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끈한 물에 몸을 지지고 있으면 평소와는 다른 정신상태가 된다. 그날 내 몸을 감싼 건 비단 묵은 때뿐만이 아니다. 기억 속에 침전되어 있던 어떤 순간들이, 몹쓸 생각들이 달궈진 몸 주변을 부유했다.
지난겨울 오사카 여행 숙소 선정의 첫 번째 조건은 대욕장 유무였다. 숙소 꼭대기 층에 있다는, 대욕장 야외에 마련된 노천탕의 존재를 알고는 은근히 기대를 하고 있었다. 영화에 나올 법한 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초록 잎사귀나 눈앞에 펼쳐진 설산은 없을지언정 까만 밤하늘을 보면서 뜨끈한 물에 몸을 지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하루 이만보를 걷는 강행군을 끝내고 딸아이와 낄낄거리며 노천탕에 몸을 맡기고 있노라면 하루 피로는 연기처럼 날아갔다.
마지막 날 밤, 웬일로 딸이 대욕장에 가지 않는다 했다. 아이와의 욕탕 데이트가 즐거우면서도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도 갖고 싶었던 차였다. 그 좋아하던 목욕을 안 간다는 아이 말을 단번에 믿기는 힘들었지만 우리는 살아오면서 괜히 뒤돌아보았다가 돌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지 않았던가. 두 번 권하지 않고 앞만 보며 서둘러 수건을 챙겨 나왔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대욕장으로 가는 발걸음은 놀이터에 놀러 나가는 아이처럼 가벼웠다. 욕장에 들어서서는 짐짓 경건하게 구석구석 묻은 피로를 씻어냈다.
그날의 하이라이트.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저벅저벅 야외로 나가 매서운 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노천온탕에 발가락 끝을 펄펄 끓는 물에 담갔다. 찌르르르르. 순식간에 발부터 머리끝까지 강한 전기가 솟구쳐 올랐다. 말복에 삼계탕 먹으며 걸쭉한 목소리로 시원하다고 외치는 아저씨들처럼 뜨거운 물에 턱 아래까지 몸을 담그며 나도 모르게 '크아, 시원~하다'를 내뱉었다.
그때 딸 나이 또래의 아이와 엄마가 노천온탕으로 들어왔다. 오늘 막 도착한 한국인 여행객인 듯싶었다. 그들도 하루 일정이 고되었는지 뜨끈한 물에 몸을 녹이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내었다.
두런두런 모녀가 나누는 얘기를 배경 음악 삼아 흐뭇하게 온천욕을 즐기려는데, 갑자기 아이가 하늘을 가리키며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엄마, 비행기야!" 엄마는 하늘을 잠시 바라보더니 말했다. "저거 그냥 별이잖아."
"어, 그래네." 또는 "어, 그런가?" 정도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수도 있었을 테다. 하지만, 저 어머니는 정확한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인 듯했다. 알파고와 이세돌 바둑 기사의 대결처럼 좀처럼 물러서지 않는 AI에 빙의한 어머니와 딸의 물러서지 않는 한판 승부가 이어졌다. 아이는 움직이는 게 안 보이냐며 비행기라 주장하고, 엄마는 비행기라면 더 빨리 지나가야 한다며 별이라고 응수했다. 그러다 말겠지 싶었는데, 웬걸. 두 사람은 천하장사 씨름대회에 나온 선수들처럼 서로의 샅바를 움켜쥐고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으며 꽤 긴 시간 대치했다. 귀중한 자유부인 시간에 남들 옥신각신 하는 얘기에 왜 집중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하는 패배감이 온몸을 휘감을 즈음 승부는 팽팽하게 양쪽으로 당겨진 실을 누군가 중간을 가위로 싹둑 자른 것처럼 맥없이 끝나버렸다.
가위를 손에 쥔 자는 누구인가.
바로 '네가 뭘 알아' 권법을 사용한 엄마였다.
내가 봐도 아이 말처럼 비행기가 맞는 것 같은데 무조건 자기 말만 맞다고 우기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찰 정도로 당당했으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다. 물에 잉크 한 방울 떨어뜨리면 사방으로 아지랑이 피듯 잉크가 퍼져나가는 것처럼 육신뿐 아니라 정신이라던가 마음이라던가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나를 지배하는 그 무언가도 뜨거운 물 안에서 한 없이 녹아내리고 있을 때 그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흔한 아이와 부모의 대화라고 어깨너머로 넘길 수도 있었는데, 뇌가 말랑해지며 온몸의 세포들이 돌기처럼 일어나 두꺼운 진흙으로 덮여있던 기억의 조각들을 건드렸다. 이미 빛바래 선명하게 기억이 나지도 않았지만 어렴풋이 생각나는 순간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 말이 맞다며 아이를 상대로 우겼을 때가 말이다. 결국 나의 착각임을 뒤늦게 깨닫고 사과를 한 적도 있었다. 매번 진심 어린 사과였는지는 자신할 수 없다. 그리 중하지도 않았을 일에 목소리 큰 게 뭐 자랑이라고 데시벨을 높여 아이의 목소리를 덮어버렸던 그런 순간들 말이다. 당연히 대부분 아이의 인생의 한 획을 그을 만큼의 중대사안도 아니었다.
같은 내용으로 직장 동료와 논쟁을 하라고 하면 1초 만에 스스로 '패'를 던졌을 것이다. 시답지 않은 걸로 싸우는 일에 즉각 회의를 느낄 것이고, 상대에게 고집스러운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기도 할 것이다. 왜 내 핏줄, 더 어리고 연약한 아이에게 맹수가 되는 순간들이 오고야 마는 걸까.
아이를 존중하지 않았던 날의 숱한 밤들을 후회로 물들였으면서, 왜 여전히 반복하고야 마는 건지. 왜 내 마음대로 손이 닿지 않는 기억의 언덕 저 너머에 파묻고 말았을까. 아이가 잘못을 반복할 때마다 "너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한 번만 더 얘기하면 백 번째야!"라고 기적의 수 세기를 밀어붙이면서. 나야말로 한 번만 더 하면 한 오백 번째 일 것 같은데...
뜨신 물에 갑자기 부끄러워진 마음을 몸과 함께 숨기고 있다가 인생극장의 주인공처럼 '그래, 결심했어!' 하는 다짐과 함께 벌떡 일어났다. 철퍽하는 소리에 풀이 죽어버린 아이가 힐끗 쳐다봤다. 어머니 뒤에 가서 슬쩍 "어머니, 저거 비행기 맞는 거 같아요."라고 말해주고픈 충동이 0.1초간 일었지만, 그 역시 나처럼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깨달음을 얻으리라 생각하고는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뒤돌았다. 마치 내 안에 미련함이 찬바람에 날아가기라도 한단 듯이 십 여초를 바람과 맞서다 서둘러 방으로 돌아갔다.
그간의 순간들을 만회라도 할 수 있을 것처럼, 아이들의 빛나는 눈을 한 번이라도 더 맞추기 위해. 이들의 사랑스러운 외계어에 잘잘못을 가리는 입은 닫고 활짝 열린 귀를 한 번이라도 더 내어주기 위해서.
분명 또다시 까먹고서는 내 말이 맞다고 목청 높일 미래의 아둔한 내가 보이기에,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쓴다. 잊지 말자고.
그나저나 뇌까지 씻어준 듯한 온천물, 그거 참 용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