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가 사라진 위험한 세계
전 부치기에서 멀어졌지만, 다른 걸 잃었습니다.
제사를 지내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이번 추석에도 가까이 사는 외가 친척과 식사만 했다. 외삼촌은 불만이 많았지만, 다른 사람은 다 만족했다. 요즘은 다 이런 추세인 듯하다. 그 덕에 많은 여성이 불평등한데 전통적이지도 않은 제사에서 벗어났다. 과거에 여자는 결혼한 남자 집안에 방문해서 제사 준비와 손님 맞이를 떠맡았다. 이제 어지간히 고집스러운 집이 아니면 제사를 간소화하거나 우리집처럼 식사모임으로 대체한다. 우리집은 나름 선구자였다.
그런데, 제사가 사라진 것이 마냥 좋은 일일까? 불평등하고 근본 없는 제사는 사라져도 상관 없지만, 죽은 구성원을 함께 기억하며 가족을 결속시키는 행사 그 자체가 사라져도 괜찮을까?
1.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이유.
고대 그리스와 로마 사람은 어떤 신을 주로 믿었을까. 물론 하늘의 제왕 제우스를 가장 두려워했다. 그러나 일상 속에서는 화로와 가정을 보호하는 헤스티아를 굉장히 존숭했다. 물론 우리가 아는 그리스로마신화에는 헤스티아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전쟁 영웅 위주의 이야기가 주로 전해진 탓에, 올림피아에서 화로를 지키는 헤스티야는 나설 자리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기록을 보면 헤스티아는 제우스 못지 않게 신성하게 여겨졌다.
특히 로마 사람은 헤스티아(라틴어로 '베스타')를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셨다. 헤스티아의 신전은 원로원이나 독재관도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신성했고, 헤스티아의 무녀는 당시 일반여성은 물론 남성도 누리기 어려운 특권을 보장받았다.
그리스와 로마 사람이 헤스티아를 아낀 이유는 생활방식인 듯하다. 그리스 로마 사람들은 화로에 모여서 생활했다. 당시 기술로는 아무 곳에서나 불을 지피기 어려웠던 탓에, 화로는 식사와 방한 대책에 꼭 필요한 시설이었다. 헤스티아는 그런 화로를 상징하는 여신이었다. 자연히 헤스티아는 제우스만큼 격이 높았다. 그리스로마신화에서도 헤스티아는 제우스와 포세이돈도 손 대지 못한 처녀신으로 나온다. 그만큼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헤스티아와 화로를 중요하게 여겼다.
화로는 그리스와 로마 사람의 제삿상이기도 했다. 화로가 생활의 중심이었으니, 자연히 종교적인 행사도 화로에서 이뤄졌다. 결혼처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각 가정은 화로에 모여서 가문의 조상을 기렸다. 우리가 위패와 영정사진을 두고 절을 하듯이, 그 쪽 사람들도 조상을 상징하는 물건을 두고 화로에 제물을 바쳤다. 화로는 당시의 일상적인 종교 생활을 보여주는 주요 단서인 셈이다.
이를 보면 조상을 기리는 제사는 보편적인 일인 듯하다. 가족 구성원이 한 곳에 모여서 조상을 기억하는 일은 동아시아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동서양 모두 조상을 기리는 제사를 치렀을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가설은 제사를 통해 상징적인 불멸을 약속받으려 했다는 것이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죽음을 피하기 위해 행동한다고 이야기한다. 대표적으로 어니스트 베커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문명과 영웅주의의 동력이라고 진단했다. 셸던 솔로몬 등 후배 심리학자들은 베커의 주장을 다듬어서 공포관리이론으로 발전시켰는데, 이는 인간이 문화와 자존감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잊는다는 내용이다. 공포관리이론이 과장되었다는 반론도 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인간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폭넓게 인정받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많은 종교가 불멸을 약속한다. 통속적인 기독교는 천국에서 영생이 기다린다고 가르친다. 이슬람교도 비슷하다. 물론 실제로 논의되는 신학은 좀 더 복잡하지만, 많은 사람이 기독교하면 영생을 떠올리는 건 분명하다. 동아시아로 넘어오면서 대중화된 불교도 영혼이 영원히 윤회한다고 가르친다. 유교는 딱히 영혼 불멸을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기존 신앙을 다 부정하지는 않았다.
조상을 기리는 제사도 죽음에 대한 공포와 깊이 연관되어 있어 보인다. 동아시아 사람 뿐만 아니라 그리스와 로마 사람도 후손에게 긍정적으로 기억되기 위해 노력했다. 조선이 기록에 굉장히 집착한 것처럼, 그리스 로마 사람도 역사에 기록되는 일을 매우 명예롭게 여겼다. 명예는 가문의 역사를 통해 불멸을 얻기 위한 필요조건이었다. 이처럼 후손을 기르고 그 후손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문화권에서 산다면, 사람은 열심히 노력한 대가로 유산과 기억을 남길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조상을 기리는 제사는 불멸을 보장하기 위한 문화 장치다.
"불멸을 꿈꾸지 않고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은 없다."
- 키케로
2. 제사가 완전히 사라진다면.
제사가 사라진다는 말은 곧 은연 중에 불멸을 약속하던 문화 장치가 사라진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 특정 종교 공동체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맨몸으로 직면해야 한다. 공포관리이론에 따르면, 불멸을 약속하는 문화가 약해질 때 사람은 자존감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때로는 자신이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받기 위해 목숨까지 건다. 다시 말해, 사람은 죽음을 잊기 위해 영웅이 되려 한다.
우리나라는 공산국가만큼 세속적인 곳이다. 종교를 믿는 사람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심지어 매주 교회에 나가더라도, 무신론적인 사회 분위기 탓에 종교적 세계관을 진지하게 믿기 힘들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주변 사람에게 동화되기 위해 노력하기 마련이고, 관계주의적인 우리나라 사람은 그런 경향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제사를 지내는 집이 줄어든다. 애초에 자신을 좋은 부모로 기억해 줄 후손을 기르는 사람 자체가 줄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문화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자존감 높이기에 열중하는 일이다. 문제는 자존감 높이기가 무모한 행동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자존감에 상처 입은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증명하기 위해 무모해질 수 있다.
진화심리학자 마틴 데일리와 마고 윌슨은 살인 사건의 대부분이 지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리한 결과라고 진단했다. 자신을 응원해 줄 가족도 없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단도 마땅치 않다면, 남은 것은 옆에 있는 사람을 때리거나 죽여서 원시적으로 강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최근 묻지마 살인이나 흉기 난동이 잦은 이유도 설명된다. 과도한 경쟁과 격차 탓에 사회에서 퇴출되는 사람이 많다. 그 사람들에게 자존감을 지킬 수단이 무엇이 남아 있을까.
사회적 지위를 쟁취할 기회가 균등해도 문제는 해결되지는 않는다. 사람은 자존감을 키우기 위해 자신이 높은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끊임 없이 확인하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로 자존감을 지켜야 한다면, 사람은 누구든 자신의 비위를 맞춰주고 자신의 의견에 복종하기를 바랄 것이다.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실제로 여러 심리학자가 권력이 사람을 타락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런 경향이 자존감을 통해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려는 시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불평등한 우리나라에서 제사라는 문화가 사라진다면, 죽음을 잊게 해주는 것은 자존감 뿐이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주먹질로, 높은 사람은 갑질로 자존감을 결사옹위하려 할 수 있다. 물론 철학적 성찰에 익숙하거나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조금 과장하자면, 제사가 사라진 곳에는 피의 축제가 펼쳐질 것이다.
"현대인은 고대 이집트 파라오들만큼이나 자신의 유한성을 부정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모든 사람이 파라오들보다 훨씬 더 많은 온갖 기술을 손에 쥔 채 행동한다는 것이다."
- 어니스트 베커
3. 디스토피아 예방하기.
그렇다고 예전처럼 홍동백서에 따라 제삿상을 차려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지금까지 제사는 역사적인 근거가 없었고, 무엇보다 여성에게 불공정한 부담을 강요했다. 어쩌면, 지금까지 우리가 집안 여자들을 갈아넣으며 거창하게 제삿상을 차린 이유는 낮은 사회적 지위를 겉멋으로 감추기 위해서였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홍동백서가 아니라 제사 그 자체다. 죽고 싶지 않지만 영혼 불멸을 믿지 않는 우리에게는, 내 사진이 후손들에게 남고 내 유산이 후손들에게 전달된다는 감각을 매번 기억할 수 있게 돕는 종교 제의가 필요하다. 그 형식은 바뀌어도 상관 없다. 중요한 건 제사 그 자체다.
우리는 죽음을 잊기 위해 기억에 남을 만한 존재가 되고 싶어한다. 하지만 모두가 국가적인 영웅이 될 수는 없다. 대신, 내가 자란 가족의 영웅이 될 수는 있다. 여러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이런 소박한 영웅주의가 우리의 정신건강을 지켜 준다. 소박한 영웅주의를 지탱하는 행사가 무엇일까. 바로 집집마다 지내는 제사다.
생시몽이 지적한 것처럼 구습을 파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대체할 무언가가 필요하다. 지금 우리에게는 기존 제사를 대체해서 상징적인 불멸을 약속해 주는 것이 없다. 어쩌면 그 폐해는 우리 일상을 흔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너무 섣부르게 전통에서 벗어났다. 많은 여성이 전 부치기에서 해방되었지만, 대신 많은 사람이 자존감을 끝없이 높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처지에 놓였다. 낡은 제사는 사라져야 하지만, 다른 제사가 필요해 보인다. 죽음으로부터 무리하게 도망치지 않기 위해.
"울타리를 만든 이유를 모른다면, 부수지 말라."
- 길버트 체스터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