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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레비엔 Mar 01. 2024

멕시코 친구들에게 '밥 먹었어?' 알려주기

스페인어 배우기

스페인어로의 상상

눈을 'ojo' 이렇게 귀엽게 쓰는 사람들이 세상에 살고 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시작한 스페인어 공부를 하다가 알게 된 단어 눈, 'ojo'이다. 너무나 직관적이고 그림 같은 단어에 반하고 보니 영어 'eye'도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을 뿐 눈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그랗고 순진하게 뜬 눈과 큰 코는 누가 봐도 그림에 가까울 정도로 직관적이다. 

스페인어는 그렇게 친근한 기분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스페인어는 그나마 다른 언어보다 덜 어려웠지만, 공부보다는 언어에 녹아있는 스페인어 문화권을 상상하는 데 정신이 팔렸다. 누군가 나를 세뇨리따라고 부른다는 상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는데, 그 땅에 가면 뭔가 아름답고 여성스러운 그녀 ‘세뇨리따’가 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기본적으로 스페인어는 경제성 따위는 개나 줘버린 끝없는 수다 같은 언어다. 스페인이나 남미권의 미녀들이 유독 글래머러스하면서 허스키한 목소리를 가진 것을 스탠더드로 여기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아마도 경제성이 없는 언어로 아무 제한 없고 쉴 새 없이 떠드는 그들의 쾌활함 때문일 것이라 고 내 멋대로 상상했다. 이러니 스페인어 공부가 잘 될 리가 없었다. 


빠른 말, 어려운 숫자

스페인어를 공부하면서 가장 걱정되었던 것은 말의 빠르기였다. 내가 공부한 교재에서는 초보자용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빠르기로 예문을 들려줬다. 입문자용 교재의 예문이 이렇게 빠르면, 실제 회화에서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할 것이 염려되었다. 다행히 멕시코사람들은 느긋했고, 동양인을 상대로 그렇게 빠르게 말을 해댈 만큼 눈치 없지도 않았다.      

내가 방문한 첫 스페인어권 나라는 멕시코다. 멕시코는 앞에서 말한 'ojo'처럼 생긴 사람들의 나라였다. 이렇게 귀여운 단어를 가진 언어라도 여행자에게는 장벽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안다고 생각했던 단어들도 꺼내지 못했고, 완전히 숙지하느라 노래처럼 불러댔던 숫자도 계산을 끝내고 숙소에 도착해서야 겨우 알아들었다. 스페인어는 내가 공부해 봤던 언어 중에서 숫자가 가장 어려운 언어였다.


나를 세뇨리따라고 불러주는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스페인어는 사랑스러웠다. muchachas(무차차스)라고 여자아이들을 부르는 발음이나. mañana(마냐나) 한 단어는 내일과 아침을 가리킨다. 내일과 아침이 같은 것을 보니, 점심부터 하루를 시작하는 행복하게 게으르고, 오늘을 가장 사랑하는, 자유롭고 수다스러운 민족일 것이라고 맘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물론 안타깝게도 내가 공부해야 할 단어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메뉴 주세요'나 '얼마입니까' 같은 사랑받기 어려운 단어들이었다. 그럼에도 내 상상 속에서 스페인어를 쓰는 사람들은 목이 쉴 때까지 수다스러운 곧 나와 친구가 되어줄 사람들일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희망적인 스페인어

스페인어는 모든 단어에 성과 수가 들어간다. 성은 모든 단어에 남녀를 구분하는 변형을 하거나, 모든 단어에서 단수 복수를 구분하는 것을 수라고 한다. 그럼에도 비교적 배우기 어려운 언어는 아니다. 영어와 비슷한 단어도 꽤 많이 사용된다. 그동안 여행하면서 배우려고 시도했던, 힌디, 아랍어, 러시아어, 중국어, 일어에 비하면 매우 희망적이었다. 나는 일어를 고등학교 3년 동안 공부했지만, 히라가나만 겨우 읽을 정도로 어려워했고, 대학 때 잠시 배운 중국어는 잊은 지 오래다. 러시아어는 숫자와 읽기 정도만 여행 중에 공부했는데, 특유의 발음 '쓰스쯔츠쯔' 같은 아마도 몽골어에서 기원한 어려운 발음 때문에 근접할 수 없었다. 아랍어는 아랍어권에 도착하는 순간최악의 문맹을 경험했다. 숫자도 아랍어 숫자를 사용하기 때문에, 택시나 버스번호도 읽기 어려워진다.  힌디도 몇 년 동안이나 붙잡고 있었지만, 우리나라 언어와 비슷한 발음과 문장구조에도 변화무쌍한 철자 때문에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 

이런 나의 고백처럼 나는 언어를 빨리 배우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스페인어는 그나마 희망이 보였다. 

스페인어 발음은 노래 같기도 하고 말하는 재미가 있었다. 사람들이 허스키 한 목소리를 가질 때까지 이야기하고 싶게 만드는 것은 이 아름다운 발음 때문인 것도 같다.

 지금도 스페인어를 공부해야 하는데 노트를 펴놓고 상상만 하고 있다. 겨우 두 줄, '나는 지금 자러 가야겠어', '나는 지금 샤워하러 가야겠어'를 써 놓고, 그들의 영혼을 읽겠다는 허황된 꿈을 꾸고 있다.      


 '밥 먹었어?'와 'muy bien (매우 좋아)'

이 호스텔의 장기 투숙객 중 스페인어를 제일 못하는 사람은 나다.  그래도 친절한 멕시코 사람들은 , 이렇게 생긴  'ojo'  눈이라는 단어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시간을 들여 번역기로 나에게 질문도 하고, 스페인어도 알려준다. 

매일 진전도 없이 배우기만 하는 것이 민망해서, 오늘은 내가 한국어를 알려줬다. 

'como estas?' 'how are you?' 둘 다 '오늘은 어때?' 기분을 묻는 말이다. 한국어로 '밥 먹었어?'라고 알려줬다. 물론 식사를 했는지 묻는 말이라고 의미도 알려줬다. 그 순간 왜 밥 먹었냐고 묻느냐며 모두 어리둥절해한다. 그래서 우리가 '밥 먹었냐'라고 안부를 묻는 이유를 설명해 줬다. 

우리는 기분을 묻지 않는다고, 우리에게 fine이나 Good은 없다고. 우리는 not bad을 확인한다고 말해줬다. 우리는 서로의 무사안일을 묻고 기원한다. 

 '밥 먹었어?' 물었을 때 '응 먹었어', 이렇게 대답하면, 아 무사한 하루를 보내고 있구나. 오늘은 어제와 같은 무사한 날이구나 이해한다고 알려줬다. 


그랬다 우리는 기분을 물을 여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안녕한지를 오늘도 별일 없이 무탈한지를 묻는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 지금에도, 멀거나 가깝거나 우리는 서로가 무사하기를 바란다. 우리 사회에서 별일 없이 기분이 너무 좋거나 행복한 사람을 본 지가 얼마인지 모르겠다. 이렇게나 잘 살고 있는데도, 우리는 왜 아직도 안녕하기를, 밥을 잘 챙겨 먹기를 확인하고 있는 것일까.


스페인어권에서는 영어에서 많이 쓰는 'fine (괜찮아)' 보다는 'muy bien (매우 좋아)'를 더 많이 쓴다. 아무 생각 없이 'como estas?' (오늘 기분이 어때?)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muy bien (매우 좋아)'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언제 매우 좋고, 매우 행복해봤던가. 

한국사람들, 한국 사회가 그토록 원하던 잘살고, 잘 먹고, 잘 배우고, 똑똑해졌는데, 우리는 과연 매우 좋아졌을까. 

멕시코에 비하면 우리가 훨씬 잘 산다. 

도미토리에서 사는 여행자는 부족한 것도 많고, 불편한 것도 많다. 그런데도 나는 여기에서 오늘, 매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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