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동지를 믿고 속아라
1919년 11월 4일, 통합내각 4인방과 함께 취임식을 마친 안창호는 소리 없이 홍십자 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위장병이 도지고 몸도 많이 쇠약해져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정신적으로 휴식이 필요했다. 김창세가 걱정하며 강력하게 입원을 권한 이유도 있었다.
혼자만의 시간. ‘앞으로 더 험난한 고갯길을 넘어야 할지도 모른다.’ 안창호는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았다.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내무총장 취임 후 5개월 동안 안창호는 청년들이 일구어 놓은 3.1운동과 상해임시정부가 헛된 결과가 될까 노심초사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취임 이전 한 달간은 홍십자 병원 생활을 통해 청년들과 교류하면서 임시정부가 해야 할 독립운동 방략과 시정방침을 수립했다.
안창호는 독립 국가 선포의 핵심과제인 국호제정과 공화정체 수립을 청년들이 이루어 놓은 큰 성과로 평가했다. 다만 총장급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임시정부를 방관할 때 그것이 계파 갈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안창호는 몸을 낮출 대로 낮추고 내무총장에 취임하여 정부의 틀을 구성해 나갔다. 7월~11월. 안창호는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독립운동 방략에 따라 청년들로 구성된 차장 내각의 6부 조직을 전격 가동했다. 그러면서 국가를 위해 헌신할 인재들을 만났고 그들을 인정해 주고 격려해 주었다. 재정마련 비전과 연통제 수립, 교통국 설치, 대한적십자회 재건, 『한일관계사료집』 편찬, 『독립신문』 발행 등. 이 모든 정부 사업은 행정을 장악하고 있는 일본에 대한 독립선언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기구에 선전할 외교 전술이었다.
안창호는 초심을 버리지 않았다. 취임조건은 통일 정부 즉, 통합내각 구성이었다. 11월 3일 제8차 의정원 회의에서 새 내각을 발표하기까지 안창호는 주어진 기회와 권한을 가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하나의 최고기관으로 기능하도록 디딤돌을 놓았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노동총판의 자리로 최종 물러나는 것을 반대했지만 안창호는 고집을 부렸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통합에 뒷말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안창호는 9월부터 본격화된 통합내각 구성 과정에서 『독립신문』 지면을 통해 이승만을 중심으로 단결하자고 호소했다. 신채호가 이에 반발했다. 이승만이 국제사회에서 법 절차를 무시하고 대통령 행세를 했다는 점과 위임통치 청원 건을 두고 신채호는 ‘자칭 대통령’이라고 이승만을 공격했다. 이승만은 상해 사정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신채호는 『독립신문』의 이승만을 중심으로 통일 단결하자는 안창호의 논조에 반발하여 주간신문으로 『신대한』을 창간했다. 그리고 매 호 발행 지면을 통해 과격한 언사로 이승만을 공격했다. 그리고 끝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대동단결하려는 임시정부와 안창호에게도 비난의 화살을 쏘았다.
『신대한』에 실린 신채호가 쓴 ‘성토문’ 내용은 이러했다.〈위임통치 청원에 대하여 재미 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동의든지 묵인이든지 그 내용의 주관자로서 이승만과 정한경을 대표로 보내어 그 청원을 올리었으니, 그 죄책도 또한 용서할 수 없으며, 상해 의정원이 소위 임시정부를 조직할 때에, 앞서 전파된 위임통치 청원 운운의 설을 이승만 등과 사감 있는 자의 주출(做出)이라 하여 철저히 사핵(査核)하지 않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추정함도 천만의 경거(輕擧)이거니와 제2차 소위 각원(閣員)을 개조할 때에는 환하게 해 청원의 제출이 사실임을 알았는데, 마침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거한 죄는 더 중대하며 … (이하 중략).〉
김구를 비롯한 윤현진, 손영필 등이 안창호를 찾아와 『신대한』을 성토했으나 안창호는 이를 만류했다. ‘신채호 지적이 틀린 말은 아니다. 내 탓이다.’ 안창호는 신채호의 강직함을 이해하고 있었다. 『신대한』은 얼마 후 자진 폐간하였다. ‘동지를 믿고 속아라.’ 안창호는 중얼거렸다. ‘세상에 마음 놓고 믿는 동지가 있다는 것처럼 행복이 또 어디 있으리오.’
그러나 이승만을 둘러싼 불씨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상해 임시의정원이나 국무원 의결 절차 없이 구미위원부를 따로 떼어 대통령 전권 하에 두려고 했다. 재정 권한을 독점하려는 의도였다. 이승만은 결국 독단적으로 공채표를 발행하여 이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때 김규식은 북미로 파견되어 공채표를 파느라 심한 스트레스로 뇌병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안창호를 고뇌하게 만든 또 다른 문제는 연해주 대한국민의회 분위기였다. 문창범 교통 총장은 상해 정부가 노령 대한국민의회를 따돌리고 상해 의정원과 통합정부를 의결한 데 대해 불만을 품고 떠났다. 정재면을 따로 파견하여 대한국민의회 해산조건으로 노령 대표들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대폭 개편하겠다고 했던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것이다. 이는 실책이었다. 안창호는 반성했다. 이동휘 국무총리 취임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믿었던 게 착오였다. 대한국민의회는 70~80명의 지역 대표들로 구성된 나름대로 체계적인 대표기구였는데 이들을 수용하지 못했다. 의정원 통합에 실패한 셈이었다. 노령 측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처음부터 다시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안창호는 각고의 노력을 펼쳤지만 임시정부통합은 결국 실패한 것이라고 스스로 인정했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한성 내각을 핑계로 노동국 총판으로 내려앉았다. 책임 지위에서는 일단 물러났지만, 수습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각료 하위직을 수용한 것이다. 안창호의 스트레스는 그의 지병인 위통 재발로 나타났다.
한편, 안창호는 정신없이 달려오느라 주변을 챙기지 못했다. 미국에 있는 혜련에게 편지 한 장 쓸 여유조차 없었다. 김순애가 오빠 김필순이 일본인 조수가 독을 탄 우유를 마시고 9월 1일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을 때도, 안창호는 그저 안타까운 회한에 사로잡혀 며칠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을 뿐이다. 김필순. 생의 은인. 비보를 접하고도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현실에 안창호는 성경책을 붙들고 남몰래 눈물만 흘렸다.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김필순은 치치하얼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동생 부부인 필례와 최영욱 그리고 어머니와 형님 김윤오 가족을 망명시켜 모두 기지개척에 나섰다고 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는 삶의 끝이 그토록 허망하다는 말인가? 안창호가 상해 임시정부에서 큰일을 하고 있다는 소식에 김필순은 상해 나들이라도 가야겠다고 종종 말했다고 한다.
안창호는 필순의 둘째 아들 염이를 데리고 와 곁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몽골로 가서 김필순이 못 이룬 둔전제에 기반한 이상적인 기지개척을 반드시 이루리라고 다짐했다. 마침 신해혁명에 참가했던 김규홍 선생이 둔전병제 기지 개척 정보로 내몽골 포두진을 소개한 일이 있었다.
안창호는 다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6대 사업 비전을 수립하는 데에 몰두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여운형이 병원을 방문했다.
“오, 어서 오시오.” 안창호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많이 아프신 건 아닌지 걱정됩니다.” 여운형이 걱정스레 말했다.
‘여운형의 눈빛은 어찌 저리도 깊단 말인가? 저 속에 어떤 신념들이 가득 차 있을꼬?’ 안창호는 여운형이 침대 등받이를 반듯하게 만져주는 대로 놔 두었다.
“괜찮소. 가끔은 이렇게 꾀병을 부려야 체력이 살아난다니까? 하하! 정청은 별다른 일 없지요?”
여운형이 침대 옆 의자에 앉으면서 대답했다. “청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 감을 공유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군요. 우리가 빨리 돈을 모아 독립된 청사를 마련해야 하는데 안타깝소.”
안창호도 임시정부가 청사도 없이 흩어져서 회의와 직무를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하비로 청사같은 건물을 마련할 길은 없단 말인가?’
“일본이 그냥 놔두겠습니까? 또 프랑스 당국에 압력을 넣고 해산시키려 하겠지요.”
“하긴, 그렇구려. 겨우겨우 내각 통합을 이루었더니 사무공간이 여기저기 이산되었구려.”
“김규식 형님 소식은 아직 모르시지요?” 여운형이 물었다.
“지난 9월 김순애가 그러더군요. 김규식은 강화회의의 독립청원 일이 무산되자 전권대사를 이관용에게 위임하고, 돌아오는 길에 워싱턴에서 이승만을 만났다고. 아마 활동 보고차 만났던 게요. 이승만은 구미위원부 한국위원회 초대 위원장으로 김규식을 임명하고 공채금을 모으게 했나 보오. 서부 각지를 한 달간 순회하면서 대한인국민회를 설득하여 독립공채를 팔아서 약 52,000달러를 모았다고 했소. 스트레스로 미국에서 뇌수술을 받았던 모양입디다. 그런 사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상해 통합내각에서는 그를 학무총장으로 선출했지요.”
“오, 선생님, 그 돈은 아직 임시정부로 오지 않은 모양입니다.” 여운형이 보고하듯 말했다.
“조만간 입금되겠지요. 미주 한인사회가 참으로 대단하지 않소? 나는 미주 동지들에게서 힘을 얻는다오. 그들의 땀과 눈물에 늘 죄를 짓는 기분이지.” 안창호는 순간 울컥하여 시야가 흐려졌다. ‘몸이 약해진 탓이다.’ 안창호는 자책했다.
여운형은 안창호의 시린 마음을 이해했다.
“미주 서부는 지도자 안창호를 믿고 있는 것이지요. 도산의 말씀이라면 뭐든 시키는 대로 하는 미주 동포사회가 부럽습니다. 상해에서도 그렇게 되면 좋겠습니다. 저는 청년단이나 민단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선우혁 형이 언제나 권력을 탐하지 않고 묵묵히 민단을 챙겨주니 늘 감사하지요.”
안창호가 기운을 차렸다. “오, 두 분이 뜻이 잘 맞는다니 나도 기쁘오. 그래도 몽양은 대외적인 활동을 많이 해줘야 합니다. 대한의 얼굴. 세계적인 행보가 지금부터 필요할지도 모르겠소.”
“과찬이십니다. 저는 선생님을 뵈면 마음이 평온합니다. 선생님은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하시지만 모든 곳에 필요하신 분입니다. 저는 선생님을 닮고 싶습니다.” 여운형도 어딘가 모르게 풀이 죽어 있었다.
“오, 몽양, 나를 닮지는 마오. 결함이 많은 사람이라오. 오히려 나는 그대의 음성에 기운이 납니다. 병색이 가실 것 같소. 하하하.” 안창호는 일부러 크게 웃었다. 그러나 사실은 지쳐있는 상태였다.
“저, 실은... 일본에서 저를 동경으로 초청했습니다. 외무총장이 없으니.... 딱히 누구와 의논할 상대도 없고 괜스레 말만 날 것 같아서 선생님과 의논하러 온 것입니다.” 여운형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일본 정부가 직접 초청했단 말이오?” 안창호는 일본의 간교함을 알고 있기에 걱정되었다.
여운형은 안창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일본 조합교회 측에서 초청한 것입니다.”
“조합교회라면 미국의 회중교회요? 익숙하지 않은데...?”
“맞습니다. 칼뱅파. 조합교회는 합병 이후 조선인 황국신민화 정책에 가장 선봉에 서 있는 교파입니다.” 여운형은 조합교회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오호라, 그러니까 몽양을 황국신민으로 회유시켜 보겠다고 정부와 협력한 것이로군.” 안창호는 일본의 전향 요구 정책에 소름이 돋았다. ‘조합교회라니, 종교집단을 이용하겠다는 술책인가?’
“일본 정부가 조합교회를 이용한 것이겠죠. 방문일정은 11월 18일부터 약 2주간입니다.” 여운형은 담담하게 말했다.
“가고 싶소?” 안창호는 물끄러미 여운형의 눈을 응시했다.
“실은 조건을 걸 생각입니다. 지금 장덕수는 하의도에 유배 중입니다. 3.1 기획 때 동경에서 춘원 등을 만나 교섭하려다가 총독부에 체포되었습니다. 듣기로는 말도 못 할 끔찍한 고문을 당한 모양입니다. 조합교회측에 장덕수와 최근우, 신상완을 동행해서 갈 수 있다면 가고, 아니면 안 가겠노라고 할 생각입니다.” 여운형이 진지하게 말했다.
“오호라! 장덕수 군이 그래서 통 보이지 않았던 게요? 몽양이 떼를 쓰면 조합교회 측에서 조선총독부에다 장덕수를 수배해서 풀어달라고 하겠군요. 으흠, 신상완과 최근우는 어떤 동지들입니까?”
안창호는 여운형을 의리가 있는 지도자로 보았다. ‘동지를 구해 내려는 애민의 마음.’
여운형이 차분한 어조로 동지들을 소개했다.
“최근우는 동경 2.8선언 후 상해로 왔습니다. 초대 의정원이고 신한청년당 간부입니다. 장덕수와 친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상완은 국내 3.1 독립선언에 서명했던 불교계 2인 중의 한 명입니다. 한용운 선생 밀지로 상해로 특파되어 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로 왔다 갔다 합니다.”
“음, 장덕수 비밀구출 작전이라! 동지에 대한 연민과 책임감 때문에 호랑이 굴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는 몽양의 뒷모습이 상상됩니다. 훌륭합니다.” 안창호는 감동이 밀려왔다.
여운형은 훌륭하다는 말에 용기를 얻었다. ‘나를 믿고 지지해 주는 분.’
“내가 힘 빠진 노동국 총판직에 있으나 그대의 동경방문을 돕겠소. 그래도 일본 정부가 몽양의 조건을 수용한다면 이동휘 총리에게는 보고해야 할 것이오. 외무차장의 행보니까.”
안창호는 여운형에게 비용에 보태라고 300원을 내 주었다.
1919년 11월, 장덕수는 총독부의 묵인 하에 하의도를 탈출했다. 조합교회 측에서 총독부와 협의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신익희의 쪽지를 받은 장덕수는 부산 백산상회로 안희제를 찾아갔다. 백산상회는 교통국의 거점이나 다름없었다. 임정에서 파견된 친구 신익희가 와 있었다.
사실, 상해 임정에서 이동휘와 총장들은 여운형의 동경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히려 11월 16일, 임정 포고령 1호를 내고 여운형의 도일을 비난했다. 난처해진 안창호는 신익희가 부산 교통국으로 공채금을 모금하러 갈 수 있도록 주선했다. 신익희와 장덕수는 절친 사이였다. 백산상회 안희제는 임시정부에 3천 원을 내놓았다. 신익희는 장덕수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동경으로 가서 여운형의 통역을 맡으라고 전했다. 여운형은 최근우와 신상완을 대동하고 동경 제국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리고 장덕수를 만나 눈물로 회포를 풀었다.
한편, 일본 정부는 여운형의 방문을 대서특필로 환영했다. 거의 국빈급 대우였다. 여운형은 일본 수상 하라 다카시, 척식국장관 고가 렌조, 육군상 다나카 기이치, 총독부 정무 총감 미즈노 렌타로, 내상 도코나미 다케지로, 체신상 노다 우타로 등과 회담했다. 장덕수가 통역을 도왔다. 여운형은 제국호텔에서 500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자들이 쏟아내는 질문에 마침내 사자후를 토했다.
“어느 집 새벽닭이 울면 이웃 닭이 따라 우는 것은, 닭 하나하나가 다 울 때를 기다렸다가 때가 되어 우는 것이지 남이 운다고 따라 우는 게 아닙니다. 이처럼 조선의 독립운동 또한 때가 와서 생존권이 양심으로 발작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지 결코, 민족자결주의 같은 것에 도취되어 일어난 게 아니올시다. 이제 조선 민족은 열화 같은 애국심이 폭발했습니다. 붉은 피와 생명으로서 조국독립에 이바지하겠다는 것을 과연 누가 무시할 수 있겠습니까?”
일본 당국의 회유와 자치제 선동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이후 동경대학 등 일본 여러 곳에서 여운형 초청강연회가 열렸다. 여운형은 도산이 늘 하던 말을 기억했다.
“대한민족 전체가 대한의 독립을 믿으니 대한이 독립될 것이요, 세계의 공의가 대한의 독립을 원하니 대한이 독립될 것이요, 하늘이 대한의 독립을 명하니 대한은 반드시 독립할 것이다.” 여운형은 “한국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이자 신의 뜻이며 한민족의 각성이며, 한국의 독립이 한국의 생존권이자 인간 자연의 원리”라고 강조하여 양심적인 일본인의 지지를 얻었다.
여운형은 일본 정가에 파문을 일으키고 12월 중순 상해로 돌아왔다.
12월 28일 발행된 『독립신문』은 여운형의 연설 내용과 기사를 실었다. 일본 신문들도 이를 받아 그대로 실었다. 12월 29일, 임시정부는 상해 국무원포고 2호를 통해 ‘몽양의 도일은 위반행위가 아님’을 선포했다. 이동휘 국무총리는 여운형을 불러 위로했다. 여운형은 이에 화답하여 1920년 5월, 이동휘가 상해에 조직한 공산주의자 그룹에 가담하여 중앙위원과 번역부 일을 맡아 돕기도 했다. 그러나 이동휘는 여운형이 안창호의 심복이지 자기의 심복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무차장인 여운형을 소외시킨 채 안창호와 상의도 없이 한형권과 김립을 소련으로 파견했다. 이 일을 두고 여운형은 이동휘에게 실망했다. 게다가 이동휘가 레닌이 지원한 자금 40만 루블을 고려공산당 상해파 활동자금으로 유용하여 파문을 일으키자, 여운형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에 가입하고 협력했다.
여운형은 임정에서는 외무 업무에 집중하면서도 상해 교민단장의 역할도 꼼꼼하게 수행했다. 교민단에서는 선우혁이 언제나 든든하게 여운형을 보좌했다. 선우혁은 여운형보다는 4년 차 선배지만 여운형의 그릇을 알고 있었다. 여운형은 상해 거주 교민들의 군적 등록, 인성학교 개편 등을 시행했다. 안창호는 이러한 여운형을 지켜보며 그의 거침없는 행보에 지지를 보냈다. ‘몽양은 장차 대한 공화국의 떠오르는 해가 될 것이다.’ 안창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