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레비엔 Nov 05. 2024

추첨

추첨에 뽑히는 파이프는 가장 먼저 지상으로 나갈 수 있어서, 누구라도 방송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을테지만, 벅차오르는 기쁨의 눈물 때문에, 추첨을 제대로 본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추첨은 빠르게 진행되었고, 최초의 10개 파이프가 정해졌다. 안타깝게도 8천 번대 파이프 추첨에서 우리 파이프는 뽑히지 않았다. 자신이 사는 파이프가 추첨에 뽑히지 않았다고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주할 파이프 추첨이 끝나고도 여러 가지 안내 방송이 이어졌다. 이주시 준비해야 할 것들, 지상의 상황, 앞으로 이주를 위해서 공장과 농장에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안내를 하기도 하고, 전문가들이 나와서 앞으로의 상황 예측이나, 지상에서 달라지는 것들같은 다양한 주제로 하루종일 방송을 이어갔다. 

“처음으로 지상으로 이주하는 분들 축하드립니다. 저는 아무래도 방송을 해야하기 때문에 가장 마지막으로 이주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만, 박사님, 저희가 지하 49미터 지점에 있지 않습니까? 지상으로 이동시에는 도시 외곽과 중앙에 위치한 4개의 봉인된 파이프를 열고 이동 통로로 사용하게 된다고 하는데요. 박사님. 엘리베이터 같은 시설물이 있습니까? 어떤 경로로 지상으로 이동하게 됩니까?”

“경사로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게 됩니다. 우호 보금자리와 지상을 열결하는 파이프 위에는 지상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경사로와 엘리베이터가 50미터 간격으로 나 있어서 파이프 한 개당 60개의 출구가 있습니다. 이후에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시간당 만 명이 이주할 수 있게 됩니다. 모든 인구가 지상으로 이주하는데 최소 한 달에서 그 이상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아 그렇군요. 오늘 발표로 시민들은 하루 빨리 지상으로 이주하고 싶을 텐데요. 최소 한 달이면, 이주까지 오래 기다려야 할 수도 있겠군요?”

“그렇습니다만, 저희는 이 시설에서 100년을 버틸 계획이지 않았습니까. 600만 인구가 평지에서 대피하는데도 시간이 꽤 많이 걸립니다. 저희는 13층 높이의 연결통로를 통해서 많은 인구가 이동 해야 해서 더 시간이 지체 됩니다. 많은 인구가 이동하는 만큼 안전사고가 없도록 모두 협조해야 합니다.”

“그렇군요. 저는 지상에서 태어났습니다만, 어릴 때라서 기억이 잘 나지는 않습니다. 우호 보금자리로 들어 올 때는 각 도시와 연결된 입구가 아주 많았다고 하는데요. 왜, 출구는 4개뿐 입니까? 출구가 많으면 더 쉽게 많은 인구가 이동할 수 있을텐데요.”

“아시다시피 들어올 때 사용한 임시 입구는, 보금자리의 건축 기간이 충분하지 않아서 안정성 때문에 모두 메워졌...”

>>> 출구가 몇 개든, 얼마를 기다리든 상관없지, 우리가 나가게 되다니!

아버지가 그렇게 벌떡 일어서서, 큰 동작으로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어찌나 빠르게 말을 하는지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같았고, 어찌나 크고 시원한 동작이었는지 춤추는 것 같았다. 만약 아버지에게 목소리가 있었더라면, 이 지하 파이프 전체가 쩌렁쩌렁 울렸을 것이다.

아버지의 이 한마디에 엄마는 또다시 눈물을 훔치느라, 한 마디도 못하고 있었다. 나도 부모님이 그리던 땅 위로 올라간다니 눈물이 나고 가슴이 벅차서 같이 한참을 울었는데, 지금까지 만든 여러 가지 것들을 다 두고 가야 한데서, 지상이 정말 그렇게 좋은가 살짝 의심이 들었다.

“라이카, 땅 위로 올라가서 너도 좋아?”

“좋아, 사람들이 다 좋아하잖아. 그런데, 땅 위가 왜 좋은거야?”

“엄마가 엄청 넓고 시원한 바람도 불고 아름답데, 땅위 그림도 많이 봤는데, 천국 같더라. 좋겠지? 사실 여기 있는 것들 다 두고 가야 한다고 해서, 그 정도로 좋은가 싶고 잘 모르겠어.”

>>> 어머, 어머, 얘들 좀 봐, 땅 위가 얼마나 좋은데, 여기서 만든 장난감들 놓고 가는 걱정을 해~. 너희 올라가기만 하면 놀 데가 얼마나 많은 줄 아니? 나무도 있고, 풀밭도 있고, 바다도 있고, 라이카 너도 정말 좋아할 거야. 맞다, 강이랑 바다도 있었지! 하도 오래 지나서 잊고 있었네. 수영을 할 수도 있겠다. 우리 애들...

이렇게 말하면서 엄마는 또 울기 시작했다. 수영이 뭔지 물어볼까 하다가 말았다.      

오후에 들어서면서 군인과 경찰들이 각 주거 파이프와 연결된 통로의 해치를 닫았고, 모두들 라디오를 들으면서 주거 파이프에 머물렀다. 이웃들은 나와서 같이 이야기 하다가 울고, 펑펑 울다가 또 웃었다. 소등 후에도 잠드는 사람 없고, 누구 하나 빠지지 않고 모두 행복이 찾아온 기적같은 밤이었다. 지상에 올라가도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제와 달라진 것 하나 없는 똑같은 날이었으나, 희망은 그런 것이었다. 변화의 조짐 같은 것. 그것만으로 우리는 행복했다.

이틀 후 이동제한은 해제되었고,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오히려 더 바빠졌다. 지상 생활에 대비해서 철수 준비를 하거나, 필요한 물품들을 생산해야 했기 때문이다.

엄마도 그날부터 우리 가족의 캡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두고 갈 것과 가져갈 것을 나누고, 대청소를 시작했다. 하루종일 분주한 엄마를 두고 아버지는 이주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며, 천천히 하라고 만류했지만 곧 협조할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도 급하게 추첨에 뽑혀서 지상으로 이주할 것에 대비해, 간단한 짐을 미리 싸두라고 하셨다. 라이카의 집과 「무:번역기」의 설계도와 사람을 위한 완성품, 몇 가지 장난감 정도만 챙겨두었다. 그 무렵 부모님의 대화도 달라졌다.

>>> 당신은 어릴 때 살던 집 찾을 수 있겠어? 풍경이 많이 달라졌을텐데.

>>> 그럼,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지. 자면서도 찾아갈 수 있지. 나가면 갈루아 데리고 다녀오자고, 그런데, 나가면 어디 살고, 지상 상황이 어떤지도 말해주면 좋을텐데, 아무말이 없네.

>>> 사람들이 동요할까봐 그렇겠지, 지상에 나가도 건물도 다 허물어지고, 아마 쉽지는 않을 거야. 그래서 그렇겠지.

>>> 어디라도 나가기만 하면, 여기보다는 나을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일단 무사히 나가서 그때 생각해야지. 

>>> 살아생전에 땅 위로 나갈 줄은 생각도 못 했네, 우리 갈루아가 어른이나 되어야 겨우 나갈 줄 알았더니. 갈루아. 땅에 나가면, 여기저기 많이 가보자. 깜짝 놀랄 거야. 지상은 정말 아름답단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땅 위로 가는 것에 나와 라이카도 설렜다.      

희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안으로 변했다. 첫 이주자들이 보금자리를 떠난 뒤 2주가 지나서야 다시 이주가 이뤄졌고, 그마저도 속도가 너무 느리고, 며칠에 한 번씩 이주했기 때문이다. 어딘가 단단히 잘못된 것 같았다. 한 달이 지났는데 10만 명도 채 탈출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자세한 상황 설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고, 소문도 무성했다. 비밀 파이프가 지상으로 가는 출구라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지만, 두 개는 아직도 한번도 열린 적이 없다는 소문이 자자했기 때문이다.     

간간히 지상 이주가 계속되다가 한 달간은 새로 이주하는 사람이 없어서 모두가 불만을 터트리고, 불안해할 때쯤 소식이 전해졌다. 4개중 두 개의 출구 파이프만 사용이 가능한 상태이며, 빠른 지상 이주를 위해서 대형 크레인을 설치하느라 오래 걸렸다고 한다. 이제부터는 빠른 속도로 이주가 가능하다는 소식이었다. 두 개의 출구로 한 달 동안 거의 매일 이주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느린 것 같지만 벌써 180만명의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한 달간은 거의 매일 추첨이 진행되고, 사람들은 차분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첫 이주를 하기 전에, 정부는 사람들이 동요하거나 소요 사태가 생길 것을 염려해, 이동을 제한하는 조치를 취했는데, 어느덧 사람들은 추첨 매일 아침 추첨 방송을 듣고, 차분하게 직장과 학교로 향했다. 다만, 추첨 방송을 7시가 되자마자 빨리 해달라는 항의는 있었다. 

추첨은 지난 한 달간 거의 매일 빠짐없이 계속되었는데, 추첨 첫 주에는 매일 점등이 되자마자 나는 부모님의 캡슐로 달려가 함께 추첨 방송을 들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내 캡슐에 라이카와 함께 누워서 언젠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방송을 들었다. 

추첨 방송은 군더더기 없이 진행하는데도, 거의 30분이나 걸렸다. 매일 80~90개의 파이프 번호를 추첨하기 때문이다. 각 천 번대 파이프당 8개나 9개의 번호를 뽑는다. 우리 8천 번대 파이프에서 이주한 파이프만 벌써 200개나 되지만, 8천 번대에만 아직도 7800개의 파이프가 남아서 기대하기는 이르다.

추첨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기 때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오늘 추첨하는 파이프 거주자는 다음 주에 이주를 시작하게 됩니다. 지상에 강력한 태풍이 예정되어 있어, 다음 주에 이주할 대상자를 미리 추첨합니다. 

오늘은 각 파이프당 8개 번호를 추첨합니다. 그럼 0번대 파이프 첫 번째 번호는 783 ...”

“이번에 뽑히면 다음 주나 되야 이주 하나봐 그래도 빨리 뽑히면 좋겠다. 그치?”

“응. 나도 빨리 나가고 싶어”

라이카와 이야기 하는 사이 8천 번대 파이프의 추첨이 시작되었다. 

“8천번대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8천번대 파이프 추첨을 시작하겠습니다.”

첫 번째 8002, 두 번째 파이프는 8934, 세 번째 8439,... 7번째

8927, 마지막 8497입니다. 이주할 파이프 추첨을 마치겠습니다....”

“라이카!!! 들었어? 8927!”

하는 순간, 우리 파이프의 사람들이 일제히 캡슐의 미닫이를 문을 열고 나와서 서로 안고 눈물을 흘렸다. 엄마와 아빠도 이미 나와서 두팔을 벌리고 안아주셨다. 

“8927이래요. 엄마! 아빠! 8927번을 불렀어요.”

우리는 이제 지상으로 간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