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의 자의식이 강한 화가
이런저런 이유로 어딘가 우울해질 때에 생각나는 그림이 있다. 날개 접은 천사가 턱을 괴고 우울한 표정으로 양 쪽 날개를 접고 앉아 있는 그림이다. 조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천사 너머 하늘에서 빛이 비치고 무지개가 피어나니 우울과 영광은 한 끗 차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이 에칭 판화의 작가는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다재다능했던 독일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는 전지전능한 신을 표방한 자화상으로 유명한데, 이 우울한 천사의 그림은 뒤러의 정신적 자화상 같다. 뒤러는 회화에서도 높은 성취를 이뤘지만 특히, 판화를 독립적인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오직 선만으로 만들어낸 이 복잡한 아름다움을 보고 있자면 북구 화가들의 집요한 세계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그가 태어난 뉘른베르크는 15세기 유럽의 예술 및 상업의 중심지이자 출판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제작된 뒤러 판화의 예술적인 기교는 대중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수집가들을 위한 마스터피스로 이전시대의 작업들보다 훨씬 더 뛰어났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아버지가 금세공사였고 그 역시 화가의 길로 들어서기 전에 금세공 기술을 익혔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그의 판화는 기술적 기교에만 그치지 않는다. 미술사학자들은 그의 판화가 최고 수준의 예술적 기술과 지적 능력이 통합되어 있는 결정체라고 말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르네상스의 천재로 불리는 것처럼 뒤러 역시 또 다른 르네상스의 천재였다. 그는 르네상스 인간 비율에 관한 논문이나 예술가들에게 필요한 수학적이고 실용적인 도구로써의 기하학에 관한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가톨릭과 루터교 학자들 모두와 교류했다. 그리고 그의 판화는 이러한 그의 엄청난 지적 능력과 평생에 걸친 창작에 대한 열정을 보여준다.
이렇게 열정적이었던 뒤러가 1502년과 1503년에 제작한 판화, <네메시스>와 <죽음의 문장>에 또다시 날개가 등장한다. 판화를 잘 살펴보면 묘사된 날개가 너무 화려하고 정교해서 신기함이 느껴진다. 아마도 새의 날개를 참고해서 그리지 않았을까?
뒤러가 그린 그림 중에 푸른 비둘기의 날개(Der Flügel einer Blauracke)라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될 것 같다.
이 화려한 색깔의 비둘기 날개 그림을 보면 뒤러의 날개들이 그저 그의 상상이나 천재성만으로 완성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날개 하나 허투루 그리지 않기 위해 새의 날개를 관찰하고 참고하여 짧은 깃털과 긴 깃털이 어떻게 겹치는지, 뼈에 가까운 깃털과 솜털이 어떻게 그려지는지 연구하여 그려낸 것이다. 세밀한 묘사를 하는 판화는 엄청난 성실성을 요구한다. 뒤러의 판화 속에 세밀하게 묘사된 날개와 그가 더 나은 표현을 위해 관찰해서 그린 그림들을 보면 노력하는 천재가 이룬 대단한 업적을 실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