에 계신다고 해서 모시지 않는 것이 아니다, 결국 오가며 그 뒷바라지를 하는 것 또한 모시는 것이니 마음 아파하지 말라며 위로해 주었다. 그래, 함께 한 30여 년의 세월은 첫 번째 동행이고, 이제  번째 동행이라 마음먹기로 했다. 부디 어머니와 함께 가는 이 길이 슬프지만은 않았으면 다.


2023.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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