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임시정부 통합 (상)
내무총장 안창호는 취임 한 달여 동안 정부의 여러 가지 사업을 추진하면서 권한을 위임하고 차장들을 면면히 관찰해 왔다. 새로운 통합정부가 구성되면 이들이 총장을 모시고 차장의 각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안창호는 나름대로 이들이 어떤 부서의 일이든 훌륭하게 소화해 낼 수 있도록 수련시킨 것이다. 근태, 기획과 조직능력, 자금 동원, 주인 정신, 책임감, 상생과 협업, 민주적인 소통능력 등. 안창호는 최고 지도자로서 이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였다.
1919년 8월 5일, 제5회 임시의정원은 안창호의 요청에 따라 국무원 제도를 폐지하고 차장제도를 복귀시켰다. 안창호는 내무 현순, 외무 여운형, 재무 윤현진, 법무 신익희, 군무 이춘숙, 교통 김철, 국무원 비서관 최창식을 임명하고 의정원 인준을 받았다. 안창호는 법무차장 신익희에게 임시정부통합을 위한 절차를 서두르라고 했다. 마침 미주 통신에 따르면, 이승만이 1919년 8월 25일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령을 발동하여 워싱턴에서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스스로 대통령이라는 명함을 사용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통합절차 위반이었다. 그래서 안창호는 ‘대통령이란 직함을 사용하는 것은 위법행위’라고 워싱턴에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8월 26일 자로 돌아온 답변은 ‘독립운동에 방해가 될 것이니 떠들지 마시오.’라는 내용이 전부였다.
안창호와 신익희 등 통합 추진세력은 8월 28일 임시정부 통합안과 임시헌법개정안을 의정원에 제출하면서 “이러한 절차와 과정은 우리 전도에 가장 필요한 통일을 이루기 위함이다.”라고 각원과 의정원을 설득했다. 임시헌법개정안은 상해 임시정부에서 발표한 임시헌장 10개조를 토대로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를 절충하여 ‘전문과 8장 57개조’의 기본조항으로 개정안을 제출했다. 임시의정원은 9월 6일 이를 통과시켰다. 임시정부 통합안은 “첫째, 국내 13도 대표가 민족 전체의 대표임을 인정하여 오직 한성임시정부를 계승함. 둘째, 정부의 위치는 상해에 둠. 셋째, 상해 임시정부에서 실시해 온 정부 행정은 그대로 유효로 인정함. 넷째, 정부의 명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함. 다섯째, 현임 정부 각원은 일제히 퇴직하고, 한성정부가 선거한 각원들이 정부를 인계함.”의 5개 내용이다. 설전이 오고 갔으나 제7차 임시의정원 회의는 9월 11일 임시정부 통합안을 통과시켰다.
통합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즉각 비공식 구미위원부를 구미주차한국위원회로 공식화했다.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와 파리위원부를 예하 소속으로 두었다. 북미와 하와이, 멕시코, 쿠바에 설치되었던 국민회지방회를 구미위원부 관할로 개편했다. 이승만은 9월 12일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의 애국금 제도를 폐지하고 독립공채표를 발행하여 미주지역 재정을 관장하고 공채표도 자신의 책임하에 발행하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공채표로 거두어들인 의연금은 상해임시정부로 송금되는 조건이었고, 또 독립 이후에는 상환을 조건으로 하였다. 이승만은 파리외교 임무를 마친 김규식을 구미위원부 한국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공채표를 들려서 북미로 파견했다. 이 일로 북미국민회는 임시정부로 보내던 애국금과 새로운 공채표 구매 갈등으로 혼란을 빚고 있었다. 이 문제는 상해에서도 교민들 사이에 분쟁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상해 임시의정원과 청년 각료들은 이승만의 정치 행위는 독재요 권력 남용이라면서 분노했다. 안창호는 깊은 고뇌 끝에 이승만의 요구를 따르기 위해 애국금 제도 폐지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애국금이란 명칭은 1920년 2월, 통합내각 이시영 재무총장 명의로 폐지를 선언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창호는 내각 개편작업을 서둘렀다. 이승만의 전횡을 막고 통합된 임시정부를 가동하기 위함이었다. 임시의정원은 9월 28일 대통령제 내각 개편작업에 들어갔다. 마침내 11월 3일, 제8회 의정원은 장고 끝에 새 내각을 발표했다.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총장 이동녕, 외무총장 박용만, 재무총장 이시영, 법무총장 신규식, 군무총장 노백린, 학무총장 김규식, 교통총장 남형우 그리고 노동총판 안창호.”
손정도 의장의 목소리는 무거웠으나 안창호의 얼굴은 안도의 빛으로 밝아졌다. ‘통합이 끝이 났다. 이제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자리에서 이동휘, 이동녕, 이시영, 신규식, 안창호의 합동 취임식이 거행되었다.
9월 11일 통합임시정부 선포에서 11월 3일 내각 구성에 이르기까지 안창호의 고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진통의 과정이었다. 안창호는 지난 8월 23일, 선우혁을 시켜 정재면을 불렀었다. 정재면은 이동휘와 관계가 깊은 사람이다. 정재면(1884-1962)은 평안남도 숙천에서 태어났다. 상동교회 청년회 인연으로 신민회에 가입했고 대성학교 교사 출신이다. 이동휘의 권유로 북간도교육단을 조직한 바 있다. 1909년에는 북간도 용정에 있는 김약연의 초청으로 명동학교 교사로 초빙되었다. 그러한 인연으로 1919년 2월 김약연과 함께 전노한족중앙총회에 북간도 대표로 파견되어, 전노한족중앙총회를 대한국민의회로 개칭하는데 기여했다. 안창호는 그러한 정재면을 대한국민의회로 특파하여 의정원 통합에 관해 이면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대한국민의회와 상해 임시의정원 간에 지분 갈등의 불씨가 남아 있었다.
안창호는 통합내각 발표에 앞서 가장 공을 들여야 하는 인물로 이동휘를 생각했다. 마침 한성 조직에는 노령지역 인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선발했기 때문이다. 안창호는 이동휘와 이승만이 화합할 수만 있다면 성공적인 정부가 될 것으로 믿었다. 이승만은 대통령 직함이 필요하니까 임시헌법을 개정하면 될 것이고, 이동휘는 공을 들여 설득해서 모셔 와야 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내무차장 현순에게 이동휘를 설득하여 상해로 모셔오라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파견했다. 현순과 함께 김성겸, 의정원에 와 있던 노령 대표 원세훈이 동행했다. 현순 일행은 현지에서 안창호의 소개장으로 이강을 만나 도움을 받았다. 현순 일행은 이동휘를 상해로 부임하도록 설득했다. 김립과 남공선을 대동한 이동휘는 현순 일행과 함께 일경을 따돌리고 무사히 블라디보스토크 군항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연태를 거쳐 9월 18일 무사히 상해로 왔다.
안창호와 이동휘는 한풀이하듯 해후했다. “형님, 이것이 얼마 만인가요? 형님을 이렇게 만나니 너무 기쁩니다!” 안창호가 반가운 마음에 이동휘의 손을 덥석 잡고 흔들며 말했다.
“오, 도산, 도산이 상해 주인으로 있는데 내가 오지 않고 배기겠소? 허허.”
“신민회 이후 그동안 갖은 고생을 다 하셨다지요? 몸도 수척해지신 것 같고요.”
“사실은 군관학교를 제대로 만들고 싶었는데 뜻대로 안 되더군. 일본 놈들이 작정하고 훈춘이고 왕청현이고 북간도 여기저기 내 뒤를 쫓으며 날 잡으려고 안달났었지. 그러다가 다행인지 뭔지 러시아 혁명이 난 거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겨우 숨 좀 쉬고 있는데 거기도 밀정들이 날뛰고 살벌했네. 놈들이 나를 잡아서 동경으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다행히 은인을 만나 석방됐지. 김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그녀는 한인 볼셰비키당 책임 비서로 극동에 파견된 실력자였네. 러시아 공산당원들이 우리 대한독립을 지지한다는 소식을 들었지. 그래서 1918년 5월에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했다네. 그런데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면서 생긴 전노한족중앙총회가 1919년 3월 17일에는 대한국민의회로 명칭을 변경하더군. 도산의 동지 정재관이 애를 많이 썼지.” 이동휘는 웅변가답게 핵심을 강조하면서 지난 일을 단숨에 말했다.
“유동열! 그의 소식이 궁금합니다. 형님과 같은 행보를 했습니까?” 안창호는 옛 신민회 동지 안부가 더 급했다.
“그 친구는 1918년 정치망명자 회의에서 만났네. 내가 한인사회당에서 같이 하자고 했더니 동의하더군. 한동안 신규식 등과 신한혁명당(1915)을 만들어 고종황제를 당수로 모신다고 여기저기 다녔던 모양일세.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왔다 갔다 하다가 지금은 길림에서 활동하는 모양이야. 내가 상해로 왔으니 오라고 해야지.”
“상해정부와 한성정부에서 모두 참모총장으로 인정받고 있으니 상해로 와서 참모총장이 되면 좋겠습니다.” 안창호의 진심이었다.
“그 양반도 외길, 오로지 군사학교와 전쟁 준비야. 한인사회당에 가입하긴 했어도 복벽주의를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지.” 이동휘가 혀를 찼다.
“어쨌든 형님이 국무총리로 오셨으니, 당 조직은 잠시 내려놓으시고 만주 각처의 군사 조직을 임정 산하로 편제하는 일이 중요할 듯합니다. 광복군총영을 설치하는 일 말씀이지요. 김희선이 상해에 있지만 그래도 유동열이 적임자인데....” 안창호는 김희선이 고향 강서의 선배이긴 하지만 그를 마음에 두지 않았다. 청도회담 때부터 그랬다.
이동휘가 말했다. “도산이 그렇게 하자고 하면 그렇게 합시다. 내 조만간 이용을 부를 생각이오. 북간도 러시아 접경지역에 사관학교를 세워서 군사력을 키워야지.”
안창호는 생각했다. ‘이동휘 선배는 고집스럽기는 해도 나이에 비해 사고가 열려있다.’
“이용이라면? 이준 선생의 아들 말씀이지요?”
“그렇다네. 훌륭한 부모 밑에서 애국심을 키운 훌륭한 아들이라네! 그나저나 도산은 임정을 나에게 물려주고 떠날 셈이오? 내 그렇게 들은 듯한데.”
“아하, 제가 새 내각에서 노동총판이라니까 그러는 모양입니다. 형님이 계시면 저는 안 떠납니다. 하하.”
“도산이 오라는 소리가 없었다면 난 안 왔을 거요. 우리는 신민회에서 의기투합한 형제나 다름없으니, 하하. 그나저나 이승만은 언제 온답니까?”
“글쎄요....”
“러시아에서는 이승만 결사반대요. 상해에서 통합정부를 만들어 놓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다니까 다들 고개를 젓습디다. 심지어는 도산까지 비난하고 나서는 이도 있고... 그나마 내가 국무총리로 간다니까 나를 믿고 봐 준다고 합디다.”
“그럴 것입니다. 저는 다만, 한성에 이승만 지지세력이 많으니 통일 일념으로 일단 그렇게 통합정부를 구성해 놓고 보자 했던 것이지요.”
“사실은 연해주 일대도 좌파 우파로 나뉘었다오. 예전 신민회, 권업회, 국민회 등 세력은 레닌 정부에 후원만 얻자고 하고, 한인사회당 청년들은 코민테른과 연대하여 조선독립을 하자 하고. 솔직히 연해주는 좌파세력이 우세하오.”
“형님, 그래서 제 생각은 역사가 깊은 한민족이 기초를 튼튼히 해서 스스로 정체성을 갖고 독립운동을 하자는 생각입니다. 해외에서 떠돌다 보니 지금은 강한 세력에 기대야 하는 형편임을 잘 알지만, 그것이 본질은 아니니까요. 미국도 코민테른도 지금으로서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우리는 오직 강한 일본을 상대해야 하니 통일하자는 것입니다. 광복 이후 조국의 번영은 후배들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음, 듣고 보니 도산의 말도 일리가 있소.”
“저는 지금도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군사, 외교, 교육, 사법, 재정, 통일 등 6대 주요 사업은 모두 사람이 하는 일이지요. 인재들이 각 부문에서 총력을 다하도록, 광복 이후 조국의 번영을 위해 기초를 다져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도산은 6대 사업 구상이 머릿속에 있구려?”
“대단한 구상은 아니고 그저 원론적인 측면에서... 임정에 참여하고 있는 정치 후배들을 키워야 하니까요.”
“내가 무엇부터 해야 하오?”
“독립전쟁 준비가 아니겠습니까? 우선, 정부 내 공식적 논의를 위해 군사연구회를 조직하여 만주 실태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리고 군 통수권을 위해 광복군총영을 설치해야 합니다. 상해에는 육군무관장교 학교 설치도 필요합니다.” 안창호는 이탁과 오동진을 생각했다. 그들이 지도하고 있는 구국모험단 청년들!
“도산, 내 여기 있는 동안 나를 가르쳐 주시오. 내 도산의 말이라면 뭐든 귀를 기울이겠소.”
“형님도 참, 마음을 열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저는 왜놈 헌병을 꾸짖듯, 그렇게 꾸짖는 형님이 그립습니다. 하하.”
- (하)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