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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야 Mar 27. 2024

ATM기에서 잃어버린 돈

선물 같은 하루

앗! 돈이 없다. 주머니를 뒤지고, 가방을 샅샅이 털어도 나오지 않는다. 단 몇 분 전 상황을 다시 그려본다. 아~ 암흑이다.


오늘은 기분이 상당히 맑음이었다. 물론 그다지 안 좋은 날도 없지만. 더구나 불금에다가 미리 해놓은 반찬도 많아서 잠시 쓰던 글까지 마무리하고, 인근도서관 앱으로 이기주 작가님의 '언어의 온도'를 예약도서로 신청하고, 천재작가님(류귀복)의 '나는 행복을 촬영하는 방사선사입니다'는 희망도서로 신청했다.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맛있게 점심을 먹고 딸 집으로 건너오다 마침 현금이 필요하여 아파트 입구에 있는 ATM기에서 인출하기로 하였다.


평소에 카드만 쓰다 보니 현금을 찾을 일이 많지 않기에 통장에 얼마의 잔고가 있는지 궁금하였다. 내 이름으로 된 통장도 아니고 가족카드로 쓰니 이때 말고는 얼마가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가끔 '지출이 좀 되네' 한마디 하면 그때서야 물건사기를 좀 자제하곤 한다. 얼른 잔액이 찍힌 명세서와 카드를 꺼내어 잔액을 확인하며 나왔다. 어~~ 잔액이 꽤 많다. 역시 요즘 마트도 잘 안 가고, 외식도 자주 안 하고, 무엇보다도 쇼핑을 안 한 결과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다.


뭐가 허전한 거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서며 중얼거리다 주머니를 만지고 지갑을 다시 열었다. 카드는 그대로 제자리에 있는데.... 꼭 있어야 할 인출한 주인공이 없다. 후다닥 다시 뛰어나가 ATM기로 돌진하다 보니 어느 여성분이 통통거리며 ATM기에서 나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순간 붙잡고 자초지종을 말하려다 자칫 오해가 될 수도 있어 무작정 뛰어들어가 텅 빈 ATM기 내부를 살펴보았다. 도대체 뭘 바란 걸까. 모두 그대로일 뿐 내게 어떤 위로도 될 수 없었다.


그래 내 불찰로 날려버렸으니 그 여성분은 완전 횡재한 날이네 하면서 아파트에 방송이라도 좀 해달라고 해볼까 하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까지 하며 집으로 돌아와 세탁기를 돌렸다. 아~ 그래도 뭔가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쉽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은행에 전화를 해볼까 하는 순간 다시 후다닥 ATM기를 향하여 달렸다. 너무 시간이 지체되면 설명하기도 그러니 얼른 ATM기 내에 있는 전화기를 들고 콜센터를 누르자 천사 같은 직원분이 상냥하게 받아주셨다. 말하기 정말 정말 창피하고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어차피 벌어진 일, 좀 전에 인출했는데 돈을 안 가져갔다 하니 확인해 보겠다며 카드번호와 금액을 물었다.


이럴 때 '아싸라비아'라고 했던가. 인출 후 그냥 두고 갔을 경우 바로 다음 사람이 가져가지 않는 이상 자동으로 취소되어 입금이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둘도 없는 나의 구세주 콜센터 직원분께 수없이 감사의 마음을 담아 하트를 날리며 다시 필요한 돈을 당당하게 인출하여 발걸음도 가볍게 집으로 돌아왔다. 예전에 매스컴이나 주변사람들로부터 그런 경우를 듣곤 했었지만 내가 그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돈을 잃어버린 것 보다도 나의 그런 행동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현금을 인출하러 간 사람이 돈을 안 들고 나온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걸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내가 그랬다.


하다 하다 이런 짓까지.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것도 못 챙기다니. 잃어버린 돈보다 옆지에게 그 상황을 말하는 것이 더 자존심 상할 것 같아 말하지 않으려 했다. 고이 접어둔 비상금을 꺼내쓸 요량으로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을 때도 찾지 않고 이 고비를 어찌 넘길까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이제 웃으며 고백해야 할까.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지만 내일 다시 이어 써야 한다. 나는 바쁜 사람이니까. 바쁘게 살다 보니 이런 해프닝이 벌어지고 덕분에 생동감 넘치는 글을 쓰고 있다. 고맙다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지글지글 바삭하게 구워지는 냄새에 침이 한가득 고인다. 먹음직스러운 자태마저 아름답다. 돈값을 하는지 기다리는 시간에도 도도하기만 하다. 깻잎에 싸 먹을까, 명이나물에 싸 먹을까 입맛 다시며 쏘아대는 내 눈길에 타버릴 것만 같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워주시는 분께서는 기다리라고만 한다. 드디어 일렬로 나란히 나란히 먹기 좋게 세워지며 스타트의 휘슬이 울렸다. 아무래도 제맛을 알려면 이 집만의 특제소스에 살짝 찍어 먹어보아야겠지. 입안에 들어가는 순간 그래 이 맛이야. 언제부터 먹어보았다고 고상한 척 우아하게 오물오물 장어에 고소한 맛을 한껏 음미하한낮의 만찬을 즐겼다.


주인공도 아니면서 말이다. 함께 지 40여 년, 유일하게 그전부터 만나온 친구들의 모임이 있었다. 하나 둘 결혼하며 아내들도 세트가 되어 만나기 시작했다. 결혼집들이를 하고, 돌잔치를 하고, 하나둘 집을 장만하며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집들이를 하고. 아이들이 자라면서 결혼식에서 만나고, 이제 각자 퇴직하면서 더 자주 만나는 분들이다. 나이가 드니 그중에 한 분의 아내가 많이 아팠다. 작은 종양이 있어 로봇수술에 들어갔는데 암초기였다. 다행히 완전 초기여서 간단히 제거되었지만 많이 힘들었는지 야위어도 너무 많이 야위어졌다.


비록 남편들이 시작한 모임이었지만 함께 해외여행, 국내여행, 당일치기여행, 오늘처럼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할 때면 만나서 힘나는 음식을 먹고 산책을 하고 차를 마시며 하루를 보낸다. 그래도 함께해 온 세월이 있기에 이틀 전부터 쾌유를 바라는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아 따로 봉투를 써놓았다. 그 봉투에 넣으려던 돈을 찾는 과정에서 수선스럽게도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많은 금액은 아니지만 가벼운 산책 후 슬그머니 가방에 담아주며 함께 오래도록 건강하자며 손을 잡았다.


돈!

그 돈을 벌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피땀을 흘리고 온마음을 다해 일을 하고 가정을 일구어 나가기 위해 그 많은 세월들을 고군분투하며 살아왔다. 단 한 푼이라도 소중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없을 때도 조금 나아졌어도 그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아픔은 나누면 반으로 줄어든다 하지 않았던가. 돌아오며 고백을 했다. 왜 다시 입금이 되고 다시 찾았는지. 돌아오는 대답은 한마디였다. '카드만 챙겼으면 돼.' 그것 때문에 혼비백산하여 뛰어다니다니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다. 그렇게 나만의 대소동은 일단락되었다. 시시하게도. 그래도 내게는 어제도 오늘도 누가 뭐래도 행운이 가득한 선물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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