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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당주민 Feb 25. 2024

John Maynard KEYNES

존 메이너드 케인스, the price of peace

21세기에 있었던 정치적 대격변의 그 책임은 신자유주의에 있다고 하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금융시장의 힘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믿음은 2008년 금융위기를 남겼고, 

클린턴 집권 이후 세계화 중심의 각 주요 정부 정책은

상위 10%의 글로벌 엘리트의 경제이익을 우선한 결과 

세계 전체 부의 80%를 가져가는 시대를 만들었고

결국 인류가 겪는 경제적 문제를 분배의 문제, 즉 불평등의 문제로 귀결시켰다.


그리고 EU는 재정적 위기에 직면한 일부 EU 국가들에게 포퓰리즘과 같은

퍼주기 식의 정책이 위기를 야기했다고 보고 긴축재정으로 재정적자를 줄여

파괴적인 경기침체를 유도했다.


그 결과는 지역 산업의 파괴, 치솟는 실업률, 옹졸한 사회안전망과 함께

경제적 파탄을 몰고 왔고

일부 국가에서는 정치 기반을 위협하고 또 다른 국가들에서는 주류 보수주의로

잘 흡수된 네오파시스트 정당의 활력을 불어넣었다.

1930년대 이후 볼 수 없었던 극우 선동가의 시대가 21세기에 열린 것이다.

(프랑스 마린 르펜, 영국의 보리스 존슨,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가 예가 될 수 있겠다)


21세기에 발생한 문제가 2차 대전을 발발시킨 그 시절과 똑같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본다면 매우 유사한 형태로 생각될 수도 있다.


1차 대전 이후 독일에 부과된 과도한 배상금이 2차 대전의 씨앗이 된 점, 

패전 이후 과도한 배상금은

국가의 영광을 위해 국제적 화합을 거부하고 유럽전역에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야기하는 위협으로 전환된 점,

결국 유럽은 1년도 안되는 시간에

무솔리니 휘하의 파시스트 당원들이 로마로 행진하고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 폭동이 발생하게 된 상황과 난 매우 유사하다고 느낀다.


히틀러는 디플레이션의 결과물이고

독재자의 부상을 선택해야 하는 자연스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왜 극우선동가, 말도 안되고 상식적이지 않은 정치체계가 부상하는지

이해가 안된다면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책을 읽어보면 어느 정도는 그 의문점이 풀릴 것이다. 



20세기 초 벌어진 1,2차 세계대전 전후 그리고 대공항 시대에

가장 주목받고 중요한 학자였을 것이고 

지금 다시 케인스를 소환하는 것도

과거의 불행을 되풀이 하지 않고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불평등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아보려고 하는데 있다.



78년전, 1946년 부활절 휴일 시골길을 걷고 산책을 즐긴 후 부화절인 일요일 아침에 세상을 떠났다

<타임스>는 부고 기사에 그를 "애덤 스미스 이래 가장 위대한 경제학자"로 표현했다.


케인스는 자신의 경제학 연구에

심리학, 역사, 정치 이론을 융합했고 경제학 분야에서 전무후무한 방식으로 금융 상황을 주시했다.


경제학자로만 케인스를 정의하는건 불가하다.

케인스는 비트겐슈타인과 맞먹는 철학자였고

두 번의 세계대전을 쥐락펴락한 재무계의 영웅이었으며

위대한 계몽주의 인물들과 고대 화폐의 특이점을 발견한 역사가이자,

대중의 마음을 끓어오르게 하고 고무시킨 언론이면서

유명한 예술운동의 후원자였다.



케인스는 불황, 경제위기, 그리고 재정적자 키워드에서 많이 등장한다.

기본적으로 우리가 케인스에 대해 당연하게 알고 있는 사실은

불경기에 정부가 예산 적자를 감수하고 민간 부문이 할 수 없는 소비를 대신 해줘야 한다고

촉구했다는 것이고 우리가 당연하게 잘 모르는 것은 케인스는 전쟁과 평화의 철학자였고

정치 이론과 경제학, 윤리학을 하나의 문제로 고민했던 계몽주의의 마지막 지식인었다. 


케인스의 정책 처방을 간단히 정리하자면.

낮은 금리와 탄탄한 공공사업을 추진,

정부가 적자재정을 확대, 직접적으로 경제 "산출량"과 소비자 "구매력"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과

정부 지출을 통해 국민들의 구매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지출할 돈은 기존 수입이나 세수뿐 아니라 채권을 팔아서 충분히 조달할 수 있다.

실제 우리는 코로나 시기에 

정부가 만들어낸 새로운 돈을 소비자가 실제로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 보았다.

경기가 침체되면

정부는 자금을 빌려 유용한 사업에 지출해서 빨리 회복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

정부가 이렇게 자금을 쓰면 그 돈이 일반 시민의 몫으로 돌아가고

그러면 시민들은 다른 필요한 곳에 돈을 지출할 수가 있어서 총 경제규모가 확대되면서

발전적 회복을 이루게 되는데

이런식의 조치가

긴축 재정으로 실업자를 양산해서 전반적인 지출이 감소하는 하향곡선보다 

훨씬 낫다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다시 정리하자면,

정부가 수요를 촉진하고 소비자들이 더 많은 상품을 사게 만들어서

동일한 수준의 생산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과

시민들은 그들 주머니에 돈이 많을수록 더 많은 재화를 구입하고

사업가와 투자자들이 그런 경기부양 신호를 확인하고 다시 자신감을 얻고

경제발전에 필요한 위험을 감수하고 유용한 사업에 자금을 투입하여

불황을 타개하는 것이다.



금융시장이란 경제학자들이 교과서에서 설명한 것처럼 깔끔하고 질서정연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

시장가격의 변동은 개인의 이득을 추구하는 이성적인 행위자들이 축적한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불확실한 미래를 헤쳐 나가려는 결함을 가진 인간의 판단에 불과한 점을 들어

시장 안정은 균형점을 찾는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가 아니라

질서, 정당성, 신뢰를 유지하려는 정치권력에 의 해 더 많이 좌우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런 생각은 케인스의 최고 걸작인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 나오는

경제 이론의 중심 원칙이 된다.


시장은 수학 현상이 아닌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이 케인스의 결론이었다.

경제학은 물리학처럼 철직에 얽매인 딱딱한 학문이 아니라 정치처럼 관습, 경헙법칙, 조정이

필요한 유연한 분야였다.


케인스는 2번의 세계대전과 대공항 시대 이후 미국은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줄 경제사상의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 (책에서는 루즈벨트부터 오바마 시절까지 다룬다)

미국 정치계의 지지를 통해 새로운 국제 질서를 미국 중심으로 확립하기 위해

그리고 <일반이론>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각색했는데,

케인스는 미국의 문화를 경멸했고 미국 지식인들을 직관력이 없다고 무시했으나

역설적이게도 나중에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줄 경사사상의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준곳은 미국이었다.


근데 케인스는 전쟁이 아니었다면 경제학자가 되었을까?

전쟁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케인스는 케인스가 아닐 수도 있다.

런던에 상류층의 모임에나 참석해

웃고 떠들고 토론을 하는 그냥 잘 배운 상류층 사람 중 한사람으로 기억되었을 수도.

전쟁 전에 그는 일반적인 상황에서

정부는 시장에 개입하면 안 된다는 경제학자들의 생각에 동의했으나

그러나 전쟁 이후

경제 이슈는 근본적으로 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는 것과

시장경제란 국가와 무관한 채로 그 차제의 원칙에 따라 운영될 수 있는 

독립적 영역이 아닌 정치권력에 의해 정의되고 지원되어야 했다. 


정부의 간섭이 없는 자유시장 같은 것은 없었다.

자본주의 사상은 그 자체로 돈과 부채에 대한 규제처럼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관리가 필요했다.


그에게 자유시장은, 

시장이 스스로 조정된 다는 것은, 전쟁 중인 그리고 전후의 국가들은 감당할 수 없는 사치였을 것이다.


대공항 시대를 거치면서 미국의 루스벨트는 케인스 사상에 정치적 생명을 

불어 넣을 세계 정상으로 우뚝 설 수 있었고 케인스가 집필 중이던 학술서인

일반이론은 왜 뉴딜정책이 타당한지 설명되었고 한동안 이 이론의 유효함은 지속되는가 했는데,


서구 백인들의 우월성을 조장하는 인종적 근본주의와 결합한 보수주의는 

돈 많은 특수 이해관계자들의 후원과 함께 하이에크 '노예의 길' ,

프리드먼의 1962년 '자본주의와 자유'를 통해 그리고 매카시즘과 결합되어 진화를 거듭하다 

미국에서 로널드 레이건 시절에 자유방임, 신자유주의가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클린턴 시대에 이르러 전세계적으로 세계화의 탈을 쓰고

WTO같은 부유한 층의 경제적 이익을 대변할 정책을 만들어줄 국제단체가 

신자유주의에 활력을 넣었다.



그 결과 우리는 유래없는 경제적 불평의 시대에 진입했고

재정적자가 아닌 긴축을 통해 파괴적 경기침체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돈이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수단이다.

금이건 종이건 그 무엇이던, 어떤 물질을 돈으로 할 것인지, 

또한 어떤 물건을 국민과 정부가

유효한 지불 수단으로 받아들일 건지를 결정하는 주체는 국가였다는 역사의

경험적 사실은 결국 정치권력 없이 돈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관점에서,

정부의 개입없는(최소화) 경제의 유효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케인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인생을 더 품격있게 만드는 것들이었고

경제학이 할 일은 그런 품격 있는 것들을 얼마나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지 판단하는 것이고


인류가 당면한 정치적 문제가

경제적 효율성, 사회적 정의, 개인의 자유로 정리하자면

어떤 상황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이론적으로 타당해 보이기는 하나

대부분의 중산층의 인생을 품격있게 만드는 것이

신자유주의로만 이루어질 수 있을지 되물어야 할 시기가 온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이론은 

19세기 정부의 시스템보다 앞서간 미국의 자유주의, 자본주의를 동경한

유럽에서 미국으로 유입된 학자들로부터 토대가 되지 않았는가?


(번외로 책에서 몇가지를 뽑아 정리해 보자면)


단순히 케인스를 경제학자로 정의할 수는 없다.

케인스는 제국주의에 맞선 대영제국의 충실한 공무원이자 두 번의 세계대전에 자금 조달을 도운 평화주의자, 현대 민족국가의 지식구조를 마련한 국제주의자이자 경제학의 토대에 이의를 제기한 경제학자였다.

그는 인간의 자유와 정치적 구원을 위한 일관된 비전이 있었다.


1920년대 경제학자로서 평생 공식화하려고 애썼던 주목할 만한 통섭의 작업

어떻게 하면 버크의 실용적이고 위험 회피적이며, 반혁명적인 보수주의를 

루소의 급진적 민주주의의 이상과 조화를 이루게 할 수 있을까?

자유방임주의가 버크의 보수주의와 루소의 평등주의를 결합할 수 없는 경제이론이라는 것을

확인한 상태에서 케인스는 이를 가능케 하는 경제 이론을 연구하는 데 남은 생을 바치게 된다.

p. 242


케인스는 평등주의를 사회주의 사상으로는 해석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 발레리나와 결혼하고 러시아 레닌그라드에 갔을 때 남긴 글을 보면

사회주의라는 소련의 새로운 실험에 마음을 뺏겼지만

"잔인함과 어리석음"이 가득한 "억압적 분위기"에 탄식했다.

그들의 경제방식이 무엇이든 소련정부가 육성하는 삶의 방식에는 재미는 없었다.

설사 어떤 잘못이 있던 삶의 질을 알고 인류발전의 모든 씨앗을 옮기는

부르주아 지성인보다 천박한 프롤레타리아를 더 높이 평가하는 신조를 내가

어떻게 채택할 수 있겠는가?


평화의 경제적 결과

1919년 <평화의 경제적 결과, the economics consequences of peace>의 책에서

베르사유 조약 공격, 평화회의에서 영국 정부가 노린 은밀한 술책,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재정적 조치로 유럽의 경제가 몰락하고 독재정치와 전쟁으로 내몰릴 것을 전망

그리고 1922년 베르사유 조약 이후 대전에서 승리한 연합국과 패전한 독일이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 

성대한 외교행사에 제노바 회의에 참석.


과거의 죗값이 아무리 클지라도 나는 피로 얼룩진 유럽의 갈등이

계속되는 일에는 관여하지 않을 작정이네. 케인스가 친구에서 쓴 편지 중

패전국도 승전국도 채권단들이 보낸 돈이 유럽 재건 사업이나 

공공 원조 활동에 쓰일 리가 없었고 또 다른 전쟁의 씨앗이 될 만한 민족주의적 움직임에 주목했다.

1차 대전 이후 독일에 부과된 과도한 배상금이 2차 대전의 씨앗이 된 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을 듯

페이지 018

패전 이후 과도한 배상금은

국가의 영광을 위해 국제적 화합을 거부하고 유럽전역에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의 움직임을 야기하는 위협으로 전환되었다. 019

결국 유럽은 1년도 안되는 시간에

무솔리니 휘하의 파시스트 당원들이 로마로 행진하고

아돌프 히틀러가 뮌헨 폭동이 발생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디플레이션의 결과물

유럽은 물가상승과 독재자의 부상 중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

미국 농가는 혁명의 위기


전쟁은 불가피한 충돌이 아닌 거대한 실수라로 판단

윌슨은 세계대전이 단지 인간의 탐욕과 야망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구세계의 낡은 정치 체제가 낳은 산물

<평화의 경제적 결과>는

전쟁이 독단적 공격으로부터 문명을 구하는 정의로운 행위라는 주장을 약화시켰다.


친구들

버틀랜드 러셀

버지니아 울프, 여성 참정권 운동

앨프리드 마셜 (멘토, 첫 경제학 스승)

비트겐슈타인, 평생지기 친구, 1차대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위해 반대진영에서 싸운 기구한 운명

1917.9월 후기 인상파 에드가 드가 사망 > 유작 경매 > 

1918년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위

당시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1898년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일간지 로로르 1면에 당시 국제적 명성을 떨치던

작가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사설 발표, 독일군 간첩 누명을 쓴 드레취스 대위 무죄를 알림


vs.

오스트리아 루두비히 폰 미제스 1927

실업은 노동이 아닌 임금의 문제 . 고용주에게 그럴싸한 논리를 펼칠 수 있는 선물을 선사


현대 경제의 역사가 대륙 간 약탈의 부산물,

현대 금융 시스템이 교전국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개발되었다는 생각은

케인스에게 적대적이니 경제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수용


정부의 간섭이 없는 자유시장 같은 것은 없었다.

자본주의 사상은 그 자체로 돈과 부채에 대한 규제처럼 정부의 적극적인 경제관리가 필요했다.


한 사회의 총 저축액은 그 사회의 총 투자액과 같을 것이다.

화폐론에서

사람들이 부의 축적을 즉각적인 소비의 즐거움으로 포기하고

개인의 자발적인 금욕을 통해 힘들게 쌓아 올리는 절약으로 생각

하지만

금욕만으로는 도시를 발전시킬 수 없다는 사실

세계의 재산들을 지어 올리고 개선하는 주체는 기업

기업이 움직이면 절약 행위가 어떤 식으로 이뤄지든 부는 축적된다.


은행의 역할은

사회의 저축이 사회의 투자 역량에 완벽히 부합되도록 하는 것


과잉투자와 과소투자의 불균형을 조정할 수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은 없다.


1919.12.12 출판 평화의 경제적 결과는

대영제국에 대한 케인스의 짓밟힌 이상과 타협하고자 쓴 첫 번째 저작물

제국의 리더들은 매 순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정복과 지배에 사로잡혀 있었다.

* 평화의 경제적 결과

오늘날까지도 획기적인 정치 이론서이자 감정적으로도 설득력이 강한 경제서 중 하나.


케인스는 칼 마르크스처럼 향후 자본주의에 엄청난 위기가 발생할 것으로 예측

레닌처럼 제국주의적 세계 질서가 마침내 한계에 도달했다고 믿음

> 이 모든 위기는 약간의 호의와 협력만 있으면 해결될 수 있다고 믿음, 올바른 리더십 필요


영국이 지정학적 영향력을 상실한 계기는 전쟁

전쟁으로 영국은 채권국의 지위에서 해외에서 원조의 손길을 찾게 되었고

외국에 대한 의존력이 커짐

영국에 전쟁 자금을 대줄 유일한 나라는 미국

미국 특히 JP모건은 돈을 정치권력으로 바꾸는 요령


경제학은 확고부동한 자연의 법칙에 대한 냉혹한 과학적 탐색이 아니고

인간이 택한 정치방식의 동향에 대한 일련의 관측일 뿐

학문으로서 경제학은 인간의 사회적 행동에 맞춰 나가야 했고

그런 만큼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다.

경제 법칙은 사실을 규정하지 않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만 알려준다.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은 서구 문자로 쓰인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홉스, 에드먼드 버크, 칼 마르크스가 남긴

기념비적 업적과 어꺠를 나란히 하는 사회, 정치사상의 걸작.

민주주의와 권력의 이론이자 심리학과 역사적 변화의 이론이며 

사상의 힘에 대한 러브레터.

<일반이론>은 권력의 필요성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책.

인류의 번영은 정치적 리더십에 의해 조정되고 유지되어야 한다는 

명확하고 단순한 진리를 증명


가장 많이 인용되는 케인스의 극단적인 예시, 장하준 교수도 인용

만약 재무부가 낡은 병에 지폐를 가득 채워서 폐광 깊숙이 묻고

쓰레기 더미로 덮은 다음, 이후 성숙한 자유방임주의 원칙에 따라

민간 기업에 그것을 다시 파내라고 하면,

더 이상 실업은 없어지고 그 파급효과로 공동체의 실질 소득과 재산이

실제보다 훨씬 더 커지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 그러나 마르크스 혁명처럼 고통과 혼란을 초래하지 않도록

사회를 천천히 그리고 평화적으로 탈바꿈하려고 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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