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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로소로 Jan 23. 2024

서울깍쟁이


창으로 들어오는 뜨거운 햇살만큼 월드컵 열기는 가득 찼고 빨간 티셔츠 입은 붉은 악마들은 강의실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교수님도 어쩔 수 없는지 설계도 초안을 잡은 사람부터 시청으로 달려가라는 말에 환호성이 들린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던 경아는 일찍 가긴 글렀다 탄식이 나오며 컴퓨터 화면과 마우스를 연신 움직여 본다. 야간작업 당첨이구나 노동요를 부르며 3D프로그램 대신 머리를 식힐 겸 아이러브스쿨에 접속했다. 



연신 들락거린 쪽지함은 여고 동창들만 간간이 안부를 물어왔고 풋풋한 20대 뭐 하나 걸려들어라 쪽지함을 두 손 모아 클릭한다. 제발 한 통 와라 우주의 기운을 모아 실눈을 떠본다. 쪽지함에 최진영 세 글자를 보자 눈을 다시 한번 비비며 숨이 멈췄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 최진영 10년이 지나도 선명하게 남은 아이의 쪽지가 있었다. 서울깍쟁이 잘 지내나? 내다 최진영 나 기억나나? 기억나면 쪽지 보내라. 함 얼굴 보자. 여전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너를 어찌 잊겠냐 그 시절 어린 나이에 잔망스러운 소녀 짓을 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경아는 얼굴이 화끈거려 붉어졌다. 



진영이 전학해 왔던 그 순간부터 설레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개구쟁이 같은 눈망울로 씩 웃는 모습이 어찌나 좋았던지 내 짝이길 바랐지만 보기 좋게 단짝 은주의 짝꿍이 되었다. 사회시간에 내어준 마을 지도 그리기 숙제를 핑계로 동네 계곡으로 코펠과 버너를 챙겨 친구들과 라면을 끓여 먹고 학급 임원 나가려 함께한 시간이 쌓여갈수록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마음을 모를 리 없는 네가 미웠지만 웃는 모습을 보면 그냥 녹아버렸다. 큰마음을 먹고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떨리는 마음에 너에게 전화를 걸어 좋아한다 말했지만 보기 좋기 차여 마음이 아팠다. 넌 이미 단짝 친구 은주에게 마음이 있었다. 고백을 할 거라는 날벼락같은 소리를 하며 도와달라는 말을 했고 마음이 너무 아렸지만 곁에 있고 싶어 알았다고 했다. 



진영과 은주는 초등학교 시절을 만나다 헤어졌고 우리 셋은 같은 중학교 남녀공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콩나물시루 같은 버스 속에서 만나면 여전히 설레고 눈인사도 못하는 나였는데 넌 짓궂게 가방을 일부러 툭 치고 지나갔고 그마저도 좋았다. 어쩌다 학교 운동장 아이들 속에 한눈에 들어오는 너를 알아볼 수 있었다. 눈썹이 씰룩 올라가며 네가 웃으면 그날은 영어시험을 망처도 종일 솜사탕 같이 달콤한 기분이 좋았다. 



좋은 설렘은 오래가지 못하고 부모님 사업을 접으면서 갑자기 서울로 이사하게 될 거란 부모님의 말씀에 마음이 급해졌다. 엄마에게 매일매일을 졸라 책가방을 바꿔 달라 했고 부산에서 급작스럽게 서울로 가는 사춘기 소녀의 투정으로 바꿔주셨다. 덩치에 맞지 않은 검은색 큰 백팩에 파란색으로 새겨진 라피도 가방을 메고 김건모 테이프를 포장해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한번 마주치길 바라는 마음은 이사 가기 며칠 전에 이루어졌고 그마저 건너편에 있어서 테이프를 전해주지 못했지만 넌 내 가방을 보더니 씩 웃으며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친했던 친구들은 그제야 내가 덩치에 맞지 않는 가방을 메고 다녔는지 눈치를 채면서 손가락질하며 놀렸다. 아무 말도 전하지 못하고 친구에게 테이프만 전해달라 부탁하고 서울로 이사를 갔다. 



그랬던 너에게 쪽지가 오다니 믿기지 않아 단숨에 쪽지를 보냈다. 진영은 부산에 있지 않고 지금은 강원도 인제에 있다며 다음 달 휴가 가는 길에 꼭 만나자고 했다. 손꼽아 기다리는 그날 흰색 블라우스에 청치마를 입고 처음으로 살구색 립스틱도 발랐다. 동서울 터미널은 초록색 군복 입은 또래 남자들이 많았다. 군복이라는 옷만 달리 입었는데 누가 진영일까 어색하고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 립스틱은 진작에 지워졌고 어쩔 줄 모르는 손은 핸드백을 질끈 잡고 아닌 척 도도하게 있었다. 



눈앞에 훤칠하게 키가 커버린 진영이 멈췄다. 눈빛이 어색해 땅을 바라보자 까맣고 반들반들한 군화 속 미소 짓고 있는 내 입술이 비친다. 우렁찬 충성 인사와 빨간 장미 한 송이를 건네며 반갑다고 인사하는 모습은 어린 시절 그대로 천진했다. 진영은 서울말이 귀엽다며 서울깍쟁이가 다 되었구나! 그때 말도 없이 이사 갔냐고 나를 채근하며 우린 근처 커피숍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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