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아빠 생신에는 뭐 안 할 거야?"
남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지난 5월 엄마 생신을 온 가족이 꽤나 시끌벅적 기분 좋게 보냈고 동생은 그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는 듯했다. 다가오는 아빠 생신 때는 뭘 해 드려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다. 엄마 생신과 똑같이 해 드리면 재미가 없으니 무언가 특별하고 재미있고 다 같이 행복한 이벤트를 해야 한다. 기억에 남는 생일을 위해 이것저것 찾아본다. 매년 비슷했던 부모님의 생신을 특별한 기억으로 만들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한 건 엄마의 생신을 앞두고였다.
올해 1월, 엄마가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으신 후 자연스럽게 가족들의 삶은 조금씩 변했다. 모든 가족들이 그런지는 알 순 없지만 나로서는 엄마에게 하는 이야기와는 다르게 불안함과 조급함과 걱정과 미안함 등등의 부정적인 감정들이 수시로 밀려왔고, 꾸준한 관리로 치매 증상을 늦출 수 있다는 희망과 너무 늦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비롯한 긍정적인 감정들은 마치 부정적인 감정의 바다 한가운데 망망대해에서 바람에 의지해 떠다니는 작은 돛단배같이 작고 초라했다. 잿빛 감정의 바다는 언제고 '긍정적인 마음을 유지하자'는 '생각'의 초라한 돛단배를 금방이라도 집어삼킬 기세였다. 억지로 힘을 내어 무언가를 했다간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질 것 같아, 힘을 빼고 바람의 흐름에 맡긴 채, 위태롭게 한동안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엄마가 봄을 맞으러 시골로 내려가신 직후 기다렸다는 듯 3년 전에 생겼던 갑상선의 혹이 다시 생겼다. 냥이는 입원을 했었고, 회사는 여전히 변하는 것 없이 일관되게 일방적인 연봉 협상을 통보했고, 분주한 마음과 여유 없는 지갑 사정을 핑계로 나는 조금씩 천천히 따로 준비해 오던 일을 중단했다. 일을 도와주던 분께 이런저런 사정으로 당분간 일을 진행하지 못하겠다고 어렵게 말을 꺼낸 날, 조금이라도 불편한 내색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그분은 '일의 시작은 정한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시작되는 법'이라는 말로 나를 위로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민했고 조급했다. 마음이 늘 바빴고 닥친 사건(?)들을 하나씩 처리해 나가야 했기에 차분한 척, 긍정적인 척, 괜찮은 척했지만 나도 모르게 땅을 파고 들어갈 듯 다운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쁘고 불안한 마음 덕분에 엄마의 생신을 여느 해와는 다르게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일이라고 뭔가 특별하게 보내는 게 익숙하지 않은 우리 가족이라, 엄마 아빠의 칠순 때를 제외하곤 매년 비슷하게 '다 같이 모여 식사나 한 끼' 하는 정도가 전부였다. 그런데 앞으로는 그렇게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주어진 시간을 알 수 없기에, 시간과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우리는 최대한 행복해야 하고 즐거워야 하고 그래서 기억에 오래오래 남는 시간들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별해야 할 엄마의 생일 파티를 일찌감치 준비했다. 주인공도, 보는 사람도 즐거울 돈벼락 상자를 친한 동생에게 제작 주문하고, 예쁜 것을 좋아하는 엄마만을 위한 꽃앙금 케이크도 주문했다. 전체적인 색감은 엄마가 좋아하는 핑크로 부탁했다. 줄을 잡아당겨 돈벼락을 맞은 한국 나이를 고집하는 78세의 엄마는,
“이렇게 잘해주고 나 팔순 때는 어떻게 하려고 그래?"라며 함박웃음을 지었고, 나는 마음속으로
‘그때까지 온전한 정신으로 건강하게만 지내줘'
라고 부탁했다. 몇 번의 울음을 용케 잘 참아내는 듯 보였던 엄마는 손 편지를 읽다가 결국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눈물을 흘리셨고 그런 엄마를 보듬어주다, 놀리다가 그렇게 다 같이 푸짐하고 풍성하게 웃고 울며 떠들며 저녁을 먹었다.
파티가 끝난 후 엄마는 상자를 고이고이 처음의 모양처럼 잘 포장하여 보관하시겠다 하셨고, 상자 안에 들어 있던 종이들도 다 주워 모아 빈 병에 담아 엄마만의 진열대에 올려두셨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1박 2일 짧고 알차게 호캉스를 다녀왔다.
엄마의 생신을 보내고 뿌듯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때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나빠 보이는 많은 일들이 어쩌면 '신의 배려'가 아닐까 생각했다.
어쩌면 놓치고 살았을, 그래서 아마도 엄마를, 아빠를 보낸 후에 후회만 남아 괴로울 나를 위해, 지금이라도 각성하고 부모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라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좋은 추억들을 만들라는 '신의 배려'.
아지를 데려온 지 6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보기 드물게 중형견 슬개골 탈구 수술을 한 번 했고 그 이후 딱히 크게 아프지 않아서 아지와 냥이의 건강에 많이 신경을 쓰지 않고 살았던 나에게, 냥이의 입원은 어쩌면 아이들의 건강을 좀 더 신경 쓰라고 미리 알려주는 '신의 배려'.
부모님도, 아지냥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건강해야 가족도 챙길 수 있다는 걸, 나의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갑상선 혹을 통해 알려주고, 바로 다니던 대학병원을 예약해 진료를 받고, 또 건강검진 예약을 한 것도 '신의 배려'..
어쩌면 모든 순간 나는 보이지 않는 신의 배려와 사랑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기에 모든 순간, 모든 것에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인지 나는 고요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읽은 책의 구절들을 통해 나는 한동안 머릿속으로만 맴돌던 생각들을 정리한다.
'이럴 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라고 고민만 하지 말고 주의 깊게 마음을 지켜보라. 내 앞에 펼쳐지는 삶을 해석하거나 분별하지 말고 전체적으로 지켜보라. 지켜보는 관조가 예민해지고 깊어지는 순간 마음의 메시지를 듣게 되거나 혹은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다. 기도나 절을 하고 싶을 수도 있고, 아니면 무언가를 저질러볼까 하는 생각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하라. 주의 깊게 지켜보면서 매 순간 주어진 삶을 살라. 운이 좋다면 삶의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알아챌 수도 있다.
기적은 아주 사소하게 우리 삶에 등장한다. 진리도, 변화도, 깨달음도 그렇다. 언제나 정점을 지나는 일은 놀라울 만큼 조용하고 차분하고 미세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우리 삶에 엄청난 진리가, 부처가, 신이 봄바람 불듯 살며시 왔다가 살며시 몇 번이고 우리 존재를 스쳤을 터이다. 때문에 깊이 있게 삶을 지켜보아야 놓치지 않을 수 있다.
지혜로운 이는 아픔과 좌절 속에서 부처님의 자비로운 이끎과 신의 사랑스러운 도우심을 본다.
즐거움이 오든 괴로움이 오든 그것은 한 줄기 바람이 내 존재 위를 스쳐 가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즐거운 것도 괴로운 것도 아닌 '어떤 인연'이 잠시 오고 가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들뜰 것도, 가라앉을 것도 없는 것이다.
- 법상 스님의 날마다 해피엔딩 중 -
나의 어떠함으로 힘주고 애쓰기보다 힘을 빼고 내맡긴 채 바다가 고요해지길 기다리고 나니, 집어삼킬 듯하던 너울들이 지나간 후 조금 잠잠해진 느낌이다. 위태로웠던 돛단배는 파도에 떠밀려 나는 어느새 가고자 하던 길을 향해 제법 많이 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삶의 순간순간, 구석구석 삶을 주의 깊게 지켜보며 '신의 배려'를 느껴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는, 결국 원하는 목적지에 다다를 것이라는 것 또한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