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임시정부 통합 (하)
한편, 안창호는 신익희와 현순을 각처로 파견하여 이동녕과 이시영과 신규식을 모셔오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하비로 321호 청사를 10월 17일까지는 비워야만 했다. 일본 총영사의 방해로 프랑스 조계 당국이 폐쇄를 명령했기 때문이다. 10월 11일 안창호는 하비로 청사 잔디 마당에서 통합임시정부 성립을 기념하기 위해 의정원 의원들, 차장들, 국무원 직원들과 사진을 찍었다. 안창호에게 사진은 기록으로 남길 사료였다.
마침내 세 총장이 도착한 때는 10월 27일, 하비로 청사 폐쇄 명령에 따라 각 기관 책임자의 주소지로 분산되었을 때였다. 북경에 있던 박용만과 노령에서 온 문창범은 외무총장과 교통총장의 취임을 각각 거부했다. 박용만은 이승만 체제를 거부한 것이다. 선배들은 박용만 취임을 다시 권해보기로 했다. 문창범은 의정원과 국민의회의원의 의석수 배정에 불만을 품고 취임을 거부하고 연해주로 떠났다. 1920년 11월에 그 자리는 남형우가 맡게 되었다. 안창호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신채호를 잃었고 손정도를 얻었다. 제5회부터 임시의정원에서 전원위원장으로 열렬히 활동했던 신채호는 결국 통합내각 구성에 실망하여 의정원을 사임하고 도산 안창호와도 결별을 선언, 북경으로 돌아갔다. 반면, 의정원 의장 손정도는 내무총장 안창호의 상담자로 통합과정에 깊게 참여했다.
통합내각 취임식이 끝나고 안창호는 손정도와 함께 이동녕의 거처를 방문하기로 했다. 안창호는 밝은 얼굴로 손정도와 마주했다.
“손의장, 고생이 많았소. 그대의 리더십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빨리 끝나지 못했을 거요.”
“도산의 의지대로 일사불란하게 진행된 것뿐입니다. 보셨습니까? 청년들의 실망한 표정들 말이오. 노동총판을 고집하신 것이니 이제부터는 고집쟁이라는 소리도 듣겠습니다.”
“고집쟁이 소리는 애교요. 오해는 일의 결과가 투명하면 저절로 풀리는 것이고, 악평은 잘해도 못해도 늘 들을 수 있는 소리니 나 자신이 충실하면 약이 될 것이오. 하지만 야심가니 지방열이 어쩌느니 하는 혹평은 혹시 분열의 씨앗이 나인가 하고 의심이 되어 괴롭소.” 안창호는 시무룩해졌다.
그런 안창호의 표정을 보고 손정도가 화제를 돌렸다.
“형님이 꺼내신 독립운동 방략과 시정방침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외교 대비 『한일관계사료집』 발간만 해도 의정원 의원들은 도산의 국제 통찰력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고, 대한적십자사 재건이 외교 운동의 한 꼭지라니 놀라웠습니다. 연통제로 인구조사와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시정방침으로 제시하실 때, ‘아, 이것이 바로 공화국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원이 달랐습니다.”
안창호는 손정도의 격려에 다시 힘을 냈다. “에고, 너무 칭찬은 마세요. 모두 진행형. 앞으로도 할 일은 태산입니다. 다만, 임시정부가 단 하나의 명령체계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더 급합니다. 넓디넓은 만주 무장세력 통합이 큰 과제요. 우리가 뽑은 대통령은 이 일을 잘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기도해야지요.” 손정도 의장의 목사다운 일성이었다.
“기도!” 안창호는 무릎을 탁 쳤다.
“능력 밖의 일은 기도가 답이지요. 다수가 지지하는 분을 최고 수반으로 뽑았으니 잘해나가도록 돕는 일이 우리의 사명 아닐까요?” 손정도가 말했다.
안창호도 공감을 표시했다. “기도는, 사랑이다! 사랑을 담아야 간절한 기도가 나온다. 역시 손 목사 답습니다! 통합내각은 사랑의 완성이면 좋겠소.”
“회의 도중에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단재 얼굴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손정도는 통합내각 발표와 동시에 신채호가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안창호도 그 순간 단재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나도 그랬소. 단재는 내 사랑이지요. 화가 난 모습도 아끼고 싶더란 말이지. 어쩌겠소? 그도 나름대로 소신과 명분이 있는 독립운동을 지도해 나갈 거요. 내 방법과는 다르지만 나는 그를 믿고 있소.”
“형님께서 견디기 힘든 것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사랑하는데 결별하는 것. 이별과는 다른....” 손정도는 어느새 안창호의 마음속까지 꿰뚫고 있었다.
안창호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이동녕, 이시영 두 분이 총장 취임 결단을 내려 임정으로 취임하셨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두 분은 쌍둥이 형제 같지 않소? 거의 같은 길을 걸어왔으니 왠지 그런 생각이 드는구려.”
“그러고 보니 두 분은 데칼코마니 같군요. 한성 대표들이 나름 내각 구성을 잘한 것 같기도 하고. 내무와 재무, 친형제보다 친구가 더 편한 존재일 수 있지요.” 손정도가 말했다.
“독립협회 이후 상동교회 청년회에서 맺어진 인연들은 참 대단했소. 상동교회로 모인 청년들은 관민 통합의 용광로, 조국 근대화의 저수지였던 게요. 신민회를 가능하게 한 요람이기도 하지요. 전덕기 목사가 그립구려!”
안창호는 대선배들과 뜻을 나누었던 신민회 기억들이 떠올랐다. 특히 석오 이동녕 선배는 소리 내지 않고 안창호를 응원했다. 독립협회에서 제기되었던 의회설립 운동이 공화주의 운동과 궤를 같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동녕은 복벽주의와는 선을 그었다. 인재 양성을 위한 신민 훈련기관 청년학우회를 앞장서서 지휘했고, 서간도 신흥학교의 이념도 궤를 같이했다. 그런 점에서 열린 사고의 지도자인 셈이었다.
이동녕(1869~1940)은 충남 천안군 양반 명문가에서 태어나 22세에 과거급제하여 진사가 되었다. 만민공동회에서 의회설립계몽 선봉에 섰으며, 『제국신문』 초기 논설위원으로 활동했다. 1903년 상동청년회를 통해 운동 인맥을 쌓았고 1906년 이상설과 용정에서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 후 귀국하여 안창호를 만나 신민회와 청년학우회 설립을 지지했다. 이동녕은 안창호의 공화주의와 독립전쟁 준비에 공감하고 해외 기지개척과 독립군양성에 뜻을 모아 1910년 서간도로 망명하여 이시영 형제들과 신흥강습소를 일으켰다. 1913년에 노령으로 이동하여 권업회가 설립한 무관학교 운영에 참여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을 틈타 일본군이 연해주와 시베리아로 대거 병력을 투입한 가운데 권업회가 탄압을 받게 되자 이동휘, 이상설, 정재관, 이종호 등과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1917년 4월과 6월 이상설과 이갑의 임종을 지켰다. 1918년 이동휘가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 당수가 되자 이동녕은 1919년에 길림으로 이동했다. 이동녕의 입장은 이동휘와 달리 코민테른과의 연대보다는 외교력을 발휘하여 레닌 정부의 후원만 받아내자는 생각이었다. 이동녕은 길림에 머물다가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참여했다. 당시 임시의정원에는 이회영, 이시영 형제가 같이 참여했다. 초대 의정원 회의에서 정당 구성이 먼저라는 이동녕의 의견이 청년들과 마찰을 일으키자 묵묵히 의장 자리를 고사했다.
안창호는 이동녕 선배와 잘 맞았다. 손정도는 이 점을 눈치채고 있었다.
안창호와 손정도는 이동녕의 거처를 방문했다. 그곳에 이시영도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은 안창호와 손정도를 반겼다. 이동녕은 항간에 떠돌고 있는 ‘서북계 단합으로 기호계를 누른다느니, 개인의 세력을 형성한다느니’ 하는 안창호에 관한 소문의 진실을 물었다. 안창호는 조목조목 대응했다. 이동녕은 ‘아, 그런 것인가?’ 하며 수긍했다. 그리고 안창호의 그간 내무총장의 직임 수행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안창호는 허심탄회하게 통합내각 구성에서 노동총판을 수락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동녕은 산적해 있는 외교와 선전업무 총괄이 걱정된다고 했다. 박용만이 외무총장을 거부한다면 사실상 업무 총괄 책임자가 필요하니 안창호가 그 임무를 대행하면 어떨지 물었다. 안창호는 ‘역할을 주신다면 임정을 도울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동녕 내무총장은 안창호에게 ‘임시정부 내무부 선전위원장’의 전권을 약속했다. 외무총장을 대신해서 사실상의 외교와 선전업무에 대한 전권을 위임한 것이다. 손정도는 인물 중심이 아니라 일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하는 두 사람의 의기투합 과정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