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 크루즈 섬, 홀로 맞는 크리스마스 이브
22. 12. 24: Day 9,
최악의 멀미를 선사했던, 구명조끼를 안 입은 사람 넷이 튕겨 나가 죽었다는 페리에서 어찌어찌 생존해 산타크루즈 섬에 도착했다.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검색하는 것만으로는 도무지 답이 나오질 않아, 짐을 챙긴 후 숙소 프런트로 향했다.
밀짚모자가 참으로 잘 어울릴 것 같은 호스트 아저씨께 주변 식당 및 투어 정보를 여쭈어 보니 오늘 같은 특별한 날은 돈을 조금 쓰더라도 Kiosk 거리라는 곳에 가서 해산물을 먹기를 추천해 주셨고, 투어 정보는 나중에 돌아오면 또 시간이 있을 테니 그때 얘기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거리는 분주했다. 이미 메인 디쉬를 비우고 와인을 홀짝이는 부부들부터 빠르게 말을 주고받는 가족들, 그리고 지나가는 산타 행렬과 뒤이어 따라가는 천진난만한 현지인 아이들까지. 나만 혼자였다. 하긴 누가 크리스마스이브에 홀로 여행을 떠나겠는가.
스미우는 고독함을 애써 밀어내며 선착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인기척에 맞춰 허공을 맴돌다 다시 내려앉곤 하는 펠리컨 한 마리, 서너 뼘 정도 되는 어린 상어들이 나를 반겼다.
저 너머로 황혼이, 흑빛 밤과 주홍빛 낮이 내려앉았다. 위태로이 흩날리던 태양의 숨결이 멎어가자, 지평선 너머로 낮의 잔흔이 물러났고, 머뭇거리는 밤에 진보랏빛 어둠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낮의 잔상과 밤의 손길이 어우러져 수평선 너머로 빨려 들어갔다. 그러다 이내. 칠흑의 밤이 온 하늘을 덮었다.
때로는 선착장을 걷다, 때로는 난간에 기대 일몰을 바라봤다. 작은 직사각형들에 파묻혀 있던 삶에서 잠시 벗어나 누리는 사치에 마음이 달떴다. 황혼의 하늘은 황홀했다.
이미 저문 해를 뒤로 하고 식당을 찾아 몸을 움직였다. 빡빡한 예산이니 가벼운 지갑이니 재정적 여건을 둘러싼 온갖 악조건들에도 불구하고 사실 먹을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랍스터. 랍스터. 랍스터. 무조건 랍스터였다.
아들내미들 얼굴을 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싶으시면 부모님께서는 꼭 일 년에 한두 번씩 주말 저녁 뷔페를 예약하신다. 다른 시간대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다며, 꼭 대게와 랍스터가 나오는 일요일 저녁 타임 뷔페를 고집하시는데 물론 그 배경에는 먹어도 너무 많이 먹는 나와, 반대로 안 먹어도 너무 안 먹는 동생이 있다.
나의 경우, 아직까지도 친구들을 만나면 가끔 회자되고 하는 일화도 있을 정도이니.
한참 많이 먹던 고등학교 시절, 현장체험학습을 다녀온 우리 2학년 1반은 마지막으로 저녁식사를 위해 고깃집에 집결했다. 놀이공원을 하루종일 쏘다녔으니 뱃거죽이 등에 들러붙을 지경이었고, 어마무시하게 먹어치울 것이 분명했기에 차마 양심의 소리를 외면치 못하고 부반장에게 1/N로 내도 정말 괜찮겠냐고 물었었다. (사실 괜찮다고 말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연히 내 식성을 과소평가한 부반장의 입에서 나온 얘기는 어차피 부모님들이 다 내주실 거라는 것이었고, 그렇게 나는 빗장을 풀었다.
결과적으로, 남자 12, 여자 24의 학급에서 남자 여섯이 앉았던 우리 테이블의 비용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기억하기로는 혼자 고기 8인분, 공깃밥 4 공기, 김치말이국수 2그릇을 해치웠고, 다른 테이블의 친구들이 기숙사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묵묵히 고기를 마지막까지 먹다가 메로나를 사주겠다는 말에 혹해 끌려나왔었다. (단 것에 많이 약했다. 여전히 약하고)
성인이 된 이후 양이 많이 줄기는 했으나 그 식성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고, 그렇기에 부모님은 돈 몇 만 원을 더 내더라도 내가 동생이 적게 먹는 양 그 이상을 먹어치우는 (먹어치우면서 정말 행복해하는) 일요일 저녁 뷔페를 꼭 예약하곤 하신다.
뷔페에 가면 꼭 하시는 말씀도 있는데
우선, 쌀국수 서너 그릇 정도를 깨작거리며 건드린 후 후식을 집으러 가는 동생에게
"넌 쌀국수 말고 다른 것 좀 먹어라."라고 말씀하신 후
그리고, 첫 접시부터 랍스터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해치우는 내게
"그래도 네가 동생 안 먹는 것만큼 먹어대니 돈값은 하는 듯하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일 년에 한두 번씩 뷔페를 가게 되면, 나는 무조건 일찍 도착해 (쇼핑을 핑계로 따로 도착한다.) 자리가 아닌 랍스터 코너로 직행해서 꼬리 10개 정도를 집어온다. 일찍 도착하면 랍스터 코너는 언제나 가득 차 있기 마련이기에 양심의 가책을 아주 조금이나마 덜 수 있다고나 할까. 첫 접시를 비운 후에는 다른 코너를 돌더라도 매의 눈으로 랍스터 코너를 주시하며, 많이 집어와도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고 괜찮다 싶으면 7~8개를 또 집어온다.
이런 내가 그렇다고 해서 정말 커다란 랍스터를 먹어본 적이 있냐 하면, 한 두 번 정도밖에 없다. 애당초 랍스터를 나만큼 사랑하는 가족 구성원이 없거니와 비싸기도 너무 비싸지 않은가.
반면 밖으로 나가기 전 호스텔 주인아저씨께 들은 갈라파고스 랍스터의 가격은 꽤나 쌌고, 더욱 중요하게도 신선했다. 밤 사이 잡아온 물건들 중 낙찰된 랍스터들을 식당에서 바로 판다니...
어부들이 랍스터를 잡으려 하면 상어들이 맛있는 건 아는지, 다가와 사람을 무는 것이 아니라 랍스터를 담은 망을 물어뜯는다는 얘기도 들었다.
사람이 적당히 있는 식당을 물색해 가판대의 랍스터를 집어 들고, 갈릭버터구이와 모라 주스를 주문한 후 자리에 앉았다. 음식은 금방 나왔고, TV에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축하 노래들을 들으며 식사를 시작했다.
환상적이었다. 처음 입에 물 때는 적당히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입 안을 감싸오다가도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갑각류 특유의 달짝지근함이 배어 나왔고, 마지막에 마늘향이 조화롭게 감겨왔다. 살 자체가 탱글거리다 못해 쫀득거렸는데, 가히 충격적인 선도였다. 크기도, 가격도, 맛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조금 짭짤하다 싶으면 감자튀김을 먹고, 버터향이 강하다 싶으면 모라 주스를 마시니 Perfecto였고, 식당을 떠나며 연신 Muy Delicioso를 외쳤다.
이후 젤라또도 하나 사먹었는데, 로마와 바르셀로나에서 먹었던 쫀득거리는 젤라또와는 또 다르게 적정 수준에서 끊어지면서 녹아내리는 밸런스가 잘 잡힌 아이스크림이었다. 가장 가까운 맛을 꼽자면 배스킨 라빈스에서 판매하는 레인보우 샤베트와 비슷했으나 비교할 바가 못 됐고, 질을 굳이 따져 보자면 과거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후식으로 제공한 레몬 샤베트에 견줄 수준이었다. 맛은 기네스를 제치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음료에 등극한 모라(블랙베리) 맛이었다.
이후 숙소에 돌아와 땅거북 관련 투어 정보를 아저씨께 여쭈어본 후 잠을 청했다. 식사다운 식사에 후식까지 완벽히 챙긴 만족스러운 하루였다.