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한일관계사료집』발간과『독립신문』발행
취임 며칠 후, 안창호는 이광수를 불렀다.
안창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 그대와 같이 일하게 되어 즐겁소. 그런데 어디가 아프오? 건강해야 큰일을 할 수 있다오. 김규식 총장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파리회의는 별반 성과 없이 상황이 종결된 듯하오. 그러나 국제연맹회의가 이어진다니 제출 자료를 서두릅시다. 의정원에서는 김규식의 외교지원을 위해 조소앙과 여운홍을 파리로 파견한다 들었소.”
이광수는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생님의 내무총장 취임으로 다들 힘이 나는가 봅니다. 정청 분위기가 많이 고조되었습니다. 망명한 새로운 얼굴들도 청사로 모여들고 있습니다. 각하께서 내무총장으로 계실 때 사료편찬위원회를 설립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럽시다.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봅시다.” 안창호는 계속 이광수의 안색이 걱정되었다. ‘앞으로 큰일을 해야 할 터인데....’
이광수는 기획했던 종이를 펼쳐 보이며 말했다. “사료수집, 분류, 편집, 집필 순서로 진행계획을 세웠습니다.”
안창호가 슬쩍 물었다. “단재가 그런 말을 합디다.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라고. 우리 민족은 아(我)요, 일본은 비아(非我)라. 우리 민족은 투쟁의 승리자가 되어 미래 역사에 생명을 이어야 한다. 그것이 조선의 역사요, 조선의 혼이다. 춘원은 현 단계에서 한일관계의 핵심이 무엇이라 생각하오?”
이광수는 안창호를 쳐다보았다. “단재 선생의 말씀대로라면 투쟁의 단계인가요?”
안창호가 되물었다. “투쟁의 주체는 누구요? 단재는 한때 이순신, 을지문덕 같은 영웅을 치켜세웠소. 그러나 지금은 아마도 민중 주체 역사관으로 발전한 것 같소. 나는 진화의 논리를 강자의 논리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하지만 진보와 합리성을 추구하는 단재를 인간적으로 좋아합니다. 투쟁의 주체는 민중. 3.1운동은 바로 그 힘을 보여준 것이지요.”
안창호는 문득 단재가 마음을 열고 한일관계 사료편찬 과정에 참여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일은 춘원이 하겠다고 먼저 나선 일이다. 자료가 완성되면 감수는 받아야겠지.’
“네, 현재 제 구상은 일본의 침략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일단 강화도 불평등 조약과 을사늑약의 과정을 정리하고, 한일병탄과 식민지배 정책의 본질을 파헤치려고 합니다. 그리고 3.1운동은 ‘빼앗긴 것에 대한 자각과 민족혼 말살 정책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평화시위’라는 점을 부각하면 좋겠습니다. 물론 제 견해는 여러 위원의 생각과 조율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광수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3.1운동 평화시위에 대한 무력 진압 현황이 낱낱이 드러나면 좋겠구려. 자료수집이 관건일 테고. 물론 사료 중심 편찬이지만, 나는 우리 민족이 고대로부터 사랑과 평화의 홍익인간 정신을 추구해 온 우수한 문화 민족이라는 점도 세계에 알려졌으면 좋겠소.” 안창호는 자상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우리 핵심위원들은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는 목사님들이 여럿 계시니 좋은 문건이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집필 정신에 민족의 우수성이 반영되도록 하겠습니다.” 이광수가 말했다.
“오, 일의 진행은 춘원의 판단에 맡기겠소. 구성원이 어떤 사람들인지 알려주겠소?”
이광수는 조직도가 그려진 종이를 펼쳐 놓고 설명을 시작했다.
“선우혁 선배가 김홍서(1886~1959)를 총무간사로 추천했습니다. 대한매일에서 회계를 지냈고 105인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1916년에 상해로 망명했습니다. 행정에 적임자로 보입니다. 김병조(1877~1948) 목사는 민족대표 33인에 속하며 이승훈 선생과 호흡이 잘 맞는 분입니다. 구하기 힘든 사료들을 이원익 목사와 같이 밤낮으로 수집해 오고 계십니다. 김여제(1895~1968)가 사료 수발을 들고 있습니다. 김두봉(1890~)은 주시경 선생의 제자이며 조선어 사전 <말모이> 편찬 경험이 있습니다. 윤현진 추천입니다. 특히 김두봉은 16세기 임진왜란 이후 병탄 과정과 식민지배 과정의 모든 한일관계 사료들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김한(1887)은 서울 기호계인데, 대한제국 탁지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어 일본의 금융 침략 자료수집과 분석이 수월할 것 같습니다. 제가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장붕(1877~1955)을 초대했습니다. 장붕은 이승만계입니다. 후일 분란에 대비한 것입니다. 또 한 사람 박현환(1891~1970)도 제가 초대했습니다.”
안창호는 자천 타천으로 선발된 조직에 믿음이 갔다. 지역과 계파 그리고 전문성을 고려해 적절히 안배된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오, 좋습니다. 사료편찬위원회 인선은 잘 된듯하니 춘원이 전체를 지휘하는 주임이 되어 주세요. 그리고 일이 불화 없이 잘 진행된다면 정부 기관지도 창간을 서두릅시다.”
안창호는 이광수를 총애했다. 『한일관계사료』 편찬 과정에서 두 사람은 사상과 철학을 공유하면서 친밀해졌다. 한편 이광수는 자신을 믿어 주는 내무총장이 든든했다. ‘이분은 나의 주군이다. 권한위임이 분명한 위엄을 갖고 있다. 이분을 믿고 가자.’
안창호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럼, 조만간 사료편찬위원회를 설립합시다. 발간은 통합내각으로 개편되기 전 9월까지는 어떻게든 사료집 발간을 서둘러 봅시다. 일단 내무총장 이름으로 설립합시다. 내가 힘껏 지원하겠소이다.”
7월 10일 연통제 발표가 있던 날, 의정원 회의에서는 7월 2일부터 공식 업무로 진행했던 ‘임시사료편찬위원회 구성 및 『한일관계사료집』 편찬’에 관한 안을 제출하여 승인받았다. 다음날 11일 의정원은 ‘국제연맹제출안건작성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김병조, 오의선, 최창식, 정인과, 이춘숙을 위원으로 임명하여 정부와 협조하도록 했다. 사료집 최종 검사위원으로 김병조, 고일청, 유경환, 장붕을 지명했다. 7월 17일 안창호는 사료편찬위원회를 설립하고 총재로 선임되었다.
임시사료편찬위원회는 9월 23일 작업을 종결하였다. 83일간의 작업 끝에 4권으로 구성되어 총 739쪽에 달하는 A4판 인쇄본 『한일관계사료집』 100질이 발행되었다. (이 저서는 2023년 현재 미국 콜롬비아대학 극동도서관에 한 질이 보관되어 있다.)
제1권은 고대부터 경술국치까지 일본의 한국 침략 사실을 편년체로 엮었다.
제2권은 7개의 논설로 구성하여 한국민족과 일본 민족은 역사적으로 전통문화와 언어, 생활풍습 등이 달라서 지배나 동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예증했다.
제3권은 경술국치부터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기까지 8장에 걸쳐 일본 식민통치의 실상과 성격을 파헤쳤다.
제4권은 3.1운동에서 임시정부 수립 과정을 8개 장으로 나누어 종합 기술하였다.
임시정부는 8월 21일 기관지 『독립』도 창간했다. 이광수에게 사장과 주필을 맡겼다. 그리고 신문사 일꾼 선정도 이광수에게 권한을 위임했다. 안창호는 임시정부 기관지를 통해 정부 상황을 알리면서 여론을 수렴하고 해답을 찾고 싶었다. 이 신문은 9월 25일 발행 22호부터 대한제국 시절 서재필이 발행했던 『독립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했다.
안창호는 신문이나 기관잡지의 발행을 누구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일찍이 서재필이 발행한 독립협회의 기관지 『독립신문』을 통해서 서구의 근대사상을 접하고 대중계몽 ‧ 여론 형성 ‧ 민주제도 등을 알게 되었으며, 공립협회 때는 『공립신보』, 신민회 때는 『대한매일신보』, 시베리아에서는 『정교보』, 『대동공보』, 미주국민회는 『신한민보』 등을 통해 그 위력을 실감한 터였다.
이광수가 『독립신문』 발간에 큰 관심을 보인 바 있어 안창호는 측근을 동원해서 그를 돕게 했다. 차리석과 이유필을 통해 『독립신문』 발간을 돕게 했다. 이유필은 김석황, 최명우, 홍이관 등과 신문 창간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했다. 안창호의 측근들이 많이 후원했다. 이광수는 창간사에서 안창호의 꿈이 담긴 『독립신문』의 5대 사명을 밝혔다. 첫째, 사상 고취와 민심 통일. 둘째, 우리의 사정과 사상을 우리의 입으로 말하기. 셋째, 여론을 환기해 정부를 독려하고, 국민의 사상과 행동 방향 지도. 넷째, 신사상 소개. 다섯째, 국사(國史)와 국민성을 고취하고 겸해서 신사상을 섭취해 개조 혹은 부활한 민족으로서 부활한 신국민에 이르도록 노력함.
이광수는 『독립신문』 편집국장에 19세 주요한을 임명하고, 신문제작은 조동호, 김여제 등에게 맡겼다. 조동호는 성경책에서 한글 자음 모음을 오려내서 한글판 식자를 만들었다. 이 무렵 김산이 이광수에 발탁되어 식자공으로 보조하기도 했다. 창간 당시 필진은 옥관빈, 박현환, 최근우, 고진호, 차관호, 백성욱, 김득형, 김차룡, 나재민, 유병기, 장만호 등이다. 『독립신문』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자기의 글과 철학을 신문에 실어 널리 알릴 수 있는 소통의 역할도 했다. 『독립신문』은 소식지의 기능뿐만 아니라, 국내외 한인들을 연결해 하나로 단결하게 하고 독립에 대한 꿈과 희망을 나누고 전파하는 역할을 했다. 『독립신문』은 연통제실시와 더불어 거점지역에 활용되었으며, 안동교통국 이륭양행을 통해 부산 교통국 백산상회까지 널리 전달되었다. 이를 알게 된 조선총독부는 상해 주재 일본총영사관을 통해 프랑스 조계 당국에 『독립신문』 폐간 조치를 하도록 압박했다. 그리고 이광수와 필진을 상대로 회유와 겁박을 끊임없이 가했다.
이에 시달리던 이광수는 설상가상으로 경영난에 봉착하게 되자 건강상태가 나빠졌다. 폐의 지병이 도진 것이다. 1921년 2월 이광수는 허영숙을 데리고 나타나 안창호에게 폭탄선언을 했다. 허영숙과 귀국해서 활동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허영숙은 서대문에 산부인과 병원, 영혜의원을 개업했다고 했다. 허영숙은 동경 유학 시절부터 이광수를 간호해 온 연인이었다. 처음에 안창호는 이를 강하게 만류했으나 이광수의 귀국 의지를 꺾지는 못했다. 게다가 이광수가 아꼈던 인물, 다작의 훌륭한 시를 써낸 글 재주꾼 주요한도 편집 활동을 하다가 상해 후장대학 공업화학과에 입학하게 되어 1년 만에 신문사를 떠났다.
안창호는 사람의 일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평소 몸이 약했던 이광수가 『한일관계사료집 4권』 발행 작업에다가 『독립신문』 발간과 집필활동까지 도맡아 하느라 건강이 나빠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안창호로서는 그의 몸이 하루속히 회복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다행히 이광수를 간호해 줄 수 있는 의사 허영숙이 연인으로서 귀국 길에 동행한다니 안창호는 마음 한구석이 놓였다.
『독립신문』은 1921년 5월 31일 자 109호를 끝으로 종간위기를 맞는다. 안창호의 실망과 고뇌가 교차하던 때, 서간도 대한독립청년단연합회를 지도하던 김승학이 군자금을 확보하여 무기를 구매하려고 상해에 왔다가 안창호를 만나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안창호는 독립신문사를 인수하도록 김승학을 설득했다. 김승학은 독립신문사 인수 절차를 밟았다. 안창호와 김승학은 프랑스 조계 영사관을 찾아가서 협상을 시도했다.
일본영사의 압박을 받던 프랑스 조계 당국은 안창호에게 독립신문사와 인쇄소가 한국인 소유가 아니라면 묵인하겠다고 했다. 마침 다행히도 김승학은 1912년 봉천성의 사관학교 강무당(講武堂)에 32세 나이로 입학하면서 김탁(金鐸)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입적(入籍)한 터였다. 그러나 프랑스 당국은 독립신문사 소유권 문제가 해결되자 이번에는 다른 조건을 걸었다.
그 내용은 첫째, 인쇄소 기구는 중국인에게 인수하고, 프랑스 조계 내에는 두지 말 것. 둘째, 독립신문 발행소는 다른 지방으로 신문지 상에 명기할 것. 셋째, 혹 신문사를 비밀리에 프랑스 조계지에 설치할 경우 그 장소를 프랑스 공무국에 보고할 것. 넷째, 프랑스 공무국의 통지가 있을 때는 24시간 이내에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여 일본에 발견되지 않게 할 것. 다섯째, 신문사나 인쇄소의 비밀 장소는 다수의 한인이 알지 못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말하자면, 프랑스 조계지 안에 독립신문사를 두되 발간 장소는 다른 곳인 것처럼 위장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안창호는 협상 끝에 이러한 조건을 수용하고 김승학을 통해 독립신문사를 복원했다.
새로 조직된 독립신문사는 사장 김승학, 주필 박은식, 편집국장 차리석, 기자 조동호, 김문세, 박영, 이윤세, 인쇄소 책임자 고준택으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해서 1921년 5월 31일 자 109호를 끝으로 중단되었던 『독립신문』은 1921년 8월 15일 자로 두 달 보름 만에 복간되었다. 재발행된 『독립신문』은 신문 좌측 상단에 발행지를 ‘중국 남경(Published in NanJing, China)’으로 표기했다. 프랑스 당국과의 약속을 이행한 것이다. 복간 호에서 ‘사고(事故)로 인해 본보의 간행이 지연돼 묵은 기사가 많으니 애독자들은 량서(諒恕) 하심을 희망함’이라는 ‘사고(謝告)’도 냈다. 『독립신문』은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던 의열단원 최경학의 사형 판결 기사를 실으면서, 고등법원을 ‘경성의 적(敵)’으로 명기, 조선총독부는 적(敵) 총독부, 일본 경찰은 적경(敵警) 등으로 표현하여 독자들의 분한 마음을 대신하기도 했다.
이렇게 『독립신문』이 발간되자 당황한 일제는 또다시 방해 공작에 나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1922년 7월 중순 중국어판 『獨立新聞』까지 발행했다. 1921년 5월에 발족한 한중 지식인 연대 한중호조사 활동이 활발한 가운데 중국어판 『獨立新聞』이 창간된 것이다. 이 중국어판 창간호에서는 “우리의 광복 전쟁의 진상을 우리의 친애하는 4억 동지에게 소개할 길이 열리며…”라는 말과 함께 중국과 항일 연대 수단으로 발행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1500~2000부 정도 찍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독립신문』은 상해와 만주는 물론 미주와 국내로도 보내졌다. 그러나 독립신문사는 만성적인 경영난에 시달렸다. 게다가 프랑스 영사관의 연락이 오면, 신문사의 모든 집기와 사무용품 등의 짐을 꾸려서 빈집으로 대피해야만 했다.
김승학의 회고에 의하면 신문사는 창간 이래 폐간 직전까지 스물여덟 번이나 이전했다. 그때마다 마차 두 량과 인력거 이십여 채가 동원되었다고 한다. 독립신문은 한 주에 세 번씩 발행하다가 1924년부터는 사실상 월간지 형태로 바뀌었고, 1925년 9월 25일 일제의 탄압과 자금난으로 인해 결국 제189호를 끝으로 폐간되고 만다.
(5장 마침. 6장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