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주의로 허무하게 날려버린 하루
22. 12. 23: Day 8,
커튼 사이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에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고대로 다시 엎어졌다.
다리는 잘만 움직이는데, 어깨가 결린 듯한 느낌. 야구를 하며 공 100개를 던져도 말짱한 내 어깨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뻐근거렸다. 큰 문제가 생긴 게 분명했다.
천만 다행히도, 어깨에 힘을 주면 근육이 팽팽히 당겨오는 것으로 보아, 어깨 자체에 문제는 없는 듯했다. 확인해 본 결과, 정확히는 어깨가 아니라 어깨를 잡아주고 있는 피부들이 늘어나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인가.
가볍게 어깨를 몇 번 털어내자 가동범위가 확보되었고, 그대로 팔을 들어 올려 어깨 죽지를 쓸어내리니 매끈해야 할 피부에 이물감이 느껴졌다. 등을 벅벅 긁어댔더니 손에 묻어나는 하얀 가루들. 겨울철 버짐이 생기면 나타나는 증상과 유사하게, 피부의 경계마다 입으로 잘못 뜯어낸 비닐 포장지 같은 하얀 피부 조각들이 나풀대고 있었다.
어찌어찌 몸을 일으켜 침대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자, 전신이 짜릿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격통이 인사를 건네왔고, 나는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침대에 다시 한번 엎어졌다.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었던, 날카로운 바위에 찍혀 반으로 갈라졌던 뒤꿈치의 상처가 악화된 모양이었고 (발가락 두 개가 솟아나기라도 한 듯한 끔찍한 비주얼이었다). 그렇게 하얀 가루의 원인은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까치발을 디디며 샤워를 하러 몸을 움직였다.
따스한 물을 맞으니 피로가 가시는 듯했고, 고통도 차차 잦아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또한 오판이었으니... 몇 분쯤 지났을까. 등이 조금씩 화끈거리기 시작했고, 이내 열탕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따가움이 상반신을 덮쳐왔다.
급히 수도꼭지를 틀어 찬물로 샤워를 마쳤지만, 이미 말썽인 피부에 뜨거운 물을 들이부었으니 상태가 악화되었으면 악화되었지, 좋아졌을 리가 만무했고, 그렇게 나는 실로 오래간만에 화상을 입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양치질을 하며 거울에 등을 비춰보니 이미 검을 대로 검어진 피부가 씨뻘겋게 물들어 있었고, 그 적흑색 경계에 하얀 피부 조각들이 내려앉아 있었다. 술 취한 회사원 같은 붉은 얼굴은 덤이었다.
선크림을 바르는 것이 피부 건강을 위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구멍을 막아버리는 듯한 그 소름 끼치는 감각과 흘러내릴 때의 끈적거림을 극도로 혐오하기에, 나는 평상시 선크림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특별히 날이 덥거나 유독 햇살이 강하면 모를까.
이러한 연유로 나는 유학 오기 한참 전부터 서양 사람들은 구릿빛(내 피부는 흙빛에 가깝지만, 가끔 청학동이나 동남아시아에서 자란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곤 하지만.) 피부를 선호한다는 자기 합리화를 하며, 자칫하면 피부암에 걸릴 수도 있다는 부모님의 경고를 무시한 채, 피부를 태워왔다. 가끔 걱정해 주는 친구들에게도 과학적으로 검은색이 빛을 더 많이 흡수하니 나는 앞으로 더더욱 까매질 날만이 남았고, 내 옆에 있으면 너네는 타지 않겠다는 자조 섞인 농담을 던져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떠나는 첫 해외여행인 만큼, 이번에는 돌발 상황을 최소화하겠다는 일념 아래 선크림을 꾸준히 발라왔고,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내가. 아침에 마주한 현실은 선크림 통에 적힌 Waterproof for 80 minutes를 믿어서는 안 됐었다는 것. 물론 그렇게 철저한 사람은 못 되는지라 80분마다 선크림을 바르지는 않았다. 내가 너무 적은 양을 발랐을 수도, 아니면 선크림을 한번 바른 후 다음 바르기까지의 시간 동안에 화상을 입었을 수도, 결과적으로, 안일하게 생각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이빙 슈트를 입은 채 입수했던 마지막 스노클링을 제외하고 나는 물에 들어가기 전에 꼭 선크림을 발랐으며, 물에 머물렀던 시간도 분명 80분을 초과하지는 않았다. 곰곰이 어제의 기억을 되짚어보자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1. 입수 전 팔을 힐끔 봤을 때 바른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고르게 펴 발라져 있던 선크림
2. 스노클링 후 뭉쳐서 하얀 띠를 형성했던 선크림
우선은 두께였다.
바른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고르게 펴 발랐던 것이 아니라 바른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적게 발랐기에 선크림의 효과가 반감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보트에 올라탄 후 약간의 찝찝함을 선사했던 팔 위의 하얀 띠들.
물줄기에 휩쓸려 한 곳으로 모인 선크림이 하얀 띠를 형성했다는 점과 그 띠의 분포도가 하얀 조각들의 경계와 얼추 맞아떨어진다는 점으로 미루어보건대, 선크림이 물에 녹아내리지 않고 몸 위를 이리저리 굴러다닌 듯했다. 당연히 그 시간 동안에 피부는 고대로 강렬한 햇빛에 노출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화상을 입게 된 것일 터였다.
어디까지나 흘러내리지는 않았으나 방수가 맞기는 한 걸까?
이후, 엄지손가락만을 까닥이며 오전 오후를 보냈다. 잠시 근처 해변을 둘러볼까 생각도 했으나 협조를 거부하는 뒤꿈치로 인해 마음을 접었다.
그렇게 나는 점심, 저녁을 위한 짧은 외출을 제외하고 방에 틀어박혀, 태양과의 접촉을 일체 거부한 채, 하루를 날려버렸다.
부상에 대한 보상으로 충동 구매한 해산물 파스타는 맛있었고, 이후 얇아진 지갑에 후회하며 사 먹은 5,000원 치 빵도 훌륭했지만, 대체적으로 안일했던 나 자신에 대한 후회로 점철된 하루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