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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일, 꽤 괜찮은 하루의 단상

11시22분 피청구인 윤석렬 대통령을 파면한다.

by 분당주민

운전하고 가는 차 안. 시간은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동승자가 핸드폰으로 헌재의 결정문을 크게 틀어논다.

인용문을 읽는데만 20분이 넘게 걸릴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다.

박근혜 탄핵 때의 경험이다.

그날은 마포 사무실에 있었다.

10년의 시간 동안 2명의 대통령이 탄핵 당하는 순간은 정확히 11시 22분경이었다.


헌재의 탄핵이 결정되는 날이다.

아침 아무 일 없다는 듯 출근한다. 재수생 딸을 대성학원에 내려주고 사무실로 향한다.

어제 저녁 본부 회식에서 광화문 사무실 직원들이 재택을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일찍 좀 이야기 하지… 아니 그 생각을 미리 못한 내 잘 못일 수도 있다.

당연히 그렇게 하라고 한다. 내일 재택하라고.

예전 월드컵 당시 나는 경복궁역 인근 현대상선 본사 사무실에서 근무했었다.

그날 한국과 폴란드의 경기가 있던 날 집에 가지 못하고 결국 회사 인근 부대찌개 집에서 경기를 본 기억이 있다.

그때 기억이 났다. 주저하지 않고 재택을 컨펌한다.

강북 사무실 밀집지역이 광화문 일대이다 보니 많은 사무실이 재택을 선택한 모양이다.

아침에 차가 밀리지 않았다.


10시 30분에 삼성동에서 미팅이 있었다.

간단히 끝내고 양재동 점심장소로 이동한다. 이동하는 중에 윤석렬, 피청구인을 파면한다를 또렷하게 들었다.

박수가 나올만도 했는데 핸들을 잡은 두손은 나의 안전을 위해 그냥 두기로 한다.


양재동에 꽤 괜찮은 중식당이 최근 생겼다.

그곳에서 룸에서 6명이 식사를 한다. 간단히 맥주를 한잔씩 시키고 식사를 했다.

일 이야기 사는 이야기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한 농담들. 탄핵 이야기는 없다.

식당에 많은 사람들도 어느 때와 같다.

식당이 약간은 트랜디한 인테리어이고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이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탄핵의 느낌은 느껴지지 않는다.


사무실로 왔다.

일이 많았고 검토해야 할 사업이 산떠미다. 사무실에 들어오면서 절로 한숨이 나오는데 팀장 한명이 좋은 소식이 있다고 한다.

그가 하는 일은 글로벌사업이다. 1분기 실적이 엉망이라 좋은 소식이라 하니 그동안 애썼던 사업의 성과가 있는 것 같은 기대감이 생긴다.

뭘까요? 긍정적으로 물어본다. 상무님 외근 중에 탄핵되었어요. 이 한마디. 흠. 원하던 답변은 아니다.

내가 태극기부대, 윤석렬 지지자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물어본다. (회사에서는 정치, 종교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내 원칙이다.)

웃으며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탄핵 소식은 반가운거 아닌가요? 대답한다. 다행이다. 나를 상식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니.


일을 한다. 32인치 모니터에는 raw data와 그걸 가공한 보고서가 둥실둥실 떠있다.

오늘 안에 다 못할 것 같다. 주말에 나와서 해야겠다는 아주 쉬운 생각을 한다. 어떻게든 끝내고 주말에 쉴 생각을 하기 보다 더 쉬운 선택을 한다.

2시에 투자자문사 파트너와 미팅을 했다. 투자사들 관점에서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우리를 가치를 올려줄 지 조심스럽게 협의한다.

둘 다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다음 주 월요일 오후 투자자문사의 공식 의견을 받기로 한다. 다음주에 이 보고와 투자심의를 언제할지 다이어리를 본다.

3시에 부사장과 업무 회의를 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메일을 보내고 인상을 쓰며 보고서를 다듬는다.


일찍 퇴근했다. 일찍이라고 해도 법정근로시간은 준수한 시간이다. 아니다. 이번주 일 한 시간을 보면 금요일 하루 쯤은 점심먹고 들어가도 주 52시간을 채웠을 것이다.

퇴근하는 차 안에서 여러 통화를 한다. 차 안은 움직이는 또 다른 사무공간이다. 온전하게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정리하는 것은 사치이다.


탄핵도 되었는데 기분 좋게 청량한 생맥주 한잔이 생각난다.

그런데 어제 회식 때 술을 마신 전력과 탄핵일 아침 어제 술을 많이 마신 나를 비난하기 위해 보낸 집사람의 분노의 카톡 때문에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을 것 같다.

집사람이 좋아하는 불금인데 그래도 전화해서 한번 물어본다. 저녁 어떻게 할까요?

(애들 둘 다 학원 일정으로 둘이서 저녁을 먹을 때가 많다. 물론 일찍 퇴근하는 날 기준이기는 하다)

서판교에 아주 순대를 잘 다루는 집이 있다. 그곳에서 순대볶음을 먹기로 한다. 막걸리 한병은 확보된 것 같다.


집에서 집사람을 태우고 서판교로 이동 중에 오늘 본 유튜브에 화이트와인 이야기를 하다,

화이트 와인 한잔 할까?의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이 전달되어 바로 좌측에 보이는 더블트리로 차를 튼다.


화이트와인 한병을 시키고 분당이 내려다 보이는 21층에서 풍경을 조망한다.

탄핵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일상적인 하루의 이야기를 한다. 음식이 꽤 괜찮아서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쳤다.

와인잔이 부딪칠 때 소리가 탄핵이라고 잠깐 환청처럼 들리기는 했다.


집에 와서 씻고 틀어온 TV에서 보물섬 드라마를 한다. 탄핵일인데 드라마를 하네? 물어본다.

무정차했던 역들이 정상 운영되고 있다는 정부 문자들도 온다. 몇 시간 만에 일상으로 모두 돌아온 느낌이다.


오늘 꽤 괜찮은 하루였다. 그냥 꽤 괜찮은 4.4일 금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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