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야 Sep 03. 2024

시어머니 요양원행이 남긴 그 상처가 아물기까지

기쁘지만은 않았던 어버이날의 면회(23.5.4)

오월은 분주하다.

마음도 몸도 부산스럽다.

세월이 흐르니 멀티가 안된다.

친정어머니 49제를 모시는 일에 집중하다 보니 시어머니 면회 날짜를 미리 예약하는 을 놓치고 말았다. 더구나 어버이날이 끼어 있어 어떤 일이 있어도 그날까지는 면회를 가야 한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요양원에 전화를 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어버이날을 그 많은 자식들 면회 없이 지나치게 할 수는 없었다. 이미 빨간 글씨 연휴는 마감되었지만, 다행히 이틀 후 작은어머니 기일이기도 한 5월 4일 오후 4시가 비어 있어 예약을 하고 한숨을 돌렸다.


나의 게으름으로 어쩔 수 없이 같은 날 일정이 잡혀 작은어머니, 작은아버지 제사를 모시고 난 후 천평이나 되는 산소에 제멋대로 난 풀들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5월의 태양은 뜨겁게 내리쬐고 벌써 땀이 범벅이다. 다행히 지난겨울 제초제를 꼼꼼히 뿌려놓아서 빨리 끝이 났다. 시원한 냉면집을 찾았다. 얼음이 씹히는 시원함에 몸도 마음도 평정심을 되찾는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어제 준비해 놓은 어머니 간식가방을 챙겼다. 이가 없으신 어머니께서 드실 수 있게  맛있게 숙성이 된 골드키위도 썰어서 담고. 시골에서 가져온 달달한 식혜도 작은 병에 담았다. 물론 이곳저곳을 다니며 어렵게 구한 카네이션도 챙겼다. 몇 군데를 갔지만 모두 생화만 있고 며칠 동안 가슴에 달아드릴 수 있는 조화로 만든 카네이션이 없었다. 조화는 찾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요양원에 계시는 불편하신 어머니께는 꼭 필요한 이다.


한 달에 한번 4인만이 면회가 가능한 요양원은 벌써 어버이날 면회객을 맞을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정원에 있는 나무들은 푸르르고, 초입에 놓여 있는 화분들은 예쁜 꽃들로 가득하다. 싱그러운 오월은 플래카드까지 나부끼며 면회객들을 맞아주었다.


그동안 밀린 서류들에 사인을 하고, 어머니께서 갑자기 식사량이 줄었다는 간호팀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또 그 루틴이 반복되려나 싶어 걱정이 앞섰다. 요양원에 가신지 6년이 지나 잘 적응하고 계시지만, 3년 전부터 1년에 한두 차례 씩 병원에 가는 일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은 밤새 안녕이라고 불안이 엄습해 온다.


신속항원검사를 마치자 저 멀리서 휠체어에 앉아 손을 흔드시는 어머니가 우리를 반기신다. 오히려 지난달보다 컨디션은 최상이다. 손자, 손녀의 안부까지 물으시고, 돌아가며 동영상통화로 면회 오지 못한 식구들과도 만나셨다. 온얼굴에 웃음꽃을 피우며 좋아라 하시는 모습을 보면서도, 내 마음속은 불안함으로 가득한 하루였다. 



가슴에 카네이션도 달아드리고, 캘리그래피에서 만든 장미카드를 드렸더니 어린아이처럼 좋아하신다. 예쁜 꽃양말도 드리니 마음에 드시는지 예쁘다며 얼른 주머니에 넣으셨다. 그렇게 어머니와 함께한 시간은 30여분, 와줘서 고맙다며 연신 손을 흔드시는 어머니, 이번만큼은 응급실에 가시는 일 없이 지금 이 모습으로 머물러 주시기를요.




7남매 중 장남인 남편은 결혼도 전에 가장이 되었다. 뒤늦게 낳으신 막냇동생이 초등학생이었다. 그런 동생들과 어머니를 책임져야 했다. 위로 두 누나는 결혼을 했지만 순탄치 않았다. 부부간에 다툼이 난 날이면 부모대불려 가 중재를 하고 돌아와야 했다. 그러다 덜컥 세상 물정 모르던 내가 그 집식구가 되었다. 함께 불려 갔다. 시퍼렇게 멍든 막내 시누이의 얼굴을 보며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세월이 흐르며 혼주가 되어 동생들을 모두 결혼시키고 경제, 정신적으로 어려울 때면 언제나 도움을 주어야 하는 쉽지 않은 날들은 이어졌다.


그런 남편의 배려 속에 형제들의 우애는 돈독했고 생일이나 경사스러운 일을 함께하며 아버지 대신인 남편과 어머니에 대한 효가 극진했다. 그런 중에 어머니께 치매가 자 효를 다하기 위해 매주 돌아가며 어머니를 더 자주 찾아뵈었다. 그런 날이면 새벽부터 일어나 청소를 하고 목욕을 시켜드리고, 아침도 먹고 오지 않는 형제들을 위해 밥을 했다. 찾아준 자식들을 보며 기뻐하시는 어머니, 나도 좋았다. 동서들과 매주 모여 아침, 점심, 저녁까지 해 먹으며 하하 호호 형제들의 우애는 농익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좋았다!

그것은 나의 노동력이 따라야 하는 것이거늘 결코 순백일 수는 없었다. 힘들었다. 몸도 마음도 힘들어져만 갔다. 그럼에도 내색할 수가 없었다. 형제들의 우애가 그 어느 것보다 중요했으니까. 그렇게 견뎌온 세월인데 요양원 모시는 문제로 틀어지고 말았다. 대쪽 같은 남편성정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지켜온 세월인데 믿었던 동생들의 반응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급기야 동생들을 모두 불러 놓고 폭탄발언을 했다. '이제부터 어머니 일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않을 것이니 오늘 이 시간부터 너희들이 어머니를 모시거라. 요양원비고 무엇이고 난 한 푼도 주지 않을 것이며 모든 인연을 끊고 외국으로 나가 살 것이니 그리 알아라.'


전혀 예상치 못했던 형의 발언에 동생들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남편이 그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며 보살펴주던 동생들에게 그런 말들을 하기까지 얼마나 고심하고 또 고심했을까. 그런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형제들의 상처는 아물어 갔지만 완전체는 되지 못했다. 아직도 큰 시누이께서는 묵묵부답이다. 그것은 내가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살아온 그 시간들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서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 어머니의 요양원행으로 커다란 진통을 겪으며 형제들은 상처가 나고 아물어가며 6년이 지난 지금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너무 효자였던 형제들, 그래서 받아들이기 더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난 그들을 헤아릴 여유가 없었다. 반은 미쳤었다. 제정신으로는 그런 큰일을 해낼 수 없었다. 산정상에 오르면 발아래 운무에 가려진 저곳이 천국이고, 베란다 아래 저 땅에 누우면 편안해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일일이 이런 내심경을 다 말할 수 없었다. 오히려 훗날 그것이 빌미가 되어 큰 시누이와 더 멀어진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어느 것도 내가 감당해야 되는 일이다. 그렇게 서운해했던 형제들을 탓하지 않는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일어나는 것이다. 때로는 참고 견디다 보면 괜찮아지는 날들이 있다는 것을 아직도 알아가는 중이다.


2023. 5. 4.

이전 02화 호적에 없는 시어머니와의 두 번째 동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