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아들과 함께 택시를 탔다. 요즘 아들은 아이패드 드로잉에 흠뻑 빠져 있다.
택시 안에서 아들이 종알종알 이야기를 했다.
"엄마, 스케치북이랑 메디방이 둘 다 무료라서 좋긴 한데 스케치북은 좀 더 어려운 것 같아."
잘 모르는 세계 이야기인지라 아이말에 그저 추임새나 넣고 있었다. 그때, 5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시는 택시 기사님께서 한 마디 하셨다.
"그냥 스케치북 써~."
나는 기사님께서 문구품 스케치북을 얘기하시는 것이라 단정했다.
'아, 그 스케치북이 아니라 아이패드로 그림 그리는 앱 얘기하고 있었어요.'라고 해야 할지 난처해하는 사이 기사님께서 이어 말씀 하셨다.
"메디방도 꽤 복잡하거든. 일단 아무거나 써봐."
'아니, 이분 고수의 냄새가 풍기잖아?'
"어머, 아이패드 드로잉 전문가신가 봐요~"
"전문가는 무슨, 그냥 취미로 해요."
겸손함 뒤로 숨는 그였지만 이미 말씀하시는 포스부터가 취미 정도가 아니라 전문가로서 손색이 없어 보였다. 아이는 덕분에 목적지까지 무료 고급 정보를 알아내는 수확이 있었다.
택시에서 아이패드 드로잉 전문가를 만났다며 기뻐하는 아이를 보며 나 역시 행운이다 정도로만 생각하고 넘겼다.
그러다 밤에 문득 기사님이 다시 생각났다. 나는 어째서 기사님은 아이패드 드로잉에 대해서 모른다고 딱 잘라 판단했을까. 일흔이 넘은 친정 아빠도 영어를 배운다고 하고, 나도 마흔 넘어 처음으로 글도 쓰고 몸짱이 되고 싶다고 하면서 말이다. 직업이 달라도, 나이가 들어도 아이패드 사용 전문가 일 수 있고 그림도 잘 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당연하듯 간과했다. 무의식 속에서도 제멋대로 타인을 판단했다는 생각에 철렁했다.
나는 좀 '깨어 있는' 사람이고 싶었고, 어느 정도 그렇다고 후하게 판단해 왔다.
회사 후배들에게도 옛 사고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새로운 발상을 적극 받아들이는 '깨인' 선배에 해당하지 않나 생각해 왔다. 가수 장기하 씨 말마따나 '그건 니 생각이고'였다.
오늘도 이렇게 또 하나를 배운다. 지금껏 고집스럽게 쌓아 올린 틀어박힌 사고방식을 하나씩 점검해 본다. 머릿속에 들어있는 오래된 생각, 몸에 이미 익어버린 비틀어진 관습의 때를 빼는 시간이 절실히 필요하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는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누구나 생각을 내려놓을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약간의 연습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 잠재된 능력을 무시하거나 아예 잃어버린다면, 우리 삶은 여태까지 몸에 깊이 밴 행동과 관점에 좌우됩니다. 모든 결정을 습관적으로 내리게 되지요.
연습과 훈련만이 살 길이라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도 이렇게 연습해 본다. 인생의 한 고개를 넘어갈 때쯤이면 힘 좀 빠진 말랑한 내가 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