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구국모험단 창단식과 이춘숙
윤현진과 신익희가 돌아간 후, 안창호는 깔끔한 정장 차림에 중절모자를 눌러쓰고 전재순과 김복형을 병원 밖에서 만났다. 전재순(1894~1950)은 숭실학교를 졸업한 황해도 은율 사람으로, 말이 없고 과묵한 스타일이다. 당시 국내로 밀파된 선우혁을 만나 은율 3.1운동을 조직하고 상해로 망명했다. 김복형(1896~1942)은 의주 출신으로 이유필 등과 의주 3.1운동 이후 상해로 망명했다. 그는 거류민단 총무 선우혁을 통해 동지들과 교류하면서 태창중학교에서 미술 교사를 역임하고 있었다. 세 사람은 프랑스 조계 하비로행 전차를 탔다.
전재순이 입을 뗐다. “하비로 청사로 가실까요?”
“좋습니다. 사실은 거기부터 가보고 싶었다오.” 안창호가 전차 안이라 소리를 낮춰서 말했다.
김복형이 거들었다. “1915년 이전에는 보창로로 불렸답니다. 보창로가 하비로가 된 것이지요. 다들 헷갈리나 봅니다. 보창로 309호가 하비로 321호로 바뀌었습니다.”
김신부로 대로변에 있는 하비로 청사는 현순이 말한 대로 붉은 벽돌로 이루어진 2층 양옥이었다. 안창호는 마당으로 들어섰다. 넓은 마당에 잔디가 깔려있고 건물도 매우 정갈한 편이었다. 세 사람이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현순과 이광수가 달려 나왔다.
안창호는 이들과 함께 청사를 어떻게 사용하면 좋을지 구상하며 찬찬히 둘러보았다.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이 청사도 아직 세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방팔방으로 사정을 얘기하고 희사금을 모으고는 있지만, 설득이 어렵습니다. 선우혁과 김철 동지가 그 일로 사람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현순은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안창호가 현순을 위로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미주 국민회에서 모금한 애국금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우선 해결합시다.”
현순의 표정이 밝아졌다.
현순과 이광수, 선우혁, 신익희, 김철 등은 도산 안창호의 내무총장 취임절차에 들어갔다. 의정원에서는 손정도 의장이 앞장섰다. 취임식은 6월 28일 북경로 예배당에서 열기로 했다. 사실 안창호는 청사로 조용하게 부임하려고 했으나, 청년들에게는 흩어져 있는 선배들이 주목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이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안창호는 취임 전에 사적 모임을 주선해 달라고 교민단을 이끌어 가고 있는 선우혁과 손정도 의장에게 부탁했다. 이는 자신이 기획하고 있는 일들을 추진하기 위한 포석이자 설득을 위한 것이었다. 정부 주변 인사들이 각자 품고 있는 사상뿐만 아니라 불평불만, 정세 대응, 독립운동 연구, 노선 등을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자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6월 12일. 아침 밥상을 들고 임신일이 들어왔다. “선생님, 위통은 좀 어떠세요?”
안창호가 기분 좋게 대답했다. “위통은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던 가보오. 지금은 훨씬 좋아졌어요. 잠도 잘 자고.”
“네, 잠이 보약이지요. 호호호. 참, 선생님 이거 받으세요.” 임신일이 쪽지를 내밀었다.
쪽지는 장덕진이 쓴 것이었다. ‘각하, 오늘 오후에 장빈로에서 구국모험단 발대식이 있습니다. 단원들끼리 조용하게 거행하려고 합니다. 혹시 각하께서 보고 싶으시다면 모시러 오겠습니다.’
안창호는 ‘오늘이 그날이구나.’하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찾아가서 대원들을 격려해 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안창호는 임신일에게 물었다. “혹시 지금 밖에서 내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까?”
“아마 그럴 것입니다.” 임신일이 대답했다.
“저런, 그럼 이 쪽지를 전해 주겠소?”
안창호는 메모지에 급하게 ‘좋소. 이따 보고 싶소.’라고 적어 임신일에게 전했다.
오후 5시. 임신일이 들어오면서 말했다. “선생님, 그분이 모시러 오셨답니다.”
안창호는 흰색 정장 차림에 흰색 중절모를 쓰고 병원 밖에서 장덕진을 만났다. 장덕진은 흰 와이셔츠에 검은색 양복을 빼입었는데, 키가 크고 다부진 몸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이었다. 안창호는 장덕진을 보자 필립이 생각났다. '필립과 필선도 좀 더 자라면 저런 얼굴로 변할까?' 문득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두 사람은 전차 정거장을 향해 걸었다.
안창호가 물었다. “덕진 군은 고향이 어디요? 부모님은 다 계시고?”
“황해도 재령입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여동생 부부가 재령에서 농사짓고 있습니다.” 장덕진은 또박또박 낮고 또렷한 음색으로 말했다.
“음, 그렇군요. 3.1거사 직후에 상해로 왔다고 했소?” 안창호는 장덕진의 어머니가 일경에 쫓기는 아들을 지켜주기 위해 생이별했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다.
“네. 교민단에서 임득산 형과 문일민 형을 사귀게 되었습니다. 저는 배운 것이 없어서 독립을 위해 잘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형들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혹시 폭탄제조 기술 같은 것을 익히셨소?” 안창호가 속삭였다.
“네. 물론이죠.” 장덕진도 속삭이듯 대답했다.
“음, 내 생각에 자네는 총검술도 익혀두면 아주 큰 일을 할 수 있을 거요. 장교가 되거나 국제외교 수행원으로 현장을 지키는 일. 그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안창호는 장덕진이 장교의 풍모를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제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장덕진이 무심히 말했다.
“못하란 법이 없고 누군가는 그런 일을 수행해야 하니까. 틈틈이 영어나 중국어 실력도 키우고. 덕진 군, 자네 인물이 좀 멋있어야 말이지. 하하. 외교 수행원으로 의경 행동대를 맡아준다면 내가 힘껏 도와주고 싶어 그러오.” 안창호가 말했다.
장덕진은 안창호의 말을 들으며 ‘꿈을 가져야 해. 나는 꿈이 있었던가?’ 하고 생각했다. 장덕진(1898~1924)은 장덕수의 동생으로, 장덕수(1894~1947)는 여운형, 선우혁과 신한청년당을 발기한 인물이다. 장덕수는 3.1운동 기획에서 동경으로 파견되었다. 와세다 유학 시절 이광수와 가깝게 지낸 이유였다. 장덕수는 이광수를 만나 유학생들이 터뜨릴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곧장 상해로 돌아오라는 신한청년당의 명령을 전달했다. 임무를 마친 장덕수는 2월 20일 서울에 도착하여 이상재 등 지도층과 청년 동지들에게 상해와 동경의 상황을 보고하고 상해로 돌아오다가 인천에서 피체되어 하의도로 유배되었다. 재령에서 보강학교 교편을 잡았던 큰 형 덕준(1891~1920)도 상해에 와 있었다. 덕진은 어릴 적 큰형 덕준으로부터 한글을 깨우쳤다. 덕준은 현재 동아일보 파견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이들 형제는 고려말 충렬왕 때 조선 개국을 반대하여 쫓겨나 은거했던 공신 집안의 자손이다. 부친은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다가 덕진이 6살 때 돌아가셨다.
프랑스 조계 장빈로 애인리 24호. 도산 안창호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김성근과 이춘숙이 달려 나왔다. “각하, 오셨습니까?”
이들의 환대에 안창호는 들뜬 목소리로 화답했다. “내가 그대들이 보고 싶어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왔소. 단장께선 그간 무고하셨소?”
김성근이 환한 얼굴로 이춘숙을 소개했다. “네. 이분은 이춘숙 형님입니다. 각하를 가장 뵙고 싶어 했죠.”
이춘숙이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드디어 도산 각하를 뵙습니다. 각하께서는 그리움의 대상이셨습니다. 의정원에서 많은 사람이 각하를 거론했을 때도 그랬지만, 실은 우수리스크와 시베리아에서부터였습니다.”
안창호가 화답했다. “오, 그랬습니까? 이춘숙 동지. 내 그동안 여러 사람에게서 동지 이름을 들었다오. 함경남도 정평군 출생이고, 보성전문에 중앙대학을 나온 법 전문가. 내 들은 기억은 이렇다오. 맞소? 하하.”
안창호는 이춘숙이 마음에 들었다. 독립정신이 투철하지 않고서야 이 청년들과 관계를 맺고 모험단 결성에 동참하기 쉽지 않을 터. ‘여운형이나 윤현진, 신익희가 이춘숙을 거명할 때 다 이유가 있었구나.’
이춘숙은 안창호가 자신의 정보를 꼼꼼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분은 예사로운 지도자가 아니다. 러시아에서도 민족주의자들 대부분이 도산을 지지했다. 계급 좌파는 아니지만, 우익 보수는 더더욱 아니다. 이분 기반이 미국 공화파라는 사실에 거부감을 가진 청년들이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 이분은 언행일치의 모범, 진보적인 민족주의자다!’
“이 보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오? 만일 내가 국채를 발행한다면 관련 통칙이나 조례 등에 대해서 가르쳐 줄 수 있소? 이승만 국무총리 내정자의 제안이라오. 관련해서 의정원에서 헌법도 개정해야 할 터.” 안창호는 이춘숙이 과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법이나 조례 등에 밝은 청년들이 많이 있을 텐데요. 신익희도 있고, 저와 망명 동지인 이유필도 있고... 하지만 명령을 내려 주신다면 저도 같이하겠습니다.” 이춘숙이 말했다.
이춘숙은 ‘도산은 이승만의 요구를 다 수용할 모양이다. 법률 근거를 만든다는 의지는 민주적 절차를 밟는 일. 일의 진행방식이 얼마나 치밀한가?’ 하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이고 있는 저 청년들은 다 잘 아시오?” 안창호가 이춘숙에게 물었다.
“아, 네. 다 알진 못해도 저기, 김태연, 문일민, 김정근, 이영렬, 장덕진, 임득산, 그리고 안경신은 압니다. 낯선 친구도 몇몇 있군요.” 이춘숙이 대답했다.
“인물들이 다 좋군요. 대한의 청년들이 정말 자랑스럽소. 저들이 독립을 위해 귀한 목숨을 내놓았다니. 꿈을 가지고 학업에 집중할 나이인데 면면이 아깝기도 하고.... 관오 동지는 어떻게 생각하오?” 관오는 이춘숙의 아명이다. 안창호는 청년들을 보고 애끊는 마음이 앞섰다.
“동감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지만, 저들을 아끼고 지켜서 장차 광복군 장교들로 키우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폭탄제조 기술이라도 익혀야 하겠지만 정식 군사교육을 받게 하면 좋겠습니다.” 이춘숙이 신중하게 말했다.
“맞소! 나랑 같은 생각이시오. 저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받게 해서 육군 장교로 양성하면 좋겠는데... 임정 산하에 육군무관학교 설치가 가능할지 어떨지. 일단 같이 노력해 봅시다. 임시 육군무관조례 같은 안을 관오 동지가 마련해 줄 수 있겠소? ”
“네, 제가 해 보겠습니다.” 이춘숙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안창호는 이춘숙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이 동지는 여운형 말대로 군무총장 감이다.’
시간에 맞춰 청년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구국모험단. 언뜻 급하게 지은 단체명인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실은 목적성이 분명한 단체였다. ‘지금은 ‘모험단’이 맞춤일 수 있겠지만, 희생제물로 놔둘 수는 없다. 얼마 후면 국제연맹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외교 독립운동의 시대는 지나갈 것이다. 저 청년들의 나이는 아직 젊다. 청년들을 아껴야 한다.’ 안창호는 생각했다.
구국모험단 청년들은 1919년 6월 12일, 임시정부 활동을 지원하고, 폭탄을 제조하여 무력투쟁을 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3.1항쟁 이후 후속 투쟁은 무력밖에 없다는 결론을 냈다. 이들은 폭탄제조 및 사용법을 습득하여 국내 각지에 있는 조선총독부 관서를 파괴하고, 주요 인물 암살 등을 통해 대한의 독립운동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취지를 선언했다. 청년들은 그들의 모금 대상인 국내 각지의 지방 부호나 유지들, 그리고 학교나 종교단체 등의 정보를 수집하고 정황을 파악하여 임시정부에 보고하기로 했다. 군자금 조달은 부득이 국내외 한인 부호들을 찾아가 각출하는 방법을 모색했다. 이들은 국내 각지를 포함해 연해주, 시베리아, 만주 등에 산재한 의열단과 무력투쟁에 관한 유기적 연대 전략을 계획했다. 그러나 안창호는 이를 만류하고 임시정부의 합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자고 설득했다. 어차피 임시정부 재정은 인구조사 등을 통한 인두세와 국채 발행을 통해 확보할 계획이었다.
안창호는 이들이 임시정부 독립운동의 한 축을 이룰 수 있도록 이춘숙을 군무차장으로 내정했다. 그리고 구국모험단과 연대하고 있는 서간도 청년단들을 규합해 만들어진 대한청년단연합회를 정부 산하 광복군으로 편제해 공식적으로 지원할 수 있게 구상하였다. 상해 육군무관장교학교 설치와 대한광복군 총영 설치. 안창호는 임시정부에 이춘숙과 이탁, 그리고 서간도에 오동진이 이 일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