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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찬 Jul 25. 2024

나는 왜 자퇴하는가

L’HOMME RÉVOLTÉ

2023년 2월, 나는 초록 배낭을 들쳐 메고 파리행 편도 티켓을 손에 쥔 채 비행기에 올랐다. 내가 꿈꿔온 순간이었다. 그러나 자리에 앉자 순간 모든 게 낯설게 느껴졌다. 더이상 무를 수도 없었다. 관광 아닌 여행은 필수라고, 단 한 번은 해야만 하는, 여행자로 태어난 우리의 의무라고 큰소리치던 나는 사라지고 막연한 두려움만이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혼자서 가는 건 위험하다고 말리던 사람들, 그렇게 가본들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돌아올 거라고 비웃던 사람들, 지금 여행갈 때가 아니라며 겁주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나는 불안에 떨었다. 갑자기 어딘가 아픈 것 같기도 했다.


비행기에 오른 지 7시간 정도 되었을까. 날 괴롭히던 불안도 기력을 다했다. 눈을 감고 천천히 생각했다. 나는 그저 내가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떠나온 것뿐이었다. 내 생각은 거칠고 불완전했다. 여전히 그렇다. 그러나 나는 다가올 모든 여정을 받아들이겠다는 열린 마음과 함께했다. 지금도 그렇다.


우리는 생존배낭을 들쳐 메고 우리다운 삶으로 향하는 편도 티켓을 손에 쥔 채 서 있다. 우리의 임무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치 않는지 제대로 아는 것이다. 나는 내게 물어야 한다. 왜 대학에 가려했던가? 내게 대학은 무엇인가? 나다운 삶에 대학 졸업장이 진정 필요한 것인가?


십 대의 나는 명문대에 진학한 나를 꿈꿨다. 자랑스러운 과잠을 입고 교환학생을 다니며 어떤 사람들 앞에 가도 기죽지 않는 나의 모습. 그러나 진실은 언제나 잔인하다. 나는 ‘너’보다 우월한 나의 모습을 욕망했었다. 나는 대학을 내 우월함을 확인시켜 주는 공식기관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다 실패했다. 작은 실패를 겪은 나는 대학이라는 공동체에 속한 나를 꿈꿨다. 공동체 없이 이 사회를 살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 뜻깊은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부족함을 그대로 긍정하는 참된 공동체가 나는 간절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뜨거운 가슴으로 지성을 나눌 수 있는 공동체가 한 인간의 삶에 있어서 참 귀한 것임을 나는 나의 작은 실패 덕에 깨쳤다.


작년 2학기, 나는 학비를 벌어가며 학교를 다녔다. 약 80만 원씩 4번을 나눠내는 동안 나는 내 대학생활의 무게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일주일 중 4일을 등교하고, 4일을 아르바이트에 시간을 쏟으며 4개월을 보냈다. 학기를 마친 나는 어떤 모습이었나. 지난겨울, 심신은 지쳤고 체중은 10kg 늘었다. 얼굴은 부었고 배낭 여행하며 짓던 자연스러운 웃음은 사라졌다. 내가 좋아하는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겠다는 기대도 무너졌다. 나는 무기력했고 냉소를 머금었다. 침묵이 자연스러운 교실, 경직된 학우들, 고등학교와 다를 바 없던 수업방식. 수업의 주도권은 대부분 학생이 아닌 교수들이 쥐고 있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던 짧은 밤들과 취업 준비 기간에만 대학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느끼는 것 아닌지 생각했다. 그것이 진정한 소속감이던가? 그렇지 않다. 나는 여러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에게 물었다.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나는 대학들과 학생들의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확신했다.


사람들은 인생의 길을 모두 알고 있다는 듯 걷는다. 사실 이 시스템과 시장이 늘어놓은 고작 몇 가지 중 하나일 뿐인 길을 본인의 자유의지대로 걷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것이 숙명인 양 받아들인다. 안정되었다고들 말하는 그 길들을 누가 늘어놓았는가? 진정 우리를 위한 길인가? 이 체제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은 아닌가? 지금의 우리 사회가 어떤 나의 모습을 길러내고 있는가? 나는 물어야 한다.


눈을 감고 천천히 생각했다.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진보를 표방하는 작은 언론사에 취직한 내가 보인다. 내 저널리즘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상사는 너 같은 놈 쌔고 쌨다며 회사의 틀에 나를 맞추려 애쓰고 있다. 저항하는 법을 잊은 나는 생계라는 벽 앞에서 내 생각보다 회사와 광고주, 곧 자본의 생각을 따른다. 취재를 다니고 글 쓰는 일에 나는 작은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내 어깨를 짓누르는 어떤 힘에 의해 나는 늘 불편하기만 하다. 퇴근 후 병맥주를 마시다 배낭여행을 하던 이십 대 초반의 나를 떠올린다. 열려 있던 마음은 닫힌 지 오래다. 세대와 인종과 국적을 불문하고 말을 걸고 대화를 나누며 부딪치던 나의 모습은 사라졌다. 목적지 없이 떠난 소중했던 나의 여행은 스펙의 한 장으로 이미 써먹어버렸다. 어느 순간 나는 내 졸렬한 기득권이라도 지키고자 만나는 사람만 만난다. 내 사람 관계는 점점 동질화되고 이익집단화 되었다. 건수를 터트리고 승진하는 것이 내 삶의 가장 큰 목적이다. 나는 사회적 역할을 하는 기자가 아니라 직장인일 뿐이다. 보통의 직장인이라서 문제가 아니라 내가 원하지 않던 삶이라서 문제다. 소셜 미디어 속 그때 그 시절 사람들의 인생을 훑어본다. 자신만의 다른 길로 꿋꿋이 걸어간 이의 행복한 얼굴이 부럽다. 질투가 나고 화가 난다. 좋은 모습만 올리는 거겠지, 아직도 세상을 모른다며 애써 무시한다. 나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 사진이 보인다. 사람이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까, 일상의 틈새에서 작은 행복 누리면서 사는 게 내게 맞지, 나는 아무 의미 없는 합리화로 스스로를 기만한다.


나는 거부한다. 익숙한 길을 선택하고 그 대가로 체념과 냉소를 떠안고 살아가야 하는 삶을 나는 거부한다. 나는 나답게 살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런 내게 세상이 요구하는 삶은 너무나도 작다. 나는 다시 눈을 감고 천천히 생각한다. 아까와 같이 구체적인 모습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 무엇도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일까. 그래, 내가 실패하지 말아야 할 대단한 이유가 있던가? 없다. 내가 성공하지 못할 이유가 있던가? 없다.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하며 나는 살아가리라. 비로소 그것은 내게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나는 이 자유가 좋다. 자유와 함께 품에 안아야 할 불확실함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마음이 절로 든다.


헤밍웨이는 글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 지금까지 죽 써온 글이니까 이제 곧 쓰게 될 거야. 정말로 진실한 문장 하나만 쓰면 돼. 그래, 지금까지 알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진실하다고 생각되는 문장을 한번 써보는 거야.’ 헤밍웨이는 이어서 말한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정말로 진실한 문장 하나를 쓰게 되면,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어렵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거나 어디선가 읽었던, 그것도 아니면 누군가한테서 들었던 이야기 중에 진실한 문장 하나는 꼭 있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이야기를 공들여서 꾸미기 시작하거나, 새로운 무언가를 사람들에게 알려주거나 보여주려는 사람처럼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런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미사여구는 모두 다 잘라내 버리고, 맨 처음에 썼던 진실하고 간결하며 명료한 문장으로 돌아가 글을 다시 쓸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허영심과 가식으로 가득 차 있던 나의 삶을 거부한다. 세계와 나 자신을 직시한 내게, 대학 자퇴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된 행동이다. 큰 일은 아니다. 난 여전히 내 삶에 열정을 가지고 있고 누구보다도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니까. 달라진 것은 없다.


나는 이제 인간으로서 실력을 기른다. 쉽게 지치지 않는 체력을 쌓는다. 정직한 노동을 하고 그에 걸맞은 보수를 받으려 노력한다. 소중한 노동의 가치가 퇴색되지 않도록 현실적인 경제관념과 적절한 소비습관을 갖춘다. 열린 마음으로 현실을 긍정하되 그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나의 길을 뚜벅뚜벅 걷는다. 생생한 가슴으로 살아가기 위해 건강한 문화생활을 영위한다. 나다운 옷을 입고 시대와 내게 꼭 필요한 좋은 책을 가려보고  제대로 읽는다. 스스로 제 앞가림할 줄 알되, 타인을 향한 관심을 놓지 않는다. 진정한 자기 실력을 쌓고 나서 나와 같은 주파수로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한다. 우리는 저항한다. 나를 나답게 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에 저항한다. 저항이라는 공통된 토대 위에서 우리는 서로 삶을 나눈다. 신뢰의 바탕 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는 자유롭고 성숙한 사랑을, 친구들과는 참된 우정을 나눈다. 우리는 이익이 아니라 신념으로 모이기 때문에 모이는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다.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너무 많은 말을 했나, 고민하다 창밖을 바라본다. 세찬 소나기가 내린다. 빗줄기가 먼지 앉은 거리를 쓸어내린다. 사람들은 갑자기 쏟아진 비를 피해 이리저리 뛰어간다. 내 삶에도 다시 비가 내린다. 내 온몸을 적신 비가 먼지 앉은 지난날을 정리한다. 나는 다시 길을 잃는다. 나는 알고 있다.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


내가 이 불안한 그래서 생생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자신만의 길을 용기 있게 걸어간 많은 삶들 덕분이었다. 나의 좋은 점은 모두 그들에게서 왔다. 나는 다시, 이 세상에 홀로 존재할 수는 없음을 깨친다. 긴 호흡으로, 그들의 두 눈을 마주치고 육성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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