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내무총장 취임
1919년 6월 16일. 안창호는 아침상을 물리고 창가 테이블에 단정하게 앉았다. 정한경이 잡지 『아시아』에 ‘위임통치와 자치제 제의’ 관련 글을 실어 상해 교민사회가 발칵 뒤집혔다는 소식을 듣고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이제 정부가 해야 할 일들은 하나둘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일은 젊은 동지들과 함께 추진해 나가면 된다. 뜻밖에도 일을 중심에 놓고 보니 좋은 청년들이 많이 있다. 장차 흥사단 운동을 임시정부 사업 추진과 동시에 하자.’ 안창호는 마음이 설렜다.
취임식 3일 전, 6월 25일. 상해 교민단 주최로 취임 축하를 위한 사전 회합을 개최하였다. 선우혁과 서병호가 마당로 보경리 4호 교민단 근처 큰 식당에 자리를 마련했다. 안정근, 장붕, 이유필, 여운형, 신석우, 진희창, 김철, 신익희, 이춘숙, 조동호, 조상섭, 김병조, 윤현진, 남형우, 신채호, 손정도, 김승학, 최창식, 한진교, 현순 등이 참석했다. 모두 반가운 얼굴들이었다. 대부분 “도산이 어려운 결단을 내리셨소. 고맙소.” 하는 분위기였다.
진희창이 진지하게 말문을 열었다. “예사로운 일은 아니오. 도산을 내무총장으로 뽑는 자리에 나도 있었소만, 도산이 취임하게 되면 이승만 대리역할까지 최고 영수가 되는 것 아니겠소? 그렇다고 일을 모두 도산께 떠넘기자는 것은 아니오.”
안창호가 말을 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임시정부 분열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저의 임무는 통합내각 구성입니다. 지금은 이승만 총리가 움직이지 않고 있지만, 그분을 어떻게든 잘 설득해서 단일정부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6부가 기능하는 유기체로 정부를 수립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 각자의 솔직한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신채호가 망설임 없이 입을 열었다. “이승만은 안됩니다. 본인이 위임통치 외교를 펼쳤음에도 상해에서 최고 수반으로 뽑혔다면, 냉큼 상해로 와서 자초지종을 말하고 변명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워싱턴에서 대통령 행세를 한다니, 이는 위법이오. 우리를 무시하는 전제군주의 태도요, 독립 의지가 도무지 없는 사람이오.”
안창호는 신채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다. 단재 말이 맞다. 그러나 어떻게든 화합을 모색해야 한다.’ 안창호는 이승만에게 ‘대통령 직함 사용은 위법’이라고 전보를 보낼 생각이었다.
손정도가 다소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런 공변된 자리가 좀 더 일찍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이요. 시간을 너무 낭비했어요.”
여운형도 조심스럽게 발언했다. “지금이라도 이런 자리가 마련된 것은 다행입니다. 도산께서 취임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속 이야기를 마땅히 털어놓아야지요. 처음에는 정당조직이 먼저냐 정부조직이 먼저냐 하는 문제가 가장 컸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위임통치냐 자치제냐 하는 문제로 매우 혼란합니다. 저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전략적 판단으로 치부하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파리에 가 있는 김규식 총장의 입장이 매우 난처하다고 전해 옵니다.”
김철이 3.1운동 때 일본감시를 경계하며 국내를 넘나들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 일본은 국제사회에서 신용을 잃은 것 같습니다. 미국과 러시아가 일본이 강해지는 것을 견제하고 있고 영국과 프랑스도 전에 없이 일본을 경계한답니다. 이러한 사정을 놓고 일본 내 여론도 예전 같지 않은가 봅니다. 바로 이때가 독립전쟁을 해 볼 만한 기회입니다. 만주에서는 기회를 놓치지 말자고 합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안정근이 나섰다. “이럴 때 잘못하면 역으로 우리가 일본 이간책에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단일정부의 명령으로 만주 무장부대에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문제는 만주에 있는 우리 군이 일본군과 소비에트 군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춘숙이 안정근의 발언에 힘을 실었다. “독립전쟁은 만주 독립군의 통일된 지휘가 필요하고 후방에서는 무력활동으로 적에게 혼란을 줄 수 있겠죠.”
김승학이 이 말을 받았다. “서간도 전선에 있는 오동진, 이탁과도 이춘숙 동지와 비슷한 생각을 자주 토론했습니다. 어쨌든 지금으로써는 군 지휘 체계를 임시정부 명령 체계 아래에 두도록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이유필이 말했다. “전방을 지원하려면 후방의 국민은 병력 동원체계를 갖추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인구조사와 노병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우혁이 이유필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말했다. “이유필 동지의 노병제 제안을 들으니 신속한 연락체계가 필요할 듯합니다. 연통제. 연통제를 두려면 행정체계로 정부에 교통국을 설치할 필요가 있지요.”
이유필이 덧붙였다. “선전국 설치와 선전원 파견도 중요합니다.”
남형우가 신중하게 말했다. “이 모든 일을 추진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은 정부 재정인데, 재정확보를 위한 설계가 매우 중요한 듯합니다.”
윤현진이 남형우의 발언을 이었다. “재정은 국민으로부터 확보해야 하는데 현재 해외 국민은 호적이나 신원조차 파악되지 않았고, 국내는 사정이 어렵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핵심적인 문제를 남형우와 윤현진이 들고 나왔다. 안창호가 가장 듣고 싶은 사항이었다. ‘어떤 생각들일까?’ 안창호는 입을 다문 채 경청 자세를 그대로 유지했다.
한진교가 대신 입을 열었다. “인구파악이 된다면 국채를 발행하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당장 실행하기는 조금 이른 듯하고, 우선 재외동포들은 1인 직업을 갖거나 가게라도 개업해서 돈을 모아야 합니다. 희사금이나 의연금은 지속성이 없는 것 아닙니까? 개인이 돈을 벌 수 있어야 합니다.”
조상섭 목사가 거들었다. “각 처에 한인 자치기구를 통해서 단체나 조직별로 임시정부에 납세를 유도해야 합니다. 민간 부문에서 경제협동조합 같은 모델을 만들면 어떨까요?”
경청하던 손정도가 결론을 내듯이 말했다. “그러려면 역시 단일정부, 통일 정부가 필요하군요.”
진희창이 안창호를 향해 물었다. “앞으로 큰일을 수행해나가실 도산의 생각을 듣고 싶군요.”
안창호가 결론 삼아 발언했다.
“여러분이 저를 믿어 주시니 제가 힘이 닿는 한 열심히 일해 보겠습니다. 오늘 여러분의 기탄없는 의견들을 잘 종합하여 미력을 다하겠습니다. 살아서 독립의 영광을 본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죽어서 독립의 거름이 되라 하면 저는 기꺼이 거름이 되겠습니다. 저를 믿어 주시고 밀어주시기 바랍니다. 참배 나무에는 참배가 열리고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리듯 우리가 반드시 독립국의 열매를 맺어 후손에게 돌려줍시다. 3일 후 취임식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자리가 끝난 후 안창호는 신채호와 마주했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안창호가 입을 열었다. “오늘에야 그대를 마주하오. 그동안 내가 얼마나 그대를 그리워했는지 아오?”
신채호도 입을 열었다. “나도 그랬습니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서로 다른 인연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나는 도산 형님을 믿고, 형님은 나를 믿고. 의정원에서 정부를 수립할 때 형님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그만큼 형님의 행보를 인정한 것이니 나도 기쁘더이다.”
안창호가 말했다. “그대는 소중한 사람이오. 후학들도 그대를 본받아 무실역행하면 좋겠소. 박용만 동지는 잘 있소? 상해는 발걸음을 안 한 듯하니....”
신채호가 말했다. “이승만에 대한 상처가 깊습니다. 한성도 상해도 모두 이승만을 추대하니 임시정부를 거부하는 것이겠지요.”
안창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고뇌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아우님께 한 가지 물어보고 싶소. 용서가 그렇게 어려운 일이오? 상처 말이오.”
신채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안창호를 쳐다보았다. “형님의 깊은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대의를 저버리고 용서할 수는 없지요. 우리가 일본을 용서할 수 있습니까? 같은 맥락입니다. 용서할 수 없으니 같이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안창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실은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나는 대의를 위해서 서로 화합하자는 것이지 다른 뜻은 없소. 화합의 길은 먼저 손을 내미는 것. 내민 손을 상대방이 마주 잡지 않는다면, 그건 적어도 내 탓은 아니지. 예수도 제자들을 파견할 때 그랬소. ‘가서 평화를 빌어라. 만일 거절당하면 그 자리에서 신발의 먼지를 털어라. 그 평화와 복은 자신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신채호가 고집스럽게 강조했다. “형님, 역사는 정직합니다. 힘의 논리로 가기 마련이죠. 적어도 지도자는 원칙이 서야 합니다. 독립운동에서 우리가 구하려는 것은, 우리의 자주적인 힘으로 나라를 되찾고 건설하자는 것. 위임통치는 아닙니다.”
안창호는 더 이상 신채호를 설득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승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승만을 지지하는 동포들과 단결하자는... 이를테면 고독한 외침 같은 거요.”
“형님의 깊은 뜻을 이해는 하지만, 잘못하면 형님도 책임 공방을 놓고 궁지에 몰릴 것입니다.” 신채호는 결연했다.
안창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 사랑이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가? 사랑은 내 욕망대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공부해야 한다. 사랑 수련. 정의돈수. 애기애타. 수기치인. 예수님도, 공자님도 같은 말을 했다. 내가 만일 이승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무총장 취임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1919년 6월 28일, 도산 안창호는 41세의 나이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로 취임했다. 안창호는 북경로 예배당에서 취임연설을 했다.
“어떠한 어려움도 피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큰일에나 작은 일에나 서로 속이지 않기를 결심합시다. 속이는 것은 불신과 분열을 낳기 때문입니다. 나랏일은 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국민이 함께해야 성공하는 것이니, 우리의 독립운동은 하늘이 도우며 세계가 인정하는 바요, 우리는 반드시 성공해서 나라를 되찾읍시다. 우리가 되찾은 땅에 신공화국을 건설하는 날이 동양평화가 견고해지는 날이요, 동양평화는 곧 세계평화입니다. 우리 반드시 단결하여 성공을 이룹시다.”
안창호는 임시정부 청사를 정비했다. 황진남을 시켜 하비로 청사에 밀린 셋돈을 냈다. 전재순 지휘하에 교민단 청년들이 솔선수범하여 대청소를 하고 필요한 가구와 사무집기를 장만하고 건물 측면에 대형 태극기를 걸었다. 1층과 2층의 모든 방에 각 부서의 팻말을 붙였다.
안창호는 청사 건물 정비가 끝난 뒤 7월 1일부터 정식으로 출근했다. 출근 첫날 안창호는 그동안 수고해 온 국무원과 상견례를 했다. 현순, 신익희, 윤현진, 김철, 이광수, 선우혁, 최창식, 이춘숙, 여운형 등과 일일이 손을 잡고 인사하고 위로했다. 현순이 내무총장과 함께 임시정부를 끌고 갈 차장급 국무원 인사 조율안을 내놓았다. 내무 현순, 외무 여운형, 재무 윤현진, 법무 신익희, 군무 이춘숙, 교통 김철, 국무원비서장 최창식. 안창호는 속으로 이광수와 선우혁의 사임을 지혜로운 처신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임시정부 밖에서 할 일이 따로 있었다.
신익희(1894~1956)는 경기도 광주 출신이며 부친이 판서를 지냈다. 와세다 정경학부를 나와 보성법대 교수로 재직했고 행정에도 밝았다. 안창호는 그를 법무와 내무의 일꾼으로 점찍고 있었다.
윤현진(1892~1921)은 양산 출신이며 조부는 만석꾼으로 이름났고, 부친이 동래 부사를 지냈다. 윤현진은 메이지 대학을 나왔다. 재무행정에 밝아서 노령임시정부에서 탁지부(재무) 총장으로 발탁되었다. 윤현진은 영남 인맥과 가교역할을 할 수 있다.
이춘숙(1889~1935)은 함경남도 정평군 출신이다. 보성전문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주오대학을 나왔다. 만주와 시베리아를 탐방하고 1919년 4월에 상해로 망명했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고 구국모험단에서 활동하고 있다. 여운형은 이춘숙을 군무 차장으로 추천한 바 있다.
현순은 외무 담당이었으나 그 자리에 여운형을 추천했다. 대신 본인은 내무를 맡아 기호파와 연결하면서 내무총장을 돕겠다고 자청했다. 안창호가 보기에 현순은 사람을 가리지 않으며 특별히 어느 계파에 속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맡은 일에 사명감을 가지고 임했다. 현순이 추천한 여운형은 진보적이고 세계정세를 꿰뚫고 있으며 영어 ‧ 중국어 ‧ 러시아어까지 가능한 외교통으로, 외무 차장에 적임자였다. 현순은 또 최창식을 국무원 비서로 추천했다.
최창식(1892~1957)은 서울 출신으로 1918년 오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민족교육을 하다가 금고 1년 형을 선고받았다.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현순, 선우혁과 교류하였다.
김철(1886~1934)은 전남 함평 출신이다. 일본 메이지 대학 출신으로, 일제가 식민통치에 협력을 강요하자 1917년 11월 상해로 망명하여 한진교가 운영하던 해송양행 약제상으로 활동했다. 해송양행은 독립운동의 거점장소로 연락처나 다름없었다. 김철은 1918년 신한청년당 창립에 참여했고 1919년 3.1운동 기획에도 참여하여 국내 만세운동 조직에 헌신했다. 상해 독립 임시사무처에서 선우혁과 같이 재무를 담당했다.
안창호는 이들을 모두 승인했다. 내무 업무는 현순이 당분간 계속하고, 외무 여운형, 재무 윤현진, 법무 신익희, 군무 이춘숙, 교통 김철 그리고 내각 서기관장 겸 국무원 비서장으로 최창식을 결정했다. 안창호는 신익희를 차후의 내무총장 감이라고 생각했다. 법에 밝고 예지와 통찰을 두루 갖추었다. 무엇보다도 호감형이고 계파를 초월할 수 있는 정치적인 인물로 적임이라고 생각되었다. 안창호는 장차 정부통합과정에서 신익희를 앞세울 계획이었다.
안창호는 내무총장실을 따로 두지 않았다. 소통을 위해서 내무부실 안에 책상을 따로 배치했을 뿐이다. 직원들은 안창호에게 2층 국무총리실을 사용하시라고 간곡히 청했지만, 안창호는 오히려 ‘나를 격리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그 대신 후면에 있는 접빈실을 같이 이용하기로 했다.
그날 오후. 안창호는 신익희와 김철을 접빈실로 불렀다. “바쁘지요? 임시정부 업무 방략에 대해 같이 의논해 봅시다.”
신익희는 활짝 웃으며 수첩을 꺼냈다. “예, 지난번 약속대로 임시정부에서 우선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오, 대단하시오. 같이 검토해 봅시다.” 안창호가 흡족한 표정으로 자신의 수첩을 꺼내 메모 자세를 취했다.
신익희는 그런 도산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놀랐다. ‘겸손하신 분이다. 계획을 다 세우고 계시면서도 티를 내지 않으신다.’ 신익희는 도산의 인격에 정감이 갔다.
신익희가 울림 있는 중저음으로 말을 시작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상해 정부와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국내 비밀행정조직 체계를 갖추는 일입니다. 임시정부 재원 마련이 시급한데, 이를 위한 인구조사, 납세, 공채발매 등의 업무를 위해서는 상해와 국내를 연결하는 연통제가 필요합니다. 연통부를 정부 산하에 설치해야 합니다.”
안창호가 김철에게 물었다. “3.1운동 때 국내 시위를 조직하느라 고생 많이 하셨다고 들었소. 참, 우리나라 행정 관제는 현재 어떻게 되오?”
“13도 12부(시) 215군으로 알고 있습니다.” 김철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 연통제를 실시하려면 임시정부 내에 연통부를 두고, 국내 13도 12부 215군에 조직을 하도록 행정명령을 내려야겠군요. 교통국 설치도 시급하고. 일은 사람이 한다...! 연통제 관리를 위해 각 도에서 사람부터 찾아야겠군요.” 안창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안창호는 문득 신민회 조직체계를 떠올렸다. ‘비밀결사. 지금은 외교적으로 합법 정부를 공표하긴 했으나, 여전히 일본 총독 지배하에 있으니 비밀행정 조직일 수밖에 없다.’
“말을 끊어서 미안합니다. 신 동지, 계속하세요. 참, 13도 영수들을 ‘독판’이라 칭하지 말고 ‘감독’이라고 칭합시다.”
신익희는 순간 안창호의 표정을 살폈다. ‘꼼꼼하신 분이다.’
“네, 독판은 구시대 관제용어이니 앞으로는 감독이라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독립전쟁에 필요한 군사력 확보와 군수통치권 문제입니다. 현재 널리 흩어져 있는 무장 독립군을 정부가 어떻게 통솔할 수 있는가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또, 군사력 증강을 위해서도 인구조사가 필요합니다. 인구조사를 통해 전시 동원체계를 갖추어야 합니다. 정부는 동원 명령체계를 갖춰야 힘이 실린다고 봅니다.”
안창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계속하세요.”
신익희의 계획은 차분하고 논리정연했다. “세 번째 핵심은 상해정부의 명령 전달체계를 갖추는 일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의 특수상황에 따른 정책 수립이지요. 각 처에 교통국을 설치하고, 교통부의 행정명령을 수행하는 체제를 확립해야 합니다. 다행히도 여기 국무원 김철 차장 주관으로 지난 5월, 의정원 4차 회의에서 교통부 산하 교통국 설치 및 운영을 의결했습니다. 아직 업무 체계를 세우지는 않았습니다. 압록강을 오고 가는데 이륭양행 사장 아일랜드인 쇼가 도와주고 있습니다.”
“들불처럼 일어난 3.1운동 사전 조직이 연통제 경험의 바탕이 된 셈이군요. 그때는 신한청년당 요원들이 선전원이나 특파원 역할을 했던 것이고.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었다지요. 앞으로는 교통국을 통해서 정부 명령을 내린다.” 안창호는 잠시 눈을 감고 전국 13도와 만주, 연해주를 상상했다. ‘이륭양행 쇼에 대해서는 선우혁에게서 들은 바가 있다. 고마운 분, 민족의 은인이다.’
신익희가 계속했다. “네 번째는 사법제도의 확립입니다. 사법제도는 정부 기강을 바로잡고 민주제도를 확립하기 위함입니다. 지방열이나 편당을 짓는 행위, 범죄나 변절자 엄단도 해야 독립운동의 기강이 바로 서지 않겠습니까? 그밖에도 외교나 의무교육 제도 확립을 위한 청사진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기초한 내용은 이런 정도입니다.” 신익희는 명석한 브리핑을 끝냈다.
안창호는 신익희가 든든했다. 임시정부 앞날의 희망을 보는 듯했다. ‘이런 인재들이 단결한다면 전도는 밝을 것이다.’
“김철 동지, 안동교통국 문제는 따로 의논합시다. 연통제는 교통국을 활용해야 할 것이오. 그렇지 않소? 안동 말고 교통국 설치가 가능한 곳도 알고 싶소.” 안창호는 서 있는 김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네, 그렇게 하시지요.” 김철이 대답했다.
안창호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말했다. “그럼, 김 동지가 교통국 사무국에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해 주세요. 두 분 모두 훌륭합니다. 두 분께 많이 배웠소. 이제 이러한 계획들을 국무회의에서 본격적인 공론으로 다룹시다. 참, 그리고 의정원에 제출할 통합내각 구성을 위한 국무원 발의안을 신 동지가 기초해 주시겠소? 그 일도 우선 절차에 들어갑시다. 아, 한 가지 더 있소. 내가 7월 7일부터 열리는 의정원 회의에 참석하려고 하는데 신 동지가 절차를 밟아 주시겠소?”
“예, 총장 각하. 그럼 제가 의정원 회의에서 발표하실 ‘내무총장 시정방침안’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신익희는 도산 안창호가 고마웠다.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이자 최고 영수. 법과 절차를 중요하게 여기는 민주적인 지도자. 이제야 뭔가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7월 7일, 안창호는 국무총리 대리자격으로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1919.7.7.~8.5)에 참석했다. 그리고 7월 8일 의정원에서 시정방침을 발표했다. ‘연통제 실시와 교통국 설치. 만주 ‧ 시베리아 ‧ 국내로 선전원과 특파원 파견. 인구조사, 국채 발행, 인두세 징수. 구국 재정단 조직. 독립전쟁 대비 군사력 확보와 대한적십자사 설립. 인성학교 정비. 국제외교에 주력. 사료편찬위원회를 설립하고 『한일관계사료집』을 발행하여 국제연맹에 전달. 정부 기관지 발행.’ 등의 내용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