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나는 여러분을 섬기러 왔소 #9/10

9화. 연통제 실시 및 대한적십자회 재건

by 은명

9화. 연통제 실시 및 대한적십자회 재건


제5회 의정원 회의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내무총장 안창호는 임시정부 산하에 연통부를 설치하고 1919년 7월 10일 국무원령 제1호로 <임시연통제>를 공포하였다. 또한, 국민 조사와 관련해 독립사업 현황, 애국금 납부 실태, 독립운동에 관한 민심의 동향 등을 파악하여 매 5일 마다 정부에 보고하도록 했다. 연통제 발표가 있던 날, 미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임시정부와 통합을 결의했다.

연통제 확립은 법령 ‧ 공문 등의 전달체계 확립, 유사시 군인 ‧ 군속의 징모, 군수품 징발과 수송에 관한 업무, 시위운동 계획, 애국금 납부, 공채발매, 통신 연락, 정보 수집 등을 긴밀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해 일사불란하고 유기적인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함이다. <임시연통제>에 따르면 국내 13도에 감독부를 설치하고, 국무총리가 임명하는 감독 1인과 부감독 1인, 감독이 임명하는 서기 3인과 재무 3인으로 조직이 구성된다. 또 12개 시와 215군에는 총감부를 설치하고, 내무총장이 총감 1인과 부감 1인을 임명한다. 각 면에는 사감부를 설치하여 감독이 임명하는 사감과 서기, 재무 각 1인을 책임자로 두게 했다. 또 연통제 운영기반으로 교통부 산하 교통국 설치령도 공포되었다. 교통국은 안동지부 교통사무국을 가장 먼저 설치했다. 이후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 경인 지방, 만주 등 5개 지역에 교통국을 설치하였다.

연통제는 황해도, 평안남북도, 함경남북도에서는 별 탈 없이 잘 실시되었다. 경기도와 충청남북도에서는 파주와 개성 등 일부 지방만 실시되었다. 그러나 강원도, 경상남북도, 전라남북도의 경우에는 실시가 거의 불가능했다. 서울에서 11월 30일 연통제 임시총감부가 설치되었다. 서북간도와 연해주에도 안정근과 왕삼덕이 파견되어 연통제 총감부가 설치되었고, 안병찬, 구춘선, 서일, 여준, 김치보, 최재형 등과 비밀행정 연락망을 구축했다.

일본은 임시정부의 연통제 사실을 캐내고 긴장했다. 다급해진 일본은 곳곳에 밀정을 풀었다. 1919년 7월 평안남도 특파원 유기준이 일경에 잡혔다가 탈주했고, 12월 함경북도 조직이 일경에 들통나서 47명이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실형을 받았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에 대서 특필되었다. 1919년 12월 31일, 평북 창성군에서 통신원이 체포되었다. 뒤이어 대한청년단연합회 고문이자 평안북도 감독 안병찬(1854~1921)이 안동교통국 지부를 설치하려다가 1920년 5월 3일 체포되었다. 같은 해 6월 7일 평북 감독부 소속 교통국 특파원 권창훈이, 7월 24일에는 의주군 통신원 양승업이 체포되었다. 1920년 9월에는 회령 연통제가 탄로 났다. 연통제는 1921년 후반까지 일부 지역에서 활동의 정점을 이루다가 위기에 몰린다.


7월 초, 내무총장 안창호는 외무차장 여운형을 집무실로 불렀다. 대한적십자회 재건에 시동을 건 것이다. 이는 국제사회에 한국의 존재를 알리는 중대한 외교 사안이었다. 여운형은 도산이 취임하기 전에 했던 말을 기억했다. 안창호는 제국 군대해산 당시 남대문 시가전에서 ‘전쟁 준비란 평화구현 체계를 갖추는 것도 포함한다. 적십자구호 체계는 곧 평화구현 체계다.’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이번 임시정부의 대한적십자회 재건과 국제적십자연맹 재가입은 구체적인 외교 독립운동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여운형이 자료를 들고 들어왔다. “내무총장 각하, 증거 기록을 찾았습니다.”

“오, 역시 뜻이 있으면 길이 있구려. 『제국신문』 과거 자료를 중국에서 볼 수 있다니 놀랍소. 역시 신문은 위대한 역사 기록물이오.” 안창호는 역사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했다.

여운형은 자신이 근무했던 미국 서점인 협화서국 자료관에서 대한제국이 국제적십자사에 가입했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제국신문』 1904년 12월 21일 자 기사에 실린 내용이었다.

안창호는 건네받은 기사를 읽었다. ‘1898년 스페인 적십자사가 대한제국에 의료시설 관련 자료를 요청했다. 대한제국은 1903년 7월 파리공사 민영찬을 적십자위원으로 임명하여 1904년 12월 21일 국제적십자사에 가입했다. 이어 1905년에 대한적십자병원과 대한적십자사가 창설되었다.’ ‘일제는 1909년 7월 21일 자로 대한적십자사를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로 개칭, 흡수했다.’ 안창호의 눈이 빛났다.

여운형이 안창호의 눈빛을 살피고는 말했다. “각하, 임시정부도 신문발행 준비를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발이 달린 신문이 세계로 달려가려면 영자신문 발행도 구상해야 할 듯합니다.”

안창호가 고개를 들어 여운형을 쳐다봤다. “바로 그것이오. 언론의 힘. 외교전에 있어 으뜸 무기는 바로 언론이오!”

여운형이 말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제국신문』은 일본 간섭에 많은 필화사건을 겪으며 복간 폐간을 반복하다가 결국 전향했습니다. 한일병합 직전에 물리적 외압으로 종간되었지요.”

안창호가 신문을 낱낱이 훑어보며 말했다. “ 『제국신문』 주필이 이승만이었소?”

여운형이 대답했다. “네. 『제국신문』 역사도 우여곡절이 많습니다. 배재학당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협회 기관지 역할을 하나 싶었는데, 1904년 10월에 정간되더니 1907년 5월에 정운복이 사장이 되면서 복간됩니다. 기호계에서 관서계로 전환된 것이지요.”

“정운복이라 했소? 친일파 밀정....” 안창호가 중얼거렸다.

“그렇습니다. 정운복 주필은 ‘한국은 일본의 도움이 없으면 서양 강국에 점령될 것이니 일본의 동정을 구해야 한다.’라는 취지의 논설을 쓰고 여론의 뭇매를 맞았습니다. 그 양반도 독립협회 시기 영국 유학을 한 사람인데, 친일 개화파로 통감부의 인정을 받고 『제국신문』을 인수했던 겁니다. 『대한매일신보』와 쌍벽을 이뤘죠.”

안창호는 신민회 활동 당시 이갑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를 만나, 서북학회가 발전하도록 협력하자는 제안을 받고 당황했던 때의 일이 떠올랐다. ‘정운복은 엘리트 밀정이다.’

안창호가 말했다. “초지일관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요. 우리도 임시정부 기관지를 속히 발행해야 하는데.... 참, 그 일을 이광수가 하고 싶다고 했소. 한일관계 사료집 작업이 마무리되어 가는 대로 추진해 보라고 했다오.”

여운형은 감탄했다. 안창호는 내무총장 업무 추진에 있어 빈틈이 없었다.


며칠 후, 여운형은 안정근을 숙소로 찾아가서 만나고 적십자사 재건을 협의했다.

여운형이 안정근에게 말했다. “형님, 내무총장 각하는 대한적십자 재건을 3.1만세운동과 나란히 세계 평화운동의 한 기둥으로 생각하고 계시오. 외교에 평화가 빠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적십자구호는 세계 평화운동이요, 동양평화는 안중근 형님의 꿈이라고도 하셨소.”

안정근이 말했다. “그렇소. 연해주에선가? 도산께서 말씀해주셨지. 중근 형님의 의열 투쟁은 곧 평화투쟁이라면서 동양평화를 깬 일본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도산께서는 평화는 절대로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정의 구현의 쓰라린 노력이 수반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

여운형이 말했다. “도산 각하는 적십자재건을 정근 형님께 맡기자고도 하셨습니다.”

안정근은 안창호의 깊은 속뜻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도산 각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서재필 명예총재를 앞세워 대한적십자회를 통합정부의 이름으로 확대 구성하고, 국제적십자연맹에 가입하는 절차를 구상하실 거요.”

여운형이 안정근의 말을 이었다. “의학박사 이희경을 회장으로 앞세우되, 정근 형님이 부회장을 맡아 실무를 끌고 가기를 원하십니다. 회장 이희경의 학력과 자격은 국제적십자사 가입 조건에 부합된다면서. 하지만 평화를 향한 꿈과 정의 구현은 안정근의 몫이라고 하셨지요.”

“도산 각하는 주먹구구식으로 사람을 일에 그냥 쓰는 법이 없으시지. 자격, 인격, 지위, 품위 등 사람을 쓸 때 어쩜 그리도 판단이 뛰어나신지...! 합리적인 명령이라면 절대로 거역할 수 없으니 말이오, 하하.” 안정근이 말했다.


여운형과 안정근은 기획팀을 구성하고 회의를 열었다. 적십자사 재건을 7월 13일 안창호 내무총장 명의로 공포하되, 우선 활동 실적으로 교민단에서 주관하는 간호사양성 과정을 시범 운영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회의 자리에 김순애, 안정근, 이춘숙, 김병조, 김성겸, 김태연, 김홍서, 정인과 그리고 안창호의 특별 초청으로 유상규가 참석했다. 이희경을 안창호에게 소개한 김창세는 미국 유학 예정이라 일에서 제외되었다.

이들은 임시정부에서 각자 역할이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안창호의 뜻에 모두 동의하고, 대한적십자회 설립이 갖는 외교적 의미를 되새기며 제1회 간호사양성과정 모집과 운영에 관해 토론을 벌였다.

내무총장 안창호는 7월 13일 제5차 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여 이 사실을 알리고 정부의 공식 단체로 승인을 받았다. 안창호가 공표한 대한적십자회 초기 임원은 회장 이희경, 부회장 김성겸, 이사에 여운형이었다.

대한적십자회는 9월 11일 통합임시정부 이후에 체계적으로 조직을 확대하였다. 명예총재로 서재필 박사를 위촉했다. 고문에는 이승만 대통령, 이동휘 국무총리, 안창호 노동총판, 문창범 교통총장을 위촉했다. 회장 이희경, 부회장 안정근, 이사장 서병호, 서기 김태연, 재무부장 고일청, 감사 옥성빈과 김순애. 상임위원회는 장건상, 이광수, 여운형, 정인과, 강태동, 김한, 이춘숙, 김철, 원세훈, 현순, 오의선, 손정도, 김병조, 김홍서, 이화숙, 김보연, 이기룡 등이었다.

1919년 11월 15일, 안창호와 이희경 등 79명의 대한적십자회 대표들은 대한적십자회가 일본적십자회와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선언했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선언이며 동시에 독립국 지위 획득을 위한 공표였다.

국제적십자연맹(ICRC)은 제네바협약에 가입된 독립된 주권 국가에만 가입을 승인하고 있었다. 따라서 대한적십자회는 국제적십자연맹에 가입하여 상해임시정부가 독립 국가인 대한민국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했다.

1921년 1월. 임시정부는 파리위원부 이관용을 대표로 임명하였다. 이관용은 국제적십자총회에 참석하여 대한민국의 독립을 청원함과 동시에 일본적십자사에 항의서를 제출하라는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고 이를 실행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 상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꾸준한 선전 활동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방해 공작으로 인해 국제적십자연맹 가입은 실현되지 않았다.


안창호는 통합임시정부 노동총판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간호사와 군의관 양성에 주력했다. 독립전쟁 준비를 위해서였다. 안창호는 의학도들을 특별히 아끼고 격려했다. 임시정부 대한적십자회는 구제 활동도 전개했다. 기독교 선교단체와 협조하여 민족이 처한 참상을 알리면서, 의연금과 구제물자를 국제적으로 지원받는데 목표를 두고 활약했다. 대한애국부인회와 미주 흥사단 그리고 국민회가 이 일에 앞장섰다. 또한, 특파원을 보내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도 지부를 만들었다. 미국의 미주지부, 하와이지부, 그리고 러시아 우수리스크지부 등이 조직됐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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